제 51 화 천불이 떨어지다
푸른 바다를 누비고 다니던 인어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파도와 친절하게 다가오는 물고기들과 인사를 나누며 더없이 행복함에 둘러싸였다.
시원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바다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갔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바다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한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누비던 인어는 무언가 생각이 막혀 있음에 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 잊은 듯했지만 생각하려 할수록 가로막힌 벽에, 답답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잊으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바다의 허공에 멀거니 멈춰 있던 인어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느새 열흘이 흘렀다. 도아는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었으며 그 곁은 강이 허락한 사람만이 지킬 수 있었다.
후궁들이 돌아가면서 곁을 지키겠다고 했으나 강은 단칼에 거절했다. 도아가 평소 가까이 두었던 사람만 허락했으며 어머니는 수시로 입궐하였다.
강은 매일 밤 정무를 마치면 처소를 찾아와 듣는지 알 수 없는 도아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그 곁에서 잠을 청했다.
“귀인.”
“…….”
“언젠가 그대가 잠이 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소.”
“…….”
“이 여인이라면 평생 이렇게 바라만 보고 살아도 되겠구나.”
어느새 새벽이 물러가고 있었으나 추위에 밀린 해가 늦장을 부리느라 주변은 깜깜하기만 했다.
“그 허언으로 벌을 받는 것 같소.”
고개를 숙이고 도아를 바라보던 강의 코끝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 어디에 있소?”
“…….”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그대가 고통스럽진 않을지 오직 그것이 걱정이오.”
가련한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없었다. 오직 도아만이 용안에 손을 댈 수 있었기에 눈물은 처량하게 흘렀다.
“너를 궐에 들이지 말 것을…….”
뒤늦은 후회 끝에 도아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눈치를 보며 자경전에 든 란희는 서릿발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대비 조 씨를 향해 고개를 바짝 숙였다.
“네 할머니가 병이 났다는구나.”
“예?”
“나이 들어서 생긴 병 말고, 몸을 점점 쓰기 힘들어질 거라던데.”
“의원님은 보내 주셨나요? 거동이 힘드시면 곁에 누가 있어야 할 텐데…….”
할머니 얘기에 마음이 무너진 란희가 눈물을 보이며 대비 조 씨에게 애원을 했다.
“그 전에 내게 고할 것은 없느냐?”
“…….”
“이번에도 빈손으로 온 것이냐?”
“…….”
“그래 놓고 네 할미에게 의원을 보냈느냐 물었느냐!”
화가 난 대비가 손바닥으로 서안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쳤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란희가 쭈뼛거리며 저고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냐.”
“귀인마마의 처소에서 가져온 것이옵니다.”
“그래?”
이에 엄 상궁에게 눈빛을 보내자 란희가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서 대비에게 전달했다.
대비는 바로 봉투를 열어서 안에 있던 것을 끄집어내 펼쳤다. 첫 문장에 ‘후궁 조건서’라 그리 써져 있었다.
‘그래서 귀인의 전각이 멀리 떨어져 있고, 집안사람을 궁녀로 들인 게로군.’
가벼운 궁금증이 해소될 찰나 마지막 셋째 조항에 가서 대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셋째, 서로 간의 합의 없이는 동침할 수 없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서로의 이름을 적고 그 위로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귀인이 보통 맹랑한 것이 아니구나.”
후사를 보기 위해 들인 후궁이었다. 그런데 서로 동침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치미는 화를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것을 윤허한 주상도 제정신은 아니다.”
“대, 대비마마…….”
“사실이지 않으냐! 자리보전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내 그것을 요절냈을 것이다!”
“고정하시옵소서, 마마.”
엄 상궁이 나서서 대비의 노기를 가라앉히려 했다. 바로 앞에 앉아서 할머니 얘기를 기다리고 있던 란희에게 대비의 시선이 향했다.
“이번에는 꽤 쓸모 있는 것을 가져왔구나.”
“마, 망극하옵니다.”
“네 할머니에게 의원을 보내서 극진히 살피라 명할 것이니 염려 마라.”
“거동이 불편하시다면 혼자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있으실 것이옵니다. 부디 단 며칠만이라도 소인을 궐 밖으로 보내 주실 수는 없으시옵니까?”
생각시를 막 벗어난 란희에게 궐 밖으로 나갈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인으로 승격하고 겨우 한 번 나갈 기회를 얻은 것이 전부였다.
“그럴 수는 없지.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
“하오나…….”
“걱정 마라. 내 사람을 붙여 줄 것이니 너는 내가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
“오늘은 아주 잘했다. 다음에도 기대하고 있으마.”
한마디를 더 했다면 아마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가 천벌은 면치 못하겠구나.’
이렇게 된 이상 올 때마다 뭔가 하나씩 들고 오지 않으면 할머니에 대한 소식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조바심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란희는 조용히 다른 궁녀들 속에 스며들었다.
* * *
얼마 전 강은 시현을 대전에 불러서 그를 사헌부의 정오품 관직, 지평에 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정식으로 관식을 하사받아 강의 신하가 된 것이었다. 뛸 듯이 기뻐하는 부친과 달리 시현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나마 시현이 입궐에 뜻을 두게 하는 것은, 청아의 농간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 내통을 하게 되었다.
“그새 수척해지셨습니다.”
“…….”
“귀인마마가 깨어나시면 지평을 보고, 속상해하실 겁니다.”
“송구합니다.”
이제는 말을 지어내는 일에 능숙해져 꽤 현란하게 시현의 마음을 농락하게 되었다.
“귀인마마는 아직이십니까?”
“예, 어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차도가 없으시다 합니다.”
“하…….”
“내 지평에게 들려줄 소식이 이것뿐이라 미안합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숙의마마가 아니셨더라면 진작 폐인이 되었을 소신입니다.”
그 말마따나 시현은 지금도 삶의 애착이 모두 떨어져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었다. 덕분에 영의정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온 터였다.
“허나 귀인마마는 이미 궐에 발이 묶인 분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처음부터 소신이 대궐에 발을 들인 것은 이곳에 귀인마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그 마음이 짙었다. 타닥, 타닥, 불에 타들어 가는 장작처럼 그의 두 눈이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사내가 이미 혼인한 여인에게 저리 매달리는 꼴이라니, 대체 귀인 그것이 뭐라고 사내들이 이 난리들인 거야.’
괜히 투기란 것이 치밀었다. 모두가 염원하는 사내도 갖고, 부족함 없이 훤칠한 이 사내의 마음도 가졌다.
“귀인마마를 더 일찍 붙잡지 그러셨습니까?”
괜한 마음에 던진 말이었다. 시기하는 마음에 생각 없이.
“붙잡았었습니다.”
“……네?”
“귀인마마가 이 얘기는 안 하신 모양이군요.”
“예, 청혼이라도 하셨단 겁니까?”
꽤 위험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도아를 위해서라면 아껴 뒀어야 할 소리였다. 애초에 청아를 멀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시현은 자신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에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보기 좋게 차였습니다.”
“저런…….”
“그래서 처음 숙의마마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아마 귀인마마도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놀란 청아는 그 기색을 숨기려 했다. 그리고 시현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붙잡아야 했다.
“지평의 청혼을 받기 전에 좌상대감에게 후궁 간택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거절할 수밖에 없으셨을 겁니다. 어쨌든 후궁 간택도 왕명이긴 마찬가지니까요.”
애초에 없었던 마음을, 집착으로 허덕이는 자에게 거짓으로 흩뜨려 놓고 있었다. 위험한 장난이었다.
“만약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네?”
“아닙니다, 오래 머문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러도록 하세요.”
말을 얼버무린 시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처소를 빠져나갔다.
“깨어나면 야반도주라도 하시렵니까?”
비웃음이 나왔다. 사랑에 눈이 멀면 부모도 못 알아보고 미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처지라니, 우스웠다.
“청혼을 했단 말이지? 청혼을…….”
입속으로 가렸던 웃음이 결국은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 * *
인어는 더 이상 바다를 누비고 다니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몸을 맡긴 채 허공을 떠다니며 떠오른 기억을 더듬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에 떠밀려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오로지 머릿속을 지배한 한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허공과 망상 그 사이를 떠돌며 정처 없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맴돌던 인어를 바다는 결국 품어 주었다.
-그 끝이 비극일지라도 원한다면 가 봐라.
* * *
평소보다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강이 연에서 내렸다. 고즈넉하게 쌓인 어둠을 켜켜이 밟으며 들어가자 란희가 보였다.
“별일 없었느냐.”
“예, 전하.”
“너는 그만 물러가라.”
강의 눈에도 란희의 존재가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싸늘한 눈빛을 던지고 신을 벗고 들어갔다.
처소 문 앞에는 꾸벅거리며 지키고 있는 무이가 보였다. 벌써 열흘이 넘도록 봐 온 풍경이라 익숙했다.
드르륵.
조용히 들어온 강이 문을 닫고 돌아섰다. 이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이 막혔다.
이불에 누워 있어야 할 도아가 자리에 바르게 앉아 머리를 양어깨로 늘어뜨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는 강을 발견한 도아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 주었다.
“전하.”
잔잔한 부름에 강의 눈에서 눈물이 연거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