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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50)화 (51/93)

제 50 화 천불이 떨어지다

천둥을 동반하여 나라를 집어삼킬 듯 무서운 기세로 쏟아붓던 장대비는 날이 저물어 새벽의 동이 터 오자 멈추었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그간의 가뭄이 씻은 듯 사라지고, 말랐던 땅과 바닥을 드러냈던 호수와 강은 흘러넘치듯 생기를 되찾았다.

해가 솟자 모든 것을 씻고 내려간 비 덕분에 화창하고 맑은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다시 비를 밟아 도아의 곁으로 돌아온 강은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귀인은, 어릴 때 어떠했습니까.”

“위로 제 오라비를 키울 때도 그리 속을 썩지는 않았는데 어찌나 짓궂은지 한 번 하는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선을 보내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달리는 가마를 타고 입궐한 도아의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도아를 붙들고 울다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다시 기력을 회복하여 강과 함께 도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고집이 장하여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는데 역시 그랬습니다.”

“예, 어미의 죄로 병약하게 태어나 여린 몸으로 어찌나 나가는 것을 좋아했는지 모두 혀를 내둘렀습니다.”

“바다를 좋아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요양하러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추억을 상기시키는 부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파도가 치듯 왔다가 지고를 반복했다. 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아를 응시했다.

“찾아봐서 없으면 바다에 가 있고, 또 그러면 제 오라비가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까 제 누이를 찾으러 가기도 하고, 참으로 애를 태웠지요. 그래도 곱고 바르게 자라 대궐에 시집을 가시고, 전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니 그저 다행이라 여기고 마음을 놓았더니…….”

결국은 다시 서글픈 눈물이 흘렀다. 부인은 쥐고 있던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도 도아는 미동조차 없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떠한가.”

“…….”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느냐?”

날이 밝아 어의가 다시 들어서 도아의 맥을 살폈으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차도가 없으시옵니다, 전하.”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예, 귀인마마의 기력이 쇠하시지 않도록 기를 보하는 탕약을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오직 귀인을 살피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라.”

“예, 전하.”

아무 소득도 없이 어의가 물러가고, 무이는 부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데리고 처소를 나가 주었다. 

강은 이불 속에 넣어 두었던 도아의 손을 더듬더듬 찾아내서 꽉 잡아 주었다.

“도아야.”

“…….”

“깨어나기만 하면, 대궐에서 너를 나가게 해 주마.”

마른 눈물이 파르르 떠는 입술을 따라 힘겹게 흘러내렸다. 

“원하는 대로……. 시키는 것은 뭐든 하마.”

“…….”

“그러니 깨어만 나다오.”

간절한 외침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버린 도아에게 닿을 수 없었다. 

* * *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자경전을 찾은 란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 없이 처소에 들었다. 

“귀인이 쓰러지기 전에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워낙 소인을 멀리하시는지라 자세히는 모르오나 소인이 아는 바로는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귀인이 너를 멀리하느냐?”

“예……. 송구하옵니다.”

“하긴, 나를 경계하니 내가 보내 준 너를 쉬이 받아들이진 않겠지.”

흥! 같잖다. 대비 조 씨는 괜히 콧방귀를 뀌다가 꼬락서니 좋게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날 너는 수라간에 있었다고 들었다.”

“예, 귀인마마가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다며 만들어 오라 했습니다.”

“쓰러지던 날 멀쩡했다는 말이냐?”

“예, 일어나서 소세도 하시고 멀쩡히 단장하시어 아침 수라도 드시었습니다.”

“그래? 별일이구나.”

그래 놓고 갑자기 쓰러져서 숨이 멎었다니 더욱 믿기지 않았다. 물증은 없었으나 심증으로 무슨 일인가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소인이 별다른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

“당장은 네가 큰 수를 내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허나, 시일이 지나고도 이런 식의 빈손이라면 나도 네 할머니를 돌봐 줄 수가 없다.”

“예? 하, 하오나……. 대비마마!”

할머니 얘기에 어린 란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단 하나의 가족, 피붙이였다.

“네가 대궐의 물건을 멋대로 훔쳐서 대궐을 나가려 했다는 일이 내게 발각되어 천만다행인 줄 알아라. 만약 다른 이의 눈에 띄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런 너를 내 친히 거두어 가족마저 돌봐 주고 있으니 하늘의 은혜라 여기고, 내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란희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줄줄이 떨어져 내렸다. 어리고 순진한 궁녀를 고른 이유는 다루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내 약조대로 네 할머니를 돌봐 줄 것이니 너는 단 한 시도 귀인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살피도록 해라.”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그만 물러가거라.”

명이 떨어지자 란희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처소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려 등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란희의 앞날과도 같았다.

도아가 쓰러지던 날을 떠올리던 란희는 침을 삼켰다. 수라간에 건너갔다가 생각보다 일찍 전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머리 위로 천둥이 세차게 내려치던 순간이 생생했다. 전각을 가로막고 있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려는데 처소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무슨 빛이지?’

처음 보는 생경한 광경에 란희는 걸음을 멈추고, 빛으로 둘린 처소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빛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그 빛의 위엄에 자연스레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 빛 때문에 귀인마마가 저리된 걸까?’

그날 본 것을 대비 조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갈 때까지만 해도 말하려 했으나 막상 앞에 서자 입이 막혔다.

* * *

번듯하게 자리를 잡은 시현이 먼저 찾은 곳은 도진의 사저였다. 오랜만에 볼 지기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대문 앞에 섰다.

“이리 오너라.”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돌아서려던 그때, 낡은 문소리를 내며 하인이 나왔다.

“참 부지런도 하다.”

그리 말하며 들어서는데 안 그래도 조용한 집 안이 마치 초상집처럼 푹 꺼져 있는 게 보였다.

“시현 도련님 오셨습니까!”

“그래, 안에 있는가?”

“예……. 그런데 저기 그게…….”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별채에 계시니 가 보십시오.”

어딘지 모르게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시현은 서둘러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별채 마루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도진이 보였다.

“이봐, 친구.”

“…….”

“이보게. 내 좋은 소식 들고 왔네.”

그런데 몇 번을 부르며 다가가도 도진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느냐?”

“마마가…….”

“응? 귀인마마 말이냐?”

“어제 대궐에서 혼절을 하셨는데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계신다.”

어제 하늘을 장하게 울리던 날벼락이 시현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 같았다. 

꿈보다 더 꿈같은 말에, 시현이 픽 하고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멀쩡히 잘 계시던 분이 갑자기 왜?”

“모르겠다. 어제 대궐에서 어머니를 모셔 가셨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제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분명히! 내 분명히 이 두 눈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떨기의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도아를 봤다. 그랬기에 이 소식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도진의 얼굴에 우수수 흘러내리는 눈물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대변해 주었다. 

“말도 안 돼.”

어린 시절의 도아였다면 모두 크게 놀라지 않았겠지만 성장한 후로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모두가 황망한 소식을 접하고 대궐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허나 곳곳에서는 도아를 향한 시기가 꽃을 피워 웃음이 만발하기도 했다. 

나란히 만난 나은과 청아는 도아의 전각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나은은 죽상을 하고,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청아는 겉으로는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지만 실상은 밤새 웃느라 잠을 설친 지경이었다.

“가서 문전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설마 그렇게야 하겠습니까.”

“하기는 눈도장을 찍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저어……. 숙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나은이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자 청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아닙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그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인지라…….”

“날 의심했단 말입니까? 설마하니 내 마마의 목숨을 위해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언을 했습니다. 마음 푸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아는 늘 도아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을 실행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느새 도아의 전각에 다다랐다. 그런데 저만치 구석에 관복을 입은 훤칠한 사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아는 이리저리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내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옳거니.’

그러고는 미끼를 잡았다는 듯 신이나 씰룩 웃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마음이 많이 상하신 겁니까?”

“곧 뒤따라 들어갈 테니 먼저 드세요.”

“네,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세요.”

그렇게 나은을 따돌리고, 저만치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청아는 걸음을 돌렸다. 

청아는 연 상궁에게 뒤를 맡기고, 담장에서 기웃거리던 시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영의정 대감의 자제분이십니까?”

“그것을 어찌…….”

“역시 맞으셨군요.”

신뢰를 가질 수 있게끔 다정스레 미소를 지어 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김 숙의라 합니다.”

“예, 그런데 제게는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귀인마마가 걱정돼서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니십니까?”

그것을 어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원했던 반응에 청아는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결례인 줄 알지만 귀인마마께 사가에서의 인연을 종종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귀인마마가 제 얘기를 하셨단 말입니까?”

“예, 워낙 외로움을 많이 타셔서 자주 마마를 뵈옵곤 했는데 담소를 나누시다 보면 꼭 얘기를 하시는지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벗이라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벗이라? 믿기지 않았다. 평생 봐 온 도아는 늘 시현에게 차갑게 굴며 말 한마디 곱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주고받은 사람이 있었다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못 믿는 눈치십니다.”

“그게…….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마마께서 늘 곁에 사람을 두려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점점 더 깊이, 꼬임에 빠져들었다. 시현이 깊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사내의 마음을 흔들 만한 마침표를 찍어 둬야 했다. 

“사가의 인연을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청아는 괜히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 냈다. 

‘나를 마음에 품고서, 그간 싫어하는 척한 거야?’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흔들어 놓았다. 머지않아 눈발도 날릴 것 같은 서릿발 같은 찬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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