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화 천불이 떨어지다
기우제가 열리던 날에 도아는 새벽을 뜬눈으로 맞이했다. 처소 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다가 긴 머리 타래를 풀었다.
경대를 펼쳐 놓고 그 앞에 앉아서 서걱서걱, 긴 머리를 빗질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자라서는 무이가 늘 빗겨 주고는 했다.
“마마! 언제 일어나셨어요?”
“잠이 안 와서 조금 일찍 일어났어.”
“웬 머리를 빗고 계시옵니까?”
“일찍 일어나니 할 일이 없어서……. 소세를 좀 했으면 하는데.”
“아, 아. 금방 들여오겠습니다.”
잠이 덜 깼던 무이는 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듯한 물을 떠 왔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을 물에 씻기고, 물기를 닦았다. 도아의 뒤에 앉은 무이가 빗질로 정돈된 머리를 잘 땋아서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다.
짙은 녹색 치마를 두르고, 해당화가 곱게 수놓아진 노란색 당의를 걸쳤다. 그 위로 항시 지니고 다니는 동심결 노리개를 달아 주었다.
“우리 마마는 어찌 이다지도 고우실까.”
“치…….”
뒤꽂이를 가채 양쪽으로 꽂아 주고 돌아앉은 무이가 흐뭇하게 웃으며 도아를 바라봤다.
“네 손길 아니면 누가 이리 해 주겠니.”
“소인이 좀 더 다른 궁녀들에게 기술을 연마해서 더 곱고 예쁘게 해 드릴게요.”
“지금도 예뻐. 충분해. 고마워.”
잠을 자지 못해 하얗게 뜬 얼굴 위로 물안개 같은 미소가 번졌다. 곧이어 도아는 몸을 틀어서 서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며칠 전에 멀거니 서안에 앉아서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적어 내린 서찰이었다.
“이 서찰을 전하께서 기우제를 지내고 오시거든 전해 드리도록 해.”
“마마께서 직접 드리지 않으시고요?”
“응, 기회를 봐서 전하께서 혼자 계실 때 드려.”
“…….”
“알겠지?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고, 네가 해 줘.”
다른 날과 다른 말투, 표정, 행동이었다. 무이는 받아 든 서찰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서 도아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도아는 제 머리에 꽂아 놓은 뒤꽂이를 빼 들었다. 잠시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을 무이의 머리 한쪽에 꽂아 주었다.
“어? 마마.”
“예쁘다.”
“이 귀한 것을 부정 타면 어쩌려고…….”
무이가 뒤꽂이를 서둘러 빼려고 하자 도아는 그 손을 어루만지며 내려 주었다.
“너는 항상 나더러 예쁘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면서 서안에 올려둔 경대를 무이 쪽으로 틀어 주었다. 생전 이런 것은 해 본 적이 없는지라 무이는 곁눈질로 제 모습을 쳐다봤다.
“근데 내 눈에는 네가 항상 고와 보였어.”
“…….”
“너무 예쁘다.”
꽃을 곁에 두어도 화사한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니 무이는 민망하여 얼굴이 벌게졌다.
“괜히 나를 따라 대궐에 들어온 바람에 모진 고생만 겪었지.”
“고생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마마, 전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평소와 다른 모습에 무이가 걱정하자 도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 주었다.
“어제 가족들도 만나고 그래서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가 봐.”
“허전하셨구나. 소인이 곁에 오래 머물러 있을 걸 그랬습니다.”
“음……. 오늘 유난히 장떡이 먹고 싶네.”
“그러세요? 그럼 소인이 얼른 가서 만들어 올게요.”
“아니, 란희더러 수라간에 가서 만들어 오라고 해.”
이상한 분부였다. 란희를 수라간에 보내서 직접 장떡을 만들라니, 평소라면 이런 명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전하께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시면 드실 만한 것을 만들어 줘.”
“아! 그렇죠. 마마도 함께 만드시겠어요?”
“새벽에 잠을 못 잤더니 곤하네. 나는 좀 쉴게.”
“알겠사옵니다. 그럼 소인이 건너가서 이것저것 만들어 두겠습니다.”
할 일이 생긴 무이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레벌떡 나가려다가 문을 잡고 서서는 말했다.
“그럼 귀인마마는 쉬고 계세요. 아시겠죠?”
“응, 어서 가 봐.”
손짓을 해 보이자 그제야 무이는 처소를 나갔다.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처소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도아는 동심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정표였다.
‘네가 있어 외롭지는 않겠구나.’
숨을 고르던 도아는 바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염원, 깊고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눈물이 흐를 것이고, 하얀 진주와 다르게 인어의 깊은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진주는 푸른색일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식은땀을 흘리던 도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뚝, 손아귀에 떨어진 진주는 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 진주를 손아귀에 감싸 쥐고, 누구보다 염원했던 그것을 입에 담았다.
“부디 비를 내려 주소서.”
말을 마치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진주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얼마 전까지 햇살로 환하던 처소 안은 몰려든 먹구름으로 인해 어두워졌다.
쿠궁!
엄청난 소음과 함께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듯 번개가 내려쳤다. 뒤이어 다시 번개가 온 대지를 뒤덮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쥐고 있던 푸른색 진주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쾅!
전각이 흔들리듯 엄청난 소음을 몰고 온 그것은 하늘이 내린 천불이었다.
“흐읍!…….”
바다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천불은 도아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온몸을 엄습한 고통과 열감이 도아를 휘감아 목을 조여 왔다.
바닥에 엎어진 도아는 괴로움에 두 손의 날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시뻘게진 얼굴 위로 핏줄이 올라왔다.
‘영원히 함께.’
‘내 평생을 건 정인에게 주는 것이오.’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숱한 날들이 한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서서히, 바다의 안개가 걷히듯 숨이 사그라졌다.
* * *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보는 사람의 속이 다 시원하게 내렸다. 지난날의 가뭄을 해소하고도 남을 법했다.
백성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하늘을 보고 입을 벌리고 섰다. 어느 사람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얼싸안았다.
강의 명으로 곳곳을 누비고 있던 시현도 거센 장대비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비가 오긴 오는구나.”
그간의 어느 왕조를 살피더라도 기우제를 지내는 시점에 맞춰서 비가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일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임금님 만세! 만세! 만세!”
백성들은 강이 종묘로 행차하는 것을 보았기에 오늘 기우제를 올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를 만끽하던 백성들이 한 사람의 외침에 전염되어 한목소리로 강을 칭송했다.
‘하늘이 내린 왕, 아주 없는 말은 아닌가 보군.’
픽 하고 웃던 시현은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 냈다.
* * *
지옥 불에 떨어진 듯 번개를 내치던 하늘이 장대비를 쏟아 내자 무녀의 신딸이 비를 흠뻑 맞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비가 와요! 그것도 아주 거센 장대비요!”
신딸이 말하면서 닫혀 있던 문을 열어 주며 무녀에게 비를 보여 주었다. 문이 열리자 비를 동반한 거센 바람이 들어왔다.
“네 말대로 아주 거센 비구나.”
“그렇죠? 모든 사람들이 죄다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고 있습니다.”
“가뭄으로 물이 귀해진 때에 반갑기도 하겠지.”
“네, 이 정도 비면 몇 시진만 내려도 땅을 흠뻑 적실 것 같습니다.”
신이 나 보이는 신딸을 향해 무녀는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곧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손을 펼쳐서 계산을 했다.
“어머니, 뭘 하세요?”
신딸의 물음에도 무녀는 하던 일에 몰두했다.
“이게 언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도아의 사주를 읊어 보던 무녀는 흐름이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희뿌연 안개가 가득 꼈어. 죽음?’
사주를 읽을 수는 없어도 앞은 선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개 속에 갇힌 듯 희뿌연 연기만이 자욱했다.
무녀는 다시 쏟아지는 빗줄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종묘에서 연을 타고 대궐로 돌아가는 길은 갈 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여전히 땅을 적시며 쏟아붓는 빗속에 백성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그중에는 임금님 만세라며 두 손을 하늘에 올리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 백성들도 있었다.
강은 비를 맞으며 행복해하는 백성들을 모두 눈에 담았다. 이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강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넘쳤다. 감격스러운 장면을 뒤로하고 연이 대궐에 들어섰다.
궁녀들과 내관을 비롯하여 대궐에 있던 모두가 강을 떠받들어 외쳤다. 벅찬 순간을 지나 대전에 당도했다.
연에서 내린 강은 오랫동안 꿇어앉아서 빌고, 비를 오래 맞은 탓에 상선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겨야 했다.
“흐흑……. 흑…….”
그런데 처소 문 앞에서 어느 나인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의아해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제조상궁이 다가왔다.
기이한 장면에 강은 갑갑함을 느끼며 턱 끝을 조이던 끈을 풀어 면류관을 벗었다.
“무슨 일이냐?”
“귀인마마를 모시는 나인이옵니다, 전하.”
“그래? 그런데 왜 예서 그리 울고 있느냐.”
정신없이 울기만 하던 무이가 강의 목소리에 퉁퉁 부은 얼굴을 쳐들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다짜고짜 서찰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귀인은 어쩌고,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
“마마가…… 귀인마마가…… 이것을 전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서늘한 편지였다. 무이를 내려다보던 강은 젖은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귀인이 주면 될 것을.”
그렇게 말하는 사이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내 든 강은 첫 줄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강은 편지를 구겨 쥔 채 대전을 빠져나갔다.
“전하! 전하!”
뒤에서 누가 부르거나 말거나 들리지 않는다는 듯 강은 다시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