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47)화 (48/93)

제 47 화 기우제

전라도를 순찰하고 돌아온 후 사저에 머무르며 왕명을 기다리던 시현에게 다시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전하를 뵈옵니다.”

“다시 자네를 부른 것은 다른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네.”

“하명하시옵소서.”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안색이 창백한 강이 보였다. 기우제를 올리고도 비가 오지 않으니 상심이 클 것이다.

“전라도 순찰을 잘해 준 만큼 이번 일도 잘해 주리라 믿을 것이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양의 민심이 흉흉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네. 매관매직을 일삼는 관리를 찾아내고, 백성들 등쳐 먹는 이들을 이 잡듯 샅샅이 뒤져 명부에 적도록 하게.”

명을 받아 든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 앉았다. 두 번째 명을 내렸다는 것은 시현이 강의 신임을 얻었다는 증표였다.

“이번 일을 확실하게 처리한다면 그대에게 관직을 하사할 것이다.”

시현이 관직을 하사한다는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강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숨은 인재를 등용하는 일 또한 과인이 할 일이지. 이번에도 부디 과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길 바라겠네.”

“소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하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정진하겠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말을 마친 시현이 고개를 숙이며 눈앞에 도아를 떠올렸다. 이번 일만 잘 해내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관직에 오르면 언제든 대궐을 드나들 수 있으니 그만큼 도아에게 다가갈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시현의 가슴이 달을 품은 듯 헛되이 부풀었다. 

* * *

도아의 전각에 새로 배치된 란희라는 나인은 말이 없는 편이었다. 묻는 것 외에 달리 말하는 법 없이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위험을 생각하여 무이는 란희가 도아의 곁에 가까이 가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 특히 음식에는 절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경계를 하며 가까이 두지 않아도 천성이 착했던 무이는 알 듯 모를 듯 란희를 챙겨 주었다.

“귀인마마는 심성이 여리고 고운 분이야. 그러니 네가 잘 따르고, 진심으로 마마를 모시면 잘 대해 주실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마마님.”

작은 얼굴로 수줍게 웃는 얼굴은 절대 남을 해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할머니랑 둘이 살았다고 했지?”

“예,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를 따르고 자랐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할머니랑 살지 않고 왜 입궐했어?”

“그게…….”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사적인 일을 꼬치꼬치 캐물은 것 같아 미안해진 무이가 손을 저으며 물러나려 했다.

“너무 가난해서요.”

“……가난해서?”

“네,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들 지경이라 궐에 들어가면 녹봉도 다달이 나오고 풍족하진 않더라도 굶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랬구나. 할머니를 위해서 궐에 들어온 거지?”

“저도…… 굶는 건 싫어서요.”

애써 진실을 말하는 란희의 얼굴에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세상에 굶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 그렇지.”

“예…….”

“그럼 할머니는 잘 계시는 거야?”

“네, 이젠 많이 연로하셔서 곁에서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세요.”

서로에게 서로뿐인 할머니와 란희에게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란희의 얼굴이 알 수 없이 일그러졌다. 

* * *

궐 밖 백성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위해 무녀도 주머니 사정을 봐주며 돈을 받지 않고 점을 봐 주고 굿을 해 주었다.

손님을 보내고 신딸이 들어와 앞에 앉았다. 무녀는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했다.

“임금님이 또 기우제를 지내러 가신다 합니다.”

“그렇겠지. 비가 오지 않았으니 올 때까지 하시겠지.”

“이번에는 하늘이 비를 내려 줄까요?”

“때가 되었다.”

생각을 마친 무녀는 돌아앉아 촛불을 바라봤다. 모시는 신을 향한 정성으로 이 촛불은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럼 이제 비가 오는 것입니까?”

“기운이 달라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결코 하늘의 힘이 닿지 않을 것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마친 무녀는 다시 입을 걸어 잠갔다. 

‘영물의 힘인가.’

조곤조곤 생각하던 무녀는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하고, 수련에 임하게 되었다. 

* * *

기우제를 며칠 앞두고 강이 도아를 찾아왔다. 잠시라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은 그의 마음이었으리라.

“소첩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저번보다 훨씬 솜씨가 좋아졌소.”

“그렇죠? 맛도 그럴 것이니 어서 드셔 보세요.”

도아가 만든 주전부리를 한 입 깨문 강은 주저 없이 맛있다며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주었다. 

“다음에도 기대하겠소.”

“…….”

“이다음에는 해 주지 않을 것이오?”

“아니요…….”

“근데 어찌 답을 주지 않소?”

“기회가 된다면, 꼭……. 꼭 해 드릴게요, 전하.”

이때 알아차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허나 차마 알지 못한 이 날의 진실을 강은 도아의 웃음 때문에 속아 버렸다. 

“소첩,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 말해 보시오.”

“시국이 이럴진대 송구한 청이옵니다.”

“그것은 과인이 결정할 테니 말해 보시오.”

그걸 알면서도 도아는 머뭇거림 끝에 청을 내놓았다.

“가족들을 궐에 초대하여 만나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예, 허락을 해 주신다면 내일 그리하고 싶습니다.”

“음…….”

“어려울까요?”

혹시나 청을 거절당할까 염려한 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강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어려울 것 없소. 그리하시오.”

“정말요? 정말 가족들을 초대해도 되옵니까?”

“좀 더 일찍, 과인이 나서서 그래야 했는데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대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그 말에 도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눈물까지 글썽인 채로 아니라 말했다.

“울지는 말고.”

“참으로 고맙습니다.”

“과인의 귀인이, 가족이 그리웠군.”

다정스레 말을 마친 강이 가까이 다가와 도아를 안아 주었다. 크고 넓은 품은 언제나 도아를 한 품에 쏙 담기게 해 주었다.

그 품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도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전하.”

“응?”

도아는 여전히 품에 기댄 채로 말하였다. 

“전하께서 주신 동심결이, 소첩은 참으로 좋습니다.”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녀 주니 그저 고맙소.”

“평생을, 죽어서도…….”

“응?”

“몸에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고비가 지나가고 있었다. 비밀을 간직한 도아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뒤로하고 한 손으로 노리개를 꼭 쥐었다.

그러다 눈물을 말끔히 지우고, 고개를 들어 강을 올려다보았다. 검고 그윽한 눈동자에, 도아가 있었다.

“꼭 기억해 주세요. 아시겠죠?”

“알겠소. 잊지 않고 기억하리다.”

그 약조에 도아는 활짝 웃으며 다시 품에 안겼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강은 그저 도아를 안아 줄 뿐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 도아의 온 가족이 강의 초대를 받아 입궐했다. 입궐하고 처음 만나는 가족들에게 도아는 한 아름에 안겼다.

온 가족의 손을 따듯하게 잡은 채 처소에 들어 다과를 먹으면서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손은 어머니 또 한 손은 오라버니였다.

“전하께서 많이 아껴 주시고 귀이 여겨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전하께서 분에 넘치도록 아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마마는 충분히 총애를 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이리 어질고 고우실진대.”

“그런데 어찌 자꾸만 우세요, 어머니.”

“좋아서 그럽니다. 꿈에서만 뵙던 마마를 뵈니…….”

결국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그 마음을 누가 모를까? 치열은 핀잔주지 않고 그저 조용히 눈물이 멎길 기다렸다.

“오라버니, 잘 지내셨지요?”

“예, 귀인마마도 잘 지내신 듯 보이니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제 걱정을 하셨습니까.”

“매일을, 그랬습니다. 마마.”

“고맙습니다. 그 걱정으로 무탈히, 잘 지냈습니다.”

누구보다 애틋했던 남매였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잘 알기에 짧은 대화 안에 많은 뜻이 깃들어 있었다.

곧이어 다른 주전부리를 가지고 들어온 무이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서로 지나온 얘기,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가족들이 퇴궐할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제 걱정 말고, 잘 지내세요. 보시다시피 저는 부족한 것 없는 대궐에서 이리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 마마를 뵈었으니 이제는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부디 그러세요, 어머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어머니를 향해 치열이 손을 뻗으며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사이 도진이 앞으로 나서서 도아를 마주했다.

“어머니를 잘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집안일은 오라비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마마의 안위를 살피시면 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저……. 오라버니.”

“예?”

가려던 도진의 걸음을 붙든 도아는 지고 있는 붉은 노을을 받아 붉게 빛이 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시지요?”

“…….”

“조심히 가세요, 오라버니.”

말을 마친 도아는 손을 흔들며 어린 시절처럼 해맑게 웃어 주었다. 푸른색 당의는 어느새 노을에 물들어 붉게 변해 있었다.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아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종묘로 나아가는 이번 행렬에도 강은 어김없이 백성들을 눈으로 살피며 행차했다. 백성들의 눈초리가 달라졌음에 가슴 한편이 낙담으로 짓이겨졌다.

처음과는 다른 간절함이었다. 제단으로 나아가는 강의 몸이 그간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놀란 상선이 다가오려 하자 강은 손짓으로 거절 의사를 비쳤다. 이에 상선은 눈물을 억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도 가엾은 백성들의 눈물을 져버리신다면, 진정 하늘의 신은 없는 것입니다.’

강은 제단 앞에 올라서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을 원망하는 상소가 빗발쳐 억장을 무너뜨려 놓았다.

뜨거운 눈물이 강의 얼굴을 적시고 들었다.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빈 것이 어느덧 한 시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죽어 가는 백성들 앞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하늘의 신이시여. 비를 내려 주소서. 비를 내려 주시어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살펴 주소서.’

간절한 외침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청량하게 개어 있던 하늘 위로 순식간에 검은 먹구름이 덮쳐 왔다. 

매서운 기세에 놀란 신료들이 술렁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쿠쿵!

마치 태초의 땅이 들어설 때처럼 엄청난 소리를 내며 번개가 내려쳤다. 

고개를 숙인 채 비를 기다리던 강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올렸다. 하늘은 이미 당장이라도 비를 쏟을 기세였다.

콰광!

산이 반으로 갈라지듯 번개가 다시 한번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지막, 대궐을 향해 성난 번개가 하늘을 뒤덮으며 번쩍거렸다. 

“비…… 비! 비가 온다!”

그때였다. 세 번의 번개가 내려치고,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듯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 비가 오고 있사옵니다!”

“비……. 정녕 비로다.”

감격에 젖은 강이 흠뻑 젖은 채로 두 손을 하늘 위로 높이 올리며 일어섰다. 그러자 신료들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외쳤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강의 온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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