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46)화 (47/93)

제 46 화 기우제

속절없이 열흘이 흘렀다. 끝내 비는 오지 않았고, 기대에 차 있던 백성들은 낙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 묵직해진 추위에 몸이 자연스레 움츠러들게 되었다. 얇았던 의복도 어느새 도톰하게 옷감이 달라져 있었다.

‘자네가 내 처소까지 어인 일인가?’

‘송구하옵니다. 찾아뵙고 청을 드릴 분이 마마뿐이 없었사옵니다.’

‘전하께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것인가?’

어제 상선이 도아의 처소에 찾아왔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것이 마음고생이 자심했던 것 같았다.

‘전하께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신 직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고 계시옵니다.’

‘……불면증이라면, 잠이 들지 못하신다는 것인가?’

‘예, 그뿐만 아니라 수라도 물리시고 흰죽만 고집하시어 드시옵니다.’

‘…….’

‘이대로 두시면 전하의 옥체가 버티지 못할 것이니, 마마께서 부디 전하의 심기를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그리 말하면서 상선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보였다. 충심이 가득한 사람이니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생각해 보니 기우제를 지내고 며칠 후에 얼굴을 본 것이 끝이었다. 그 후로 만나질 못했으니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전하, 귀인이옵니다.”

밤늦은 시간이었으나 대전에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도아가 스스로 청하여 들었다.

“귀인?”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 침수 들지 않으시고 뭘 하시옵니까?”

“볼 상소가 아직 남았는지라…….”

그는 늦은 시간에 도아가 찾아오자 꽤나 놀란 눈치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도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항상 앉던 자리를 벗어나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 옆에 앉았다.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잘 왔소.”

“예, 전하께서 바쁘신 탓에 못 오시니 소첩이 왔습니다.”

“잘했소. 오는 길에 춥진 않았소?”

“괜찮았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며 애써 웃어 보이는 그의 입술이 말라 있었다. 

“상소는 날이 밝을 때 보셔도 될 것인데 이 늦은 시간까지 보고 계십니까?”

“아마 날이 밝으면 승정원에서 또 이만큼의 상소를 가져올 것이오.”

“…….”

“야참이라도 들겠소?”

“아닙니다, 오늘은 전하께서 침수 드시는 것을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에 강이 응? 이라는 눈짓을 해 보이자 도아는 말갛게 웃으며 분위기를 밝혔다.

“참말입니다. 전하의 자리를 봐 드리고, 잠드시는 것을 보고 갈 것입니다.”

“과인이 아이도 아니고 그럴 필요 있겠소?”

“아이도 아니신데 어찌 그리 잠에 못 드십니까.”

“아닌데?”

“눈 밑이 거뭇하십니다.”

결국 숨길 수 없다는 듯 강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아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다가 그만 상소가 와르르 무너졌다.

“산처럼 쌓여 이리 무너지기도 하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과인이 할 테니 두시오.”

그러나 이미 도아는 바닥을 나뒹구는 상소를 집어 들며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동온돌에 자리 놓으라 할 테니 자고 가시오.”

“그럴 수는 없지요.”

대꾸를 하며 줍다가 그만 상소가 적힌 족자가 굴러가며 펼쳐지고 말았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안의 내용을 읽게 되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니 전하께서는 속히 기우제를…….」

마저 읽기도 전에 강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그저 상소라 여겨졌던 것이 모두 강의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상소가…… 이다지도 많으니…… 전하께서…….”

“귀인.”

“편히…… 쉬실 수 없으신 겁니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금세 치맛자락을 적셨다. 강이 놀라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잡아 주었다.

“우는 것이오?”

“아니요…….”

“울고 있지 않소.”

“어둠에 속아 잘못 보신 겁니다.”

도아는 고개를 저어 가며 아니라 했다. 이윽고 앞에 다가온 강을 와락 안아 주었다. 

“오늘은 소첩이 전하를 재워 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편히 잠드세요.”

달리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미 본 것을 잊을 수도 없으니 그저 이 순간 강이 편히 잠들기만을 바랐다.

동온돌 금침에 누워 있는 강에게 웃어 주며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한 손은 그의 손을, 다른 손은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자고 가래도.”

“쉬이……. 눈 감고, 주무세요.”

“그럼 정말 이대로 자도 되겠소?”

“부디 그래 주세요.”

그리 말하자 강은 스르륵 눈을 감고, 도아의 손길에 의지했다. 토닥이는 손은 일정하게 강을 다독였다.

그렇게 한 시진이 되어 갈 무렵 새근새근, 강이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도아는 한참 동안 강을 토닥여 주었다.

* * *

기우제를 지내고도 비가 오지 않아 대궐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강의 심기를 거스를까 모두 숨을 죽이고 다녔다. 

그런 중에 대제학이 몰래 전각에 들어 청아를 만나고 갔다. 대전에 도포 차림으로 드나든 사내는 근래 한 명뿐이 없다고 했다.

‘영의정 대감의 자제뿐이 없습니다, 마마.’

예상은 보란 듯 적중했다. 그는 왕명을 받아 특별 어사로 진급해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온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도아가 은밀히 만난 사내는 시현이란 뜻이었다. 이후 청아는 궐 밖으로 사람을 풀어 영의정 댁에서 일하던 노비를 수소문했다.

“뭐 좀 알아 왔는가?”

“당시 몇 년 일했던 하인을 찾기는 했사옵니다. 듣기로 귀인마마 댁과 친분이 두터워서 매일같이 그 댁에서 살았다고 하옵니다.”

“그래? 허면 귀인마마와도 아주 가깝게 지냈겠구나.”

“예, 야시장이 열리면 함께 다니기도 하고 그랬으니 가까웠던 모양이옵니다. 그리고 영상댁 도령이 귀인마마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하옵니다.”

누가 있으나 없으나 민망한 줄도 모르고 도아 얘기를 이리저리 뿌리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연심을 품지 않았다면 불가한 일이지.”

“그런데 마마.”

“왜 그러는가?”

“음……. 하인의 말에 따르면 귀인마마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뒷말을 들은 청아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신이 나 듣던 얘기와 상반되는 내용에 되묻기에 이르렀다.

“워낙 치마만 두르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탓에 귀인마마가 대꾸조차 잘 해 주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남들 이목이 두려워서 그랬다면 누가 알겠느냐?”

“…….”

“됐다. 후자는 듣지 않은 걸로 하마.”

그리 말하면서 돈이 두둑하게 들은 주머니를 툭 하고 바닥에 던졌다.

“이것을 그자에게 갖다주고, 방금 내가 말한 대로 전해라.”

“예, 숙의마마.”

“그리고 당장 자경전으로 갈 것이니 차비하게.”

말을 마친 청아는 경대를 꺼내서 거울에 보이는 제 모습이 어떠한지 살폈다. 머리며 옷매무새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 * *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여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대비 조 씨는 이내 청아의 말에 솔깃해졌다.

“마치 대궐 사람은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굴고 계십니다.”

“음……. 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네.”

“송구하옵니다. 귀인마마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닐지 의문이 드옵니다.”

찾아온 청아는 도아의 전각에 집에서 데려온 하녀만 머물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대비는 호기심이 동했다.

“또한 품계와 총애에 걸맞지 않게 인적이 드문 전각에 머무는 것도 그렇사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귀인의 행보에 맞지 않긴 하구나.”

“그러하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흠……. 밖에 엄 상궁 있느냐.”

이리하여 밖에 있던 엄 상궁이 서둘러 들었다. 대비 조 씨는 생각에 잠긴 듯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당장 귀인의 처소에 나인을 보내 줘야겠다.”

“몇 명이나 보내올까요?”

“귀인이 단출한 것을 좋아한다니 여럿 보낼 건 없고, 한 명만 보내 주도록 해라.”

“예, 혹 마음에 두신 아이가 있으시옵니까?”

“보내기 전에 선을 봐야겠으니 자네가 알아서 추린 뒤 데려오도록 하게.”

“예, 대비마마.”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청아는 나오는 웃음을 막은 채 대비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 * *

벌써 몇 시진째 지필묵을 가져오라 명한 뒤 멀거니 앉아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붓을 들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하여 무이가 나서 보려 했으나 도아가 풍기는 분위기가 무겁기에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귀인마마, 대비전에서 상궁이 나왔습니다.”

“대비전에서?”

“예,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멀거니 앉아 있다가 무이의 말에 도아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엄 상궁이 처음 보는 나인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귀인마마.”

“자네가 어쩐 일인가?”

“대비마마의 명으로 나인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응?”

신을 신고 아래로 내려가자 엄 상궁 곁에 서 있는 앳된 얼굴의 나인이 보였다. 

“대비마마께서 마마의 전각에 궁녀가 혼자인 것을 아시고, 소인에게 이르시어 나인을 보내라 명하시었사옵니다.”

“…….”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마마의 뜻을 생각하시어 대비마마께서 많이는 되었고, 단정한 나인 한 명을 보내라 하셨사옵니다.”

“대비마마께서 깊이 마음을 써 주셨네.”

“그러한 줄로 아옵니다.”

달리 거절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엄 상궁이 옆에 서 있던 나인에게 눈짓을 해 보이자 뻘쭘히 서 있던 나인이 한 발 나섰다.

“충성을 다하여 귀인마마를 모시겠사옵니다.”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고생했네, 엄 상궁.”

곧이어 엄 상궁이 물러가고 장내가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도아는 아무 말 없이 제 앞에 서 있는 앳된 나인을 응시했다.

몸집은 다소 왜소하고,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생각시를 막 벗어나 나인이 된 듯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이름을 물었느니라.”

“아, 아…….”

많이 긴장했는지 작은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정란희라 하옵니다, 귀인마마.”

“란희?”

“예……. 마,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옵니까?”

“내가 무슨 권리로. 아니다.”

란희라 하는 궁녀는 사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대해 주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저 아이를 보낸 사람이 대비 조 씨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를 감시하라 보낸 아이겠지.’

못되게 굴자니 어린아이를 상대로 할 짓이 못 되었다. 이래저래 한숨 나오는 상황에 도아는 말없이 란희를 등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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