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화 기우제
대궐에서 돌아온 시현은 누더기가 된 옷을 벗을 새도 없이 도아를 만났다는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도아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입궐을 택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에 재회를 만끽할 줄 미처 몰랐던 탓이었다.
‘미치신 겁니까?’
얼음장보다 더 차갑고 싸늘한 눈빛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시현은 늘 그런 모습만 봐 왔기에 놀랍지 않았다.
그러다 가슴 속에 넣어 두었던, 비단에 감춰 놓은 인어 비늘을 꺼냈다. 오랜 세월을 거쳤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반짝거리고 있었다.
“인어 비늘이라니, 진짜일까?”
왜 인어 비늘이 도아가 지내던 화원 호수에 있었던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300년 전 도아의 가문은 인어 사냥에 앞장서던 가문이었어. 알아내면 뭔가 이 비늘에 대한 답이 나올지도 몰라. 어쩌면 그것으로 도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생각에 거기에 미친 시현은 도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손을 뻗을 수조차 없이, 먼 사람이 된 듯 달라져 버렸다.
화려하게 단장하여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은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자태였다. 그래서 더욱 손을 뻗어 만지고 싶어졌다.
거침없는 욕망의 꽃이 시현의 심장에 피어났다. 가질 수 없을 것을 향한 갈증이었다.
* * *
자경전에 있다가 강이 곧 기우제를 올린다는 소식을 접한 대비 조 씨는 아연실색하며 서둘러 대전으로 향했다.
모자의 사이가 전과 같지 않은 후로 처음 대전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열띤 토론을 마친 신료들이 밖으로 나가자 대비가 안에 들었다.
“대전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젠 이 어미가 대전에 오는 것도 싫으신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닌 줄은 어마마마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요즘 주상께서 어미 보기를 돌과 같이 하시니 이리 꼬일 수밖에요.”
만나자마자 서로 으르렁거리며 기 싸움을 했다. 강은 지친 몰골로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주상께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방 순찰을 보낸 어사에게 참혹한 광경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자 대비 조 씨는 끔찍했던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선왕께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셨다가 어찌 되었는지 몰라 이러십니까?”
“아바마마께서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셨듯이, 소자 또한 그리할 수 없습니다.”
“해서 어찌 되셨습니까?”
“…….”
“백성들이 자기들을 가엾이 여기는 군왕의 마음을 알아주더랍니까?”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어 가는 대비 앞에서 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눈으로 봤던 그 날의 참극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왕께서 기우제를 지내고도 가뭄이 지속되자 백성들의 원성은 오롯이 선왕께 향했습니다. 선왕이 지은 죄가 많아서 하늘의 노여움을 샀고, 그 죄를 모두 백성이 받고 있다며 성문을 두드리며 몰려왔었습니다.”
그 일로 백성들의 신뢰를 잃은 선왕은 비가 올 때까지 괴로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에게도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렇다 하여 이대로 두 손 놓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다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눈이라도 온다면 백성의 절반이 기근에 휩싸여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
“기우제를 물릴 뜻이 없으니 이만 자경전으로 돌아가십시오, 어마마마.”
이미 마음이 확고하게 박힌 강을 돌려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질긴 고집을 알기에 대비 조 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주상께서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질 않는구나.”
밖으로 나온 대비 조 씨는 한탄을 늘어놓으며 대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 * *
기우제 소식을 접한 은하는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후궁들을 교태전으로 불러들였다.
세 후궁이 나란히 한곳에 앉아 은하를 마주했다. 그 뒤로 십장생도가 화려하게 그려진 병풍이 눈에 띄었다.
“전하께서 수일 내로 종묘로 납시시어 기우제를 올리실 것이네.”
“직접 말씀이옵니까?”
“그렇네.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궁핍해지니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일세.”
대궐에 갇혀 눈과 귀가 막힌 내명부에서는 밖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신료들에게 근신을 명하시고, 수라상에 고기를 금하시는 등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려 많은 것을 감내하고 계시네. 이런 때 내명부에서 잡음이 나서는 안 될 것이니 다들 행동거지에 더욱 신경 쓰고, 조용히 지내도록 하게.”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세 후궁이 나란히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또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비가 오길 빌어 주시게.”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다들 한자리에 모였으니 차나 드세.”
당부할 말이 끝나자 처소 안으로 다과상이 들어왔다. 그런데 항상 형형색색으로 곱게 치장한 다과가 담겨 있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차만 덜렁 놓여 있었다.
“내명부에서도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당분간 자네들의 처소에서도 육류를 금할 것이며 다과의 호화도 내려놓아야 할 것일세.”
청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겨우 입술을 다잡고 있을 때, 도아와 나은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청아도 뒤늦게 따라 움직였다.
“차 맛이 좋으니 들게나.”
소박해 보여도 정갈하게 우린 차 맛은 일품이었다. 향긋한 차향이 조용히 연기를 타고 올라갔다.
* * *
하루가 다르게 문턱이 닳도록 도아를 찾던 강의 걸음은 나날이 멀어져만 갔다.
서운함보단 걱정이 앞서는 때였다. 오늘도 여전히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강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 상선이 들었다.
“전하께서 누각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사옵니다.”
그 말에 새로 단장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누각으로 향했다. 겨우 며칠 만에 보는 것인데 설레는 마음이 터질 듯했다.
“전하.”
가쁜 숨을 내리누르며 뒷짐을 지고 있던 강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있던 등불 너머로 강의 야윈 얼굴이 드러났다.
‘많이 야위셨구나.’
그가 손을 내밀며 맞아 주자 도아는 거절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았다.
‘하늘의 일을 두고, 어찌 이리도 자책하십니까? 전하의 탓이 아닌 것을요.’
손끝을 타고 넘어오는 그의 감정에 도아의 심장이 바늘에 찔리듯 고통스럽기만 했다.
“이틀 후에 종묘에 가서 기우제를 지낼 것이오.”
“예, 중전마마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부디 그날 소낙비가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소.”
“소첩도 그리되길 소망하고, 천지신명께 빌고 있겠습니다.”
조용히 강의 마음을 따라 주니 용안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대전에서 내내 잿빛과도 같이 있었기에 상선의 마음이 놓였다.
“잘 지내고 있었소?”
“예, 소첩의 걱정은 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너무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마세요.”
“보고 싶어서 그러지.”
다가온 손길에 도아는 눈을 감은 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어느새 강이 다가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있어도, 보고 싶소.”
“안고 있으면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응?”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이 몸을 살짝 떼고, 도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젠 그립지 않으시죠?”
“더 가까이서 봐야겠소.”
“지금도…….”
다가온 입술은, 도아의 말을 삼켰다. 애정이 담긴 입맞춤에 온몸이 녹아내릴 듯 감정에 간절해졌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도아는 두 손을 올려서 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하께는, 제가 있어요.”
“…….”
“제게 기대세요.”
작게 속삭이는 말에 강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은애하옵니다.”
“…….”
“전하.”
말을 마친 도아는 까치발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감은 채 강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힘들어 마세요.’
두 팔로 강의 목을 감싸 안으며 더 가까이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강은 한 팔로 가는 허리를 휘감으며 깊게 숨을 마셨다.
누각의 난간에 앉혀진 도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머문 강을 눈에 담았다.
그의 눈이 언제나 그랬듯 도아를 원하고 있었다. 애타는 눈 속에 도아가 있었다.
“도아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성스러웠다. 다시 불러 달라고 눈빛으로 졸랐다. 그가 다시 불러 주자 숨이 멎는 듯했다.
“홍도아.”
숨을 고르자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파도를 만난 듯 넘칠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은 도아는 강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은 도아의 긴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졌다. 고인 눈물이 흐를 듯 말 듯 파르르 떨렸다.
* * *
오늘은 용포를 입지 않았다. 의식을 위해 곤복을 입고 머리 위에는 익선관 대신 면류관을 올렸다.
준비되어 있던 연에 오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종묘로 향하였다. 하늘은 흰 구름이 가득하여 화창하기만 했다.
담담히 마음을 비운 강은 오롯이 비가 오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만을 품었다.
예조에서는 의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해 놓았다. 강이 종묘에 당도하자 지체되지 않고 의식이 거행되었다.
하늘과 닿을 듯 가장 높은 곳에 제단이 마련되었다. 그곳에 올라선 강은 조상들에게, 하늘의 비를 주관하는 용신에게 비를 달라 청했다.
후에 치열이 제단에 올라 강을 대신하여 기우제문을 낭독하였다. 기우제문에는 구구절절 강의 잘못을 지적하며 죄를 뉘우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강이 나서서 부디 비를 내려 달라 간절히 청하였다. 강은 절을 올리면서 내내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손끝에서 놓지 않았다.
모든 의식을 마치고, 제단에서 내려오던 강이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화창한 날에 말문이 막혔다. 막막함을 애써 감추고, 아래로 내려왔다.
모두의 기대 속에 속절없는 나날이 지났다. 속이 타들어 가듯 간절하게 비를 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하늘은 모르는 듯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