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화 동심결, 평생의 정인
나인의 손에 의해 문이 열리자 그 틈새로 도아와 시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라고 말았다.
‘다시는 볼 일 없다고 여겼는데.’
금세 차가운 눈초리로 돌아온 도아는 그의 눈을 피하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몰라보게 변했구나. 다른 사람이 되었어.’
강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도아는 사가에서 수수한 모습으로 지내던 때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귀인마마가 오셨사옵니다.”
나가려던 시현이 자리에 멀거니 서 있자 강이 물었다.
“그런데 왜 들어오지 않고.”
뒤이어 강의 말소리가 들리자 도아는 그를 외면한 채 안으로 먼저 들었다.
“무슨 일이오?”
“아무 일도…….”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저 웃어넘기려던 도아의 말을 시현이 낚아채 버렸다. 다시 몸을 안으로 들인 시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귀인마마는 소인의 오랜 벗의 누이시옵니다.”
“아, 그래?”
“신분을 망각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서 추태를 보였으니 벌하여 주시옵소서.”
오랜 벗의 누이라, 곱씹어 보던 강이 곁에 앉아 있던 도아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사실인지 물었다.
그러자 도아는 별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인연이 있는 줄 미처 몰랐군.”
“인연이라니요, 거창한 단어이옵니다. 그저 오라비의 벗이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뭐, 그대가 잘 따르던 오라비의 벗이라 하니 어사가 더 좋게 보이는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초리에 도아는 비스듬히 앉은 채 오로지 강만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주제에 잘도 어사가 되었구나. 부친의 뒷배를 쓴 탓이겠지. 우습구나.’
헛웃음이 절로 나오려 했다. 한량으로 기생 치마폭에 둘려 살던 사내가 버젓이 청렴한 사람 흉내를 내고 있으니 우습기도 했다.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전하, 귀인마마.”
“살펴 가도록 하게.”
“예, 전하.”
이번에는 정말 그가 대전을 나섰다. 비로소 도아의 마음이 편안하게 누그러졌다.
“오라비의 오랜 벗이라, 귀인이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었소?”
“예, 그저 오라버니의 벗이었습니다.”
“괜히 어사가 부러워지는군.”
“오라비의 벗이 부러우십니까?”
들고 온 것을 서안에 펼쳐 놓으려던 도아가 강의 말에 의문을 던졌다.
“설마 그것이 부러울까.”
“하오시면?”
“그대의 어릴 적 모습을 봤을 것 아니오.”
“아…….”
“어릴 땐 또 얼마나 예뻤을지.”
꿀이 덕지덕지 바른 말을 건네니 낯간지러웠던 도아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매일 병석에 누워 있으니 안색이 파리하여 뼈에 가죽만 겨우 붙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그 모습을 보셨으면 마음을 달리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나 아팠소?”
“이제는 아니니 염려 마세요.”
도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지만 강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은 떠나질 않았다.
“과인의 곁에서는 아프지 않길 바라오.”
“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것이니 마음 놓으세요.”
무언의 약조, 도아는 다시 활짝 웃어 주며 걱정 말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런데 이게 다 무엇이오?”
“나인과 함께 만든 것인데 처음 만들어 본 것이라 생긴 것은 볼품없습니다.”
“대전 소주방 나인들보다 훨씬 솜씨가 좋소.”
“칭찬이 지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하옵니다.”
도아가 괜히 민망하여 그리 말하자 강은 진심이라는 듯 주전부리를 입에 털어 넣고,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 모습이 여간 뿌듯하지 않아 도아는 돌아가면 무이에게 제대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곧 신료들이 올 것이라 오래 함께 있지 못할 것이오.”
“예, 소첩도 이것만 전해 드리고 가려 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늦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소.”
“안 그래도 이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오늘은 늦으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동온돌에서 침수 드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정이 되도록 기다릴 게 분명했다. 강은 도아의 손에 깍지를 끼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지.”
“예?”
보답이라는 말에 되묻자 강이 가까이 다가가 도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속닥속닥.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 않았으나 귓속말을 듣던 도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다.
* * *
대전에서 나온 도아는 연신 행복에 겨운 얼굴이었다. 강이 남긴 귓속말을 떠올리며 두 손을 꼼지락거릴 때 무이가 다가왔다.
“그런데 마마.”
“응? 왜?”
“좀 전에 대전에서 도포 차림으로 나온 분 말입니다. 그분 시현 도련님 맞으시죠?”
“용케도 알아봤구나.”
맞는다는 소리에 무이가 호들갑을 떨면서 맞장구를 치려는데 저만치 믿기지 않는 인물이 버젓이 서서 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대궐을 떠났어야 할 시현이 가지 않고, 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마, 마마…….”
보란 듯 그 시선을 외면하고 길을 꺾었다. 그러자 무엄하게도, 시현은 성큼성큼 다가와 곁에 섰다.
“미치신 겁니까?”
“잘 지내시는지 마마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후궁의 안위를, 어찌 전하의 사람이 궁금해하십니까?”
“귀인마마.”
지독하게도 따라붙었다. 이에 도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본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것도 전부 다.”
“어사와 내가 이런 식으로 함께 있는 것이 남들 입에 오르내린다면 추문이 될 겁니다. 부친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신중하게 구십쇼.”
경고를 날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시현은 그마저도 좋다는 듯 말도 안 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게 시집오너라.’
행여나 과거에 시현이 추파를 던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상호 간의 애정 없이 그저 말뿐인 일방적인 청혼이었지만 대궐에서는 그런 작은 흠도 돌풍이 될 수 있었다.
“다시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안부 드리겠습니다.”
도아의 말은 도무지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잘 지내고 계세요, 귀인마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는 이미 저만치 가 버리고 없었다. 그럼에도 시현은 꿋꿋이 담아 온 말을 토했다.
‘보고 싶었다.’
끈질긴 눈길에 도아는 몸서리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도련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더는 마주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곁에 있던 무이도 읽은 것 같았다. 변질된 그리움은 집착과 광기를 박아 놓았다.
* * *
처소에 멀거니 앉아 무녀를 만난 일을 더듬고 있던 청아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숙의마마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고명한 사주를 품고 나셨습니다.’
‘섭리를 어기지 않으신다면 날 때 품고 난 것을 평생 지니고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무녀의 말뜻을 모른다면 웃어넘겼겠지만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그런 말을 하니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내 숙의 따위에 만족하며 볼품없이 후궁으로 살 것이었으면 정승댁 정실 자리에 들어앉았을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입궐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나도록 승은조차 입지 못했는데 그런 소리마저 들어야 한다니 속이 뒤집혔다.
“마마, 연 상궁이옵니다.”
“들게.”
곧이어 연 상궁이 상기된 얼굴로 급히 처소에 들었다.
“좀 전에 귀인마마가 대전을 다녀갔다고 하옵니다.”
“이제는 대전도 멋대로 드나드는구나.”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무슨 이상한 일?”
본론은 이제부터였다. 청아의 명으로 도아의 뒤를 밟고 다니던 연 상궁이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도포를 입은 사내가 대전에서 나왔는데 그자가 근처를 서성이다가 대전에서 나오는 귀인마마를 만났다고 하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듣지 못했고?”
“예, 행여나 들킬까 거리를 두었는지라 대화는 듣지 못했사옵니다.”
“흠…….”
“그런데 그 사내, 눈빛이 애틋했사옵니다.”
도포를 입었다면 아직 관직에 제대로 오르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청아는 요목조목 머리를 굴려 가며 생각했다.
“사내의 외관은 어떠했느냐?”
“곱상하게 생긴 외모에 키는 훤칠하게 크고, 행색은 남루했사옵니다.”
“젊은 자였느냐?”
“예, 상당히 젊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청아가 생각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전하께서 영상을 신임하시니 확실할 때 움직여야 해.’
우선 도아가 만난 도포 입은 사내의 정체를 확실히 밝히려면 부친의 힘을 빌려야 했다.
‘내 분주해지겠구나.’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에 독침이 서려 있었다.
* * *
대전에 앉아 보고를 받기만 하던 강은 시현의 눈과 귀를 통해 실체를 확인하고, 적잖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차일피일 미뤄 두었던 것을 실행에 옮길 때임을 깨달았다.
“과인이 당장 기우제를 지낼 것이니 예조에서는 실수 없이 준비하여 고하도록 하라.”
“예, 전하.”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실수는, 용납지 않겠다.”
이리하여 임금이 지내는 기우제가 열리게 되었다. 이제 이 시점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망은 임금을 향할 것이다.
천자, 하늘에서 내렸다는 임금이 제를 올리고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임금이 부정이 타 하늘의 노여움을 얻은 것이 된다.
강이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하늘을 쳐다보던 도아의 귀에도 닿게 되었다.
“하루속히 비가 와야 할 텐데 걱정이옵니다.”
“그러게…….”
“마마도 비가 안 와서 그러세요?”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들여다보던 무이의 말에 도아는 차마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기우제를 지내시면 하늘도 감동하셔서 비를 내려 주실 겁니다.”
모두 그리 생각하니 강이 견뎌야 하는 압박의 무게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내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잠자코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실망하실까?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도아는 결국 오늘도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말간 하늘만 원망스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