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화 동심결, 평생의 정인
후원을 가득 수놓았던 꽃들이 모두 사라지고, 붉게 물든 나뭇잎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위를 밟을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대비 조 씨와 대제학은 자경전 후원을 거닐었다.
“도화군이 별저로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예, 대궐에 기별도 없이 홀연히 떠났다고 하옵니다.”
“저도 사람이라 눈치가 있으니 그랬겠지요.”
“대비마마께서 후사 문제로 후궁을 들인 마당에 도화군이 먼저 후사를 보다니, 너무 성급했사옵니다.”
도화군의 얘기에 대비 조 씨는 심기가 뒤틀린 듯 혀를 찼다.
“당장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주상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섣불리 움직였다간 분란의 화살이 될 겁니다.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정이 많으셔서 그러시옵니다.”
“원, 무슨 정이 그리도 많고 헤프신지 모르겠습니다. 귀인을 곁에 끼고도니 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입니다.”
“그것이 어찌 전하의 탓이겠사옵니까. 모두 귀인이 요사를 부린 탓일 것이옵니다.”
대제학은 대비의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또한 감히 왕의 후궁을 두고, 요사를 부린다는 망극한 단어도 서슴지 않았다.
“요즘 중전마마와 사이가 소원해지신 듯하옵니다.”
“쯧쯧……. 가문을 보고, 중전 자리에 앉혀 놨더니 목석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송구하옵니다.”
“후사를 낳지 못하고도 내 중전을 탓하지 않으니 건방을 떠는 겁니다. 자꾸 독단적으로 내명부를 손아귀에 넣으려 하니 내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 은하의 뒤에 버젓이 강이 서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은하에게도 섣불리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칠거지악의 으뜸을 무자(無子)라 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라 했사옵니다. 또한, 불순(不順)하여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며느리를 삼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얘기한 것 중 은하가 저지른 죄악이 두 가지나 되었다. 대제학이 자리에 선 채 고개를 숙였다.
“대궐의 가장 웃어른이신 대비마마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셔야 하옵니다.”
“중전은 이 사람이 직접 뽑은, 며느리입니다.”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후궁마마들도 대비마마께서 모두 직접 뽑으신 줄로 아옵니다.”
이미 대제학의 뜻을 간파한 대비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말이, 꽤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목숨을 걸고 충언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중전은 현숙하고, 지혜로운 국모입니다.”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주상과의 사이가 더없이 돈독하기도 합니다.”
“허나 대를 잇지 못하고 계시옵니다.”
모든 이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답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도 대를 잇지 못하는 아내는 쫓겨나는 것이 당연했다.
“좋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대비마마.”
대차게 욕만 먹고, 쫓겨나면 어쩌나 속으로 걱정하던 대제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들만 낳는다면 중전 자리인들 못 줄까?’
코웃음을 친 대비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은 대전에 가져다줄 주전부리를 직접 만들기 위해 도아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요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하게만 자란 양반 규수가 처음부터 능숙하게 다과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버린 것이 더 많아지자 결국 무이가 나섰다.
“대단해. 생각보다 솜씨가 좋은데?”
“마마께서 평생 드신 주전부리는 모두 소인의 손을 거친 것들이옵니다.”
“앞으로 나한테도 하나씩 전수해 줘.”
“귀하신 손에 굳이 물을 묻히려 하십니까.”
“내가 손수 만들어서 드리고 싶어. 그래야 전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고…….”
수줍은 연심을 비추자 무이는 잇몸이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대신 칼을 쓰는 일은 위험하니 당분간 소인이 하겠습니다.”
“응, 이 공간에서는 네가 스승이니 말 잘 들을게.”
“스승이요?”
스승이란 단어에 무이가 감격한 듯 눈을 초롱초롱 떴다. 그런데 함께 웃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가슴을 꽉 조이는 무언의 통증이었다. 열에 들끓어 아플 때도 겪어 본 적 없는 낯선 통증에 말문이 막혔다.
“이건 이렇게 하셔서 하시면 되옵니다. 그리고 이건……. 마마?”
“…….”
“안색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으응……. 아니야.”
“어디 아프세요? 이렇게 저 좀 보시옵소서.”
어려서부터 의원을 곁에 끼고 살았던 도아를 하녀인 무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랬기에 도아의 작은 신호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랬어.”
“정말이세요? 소인한테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정말이야. 미안해. 딴생각했어.”
갑자기 찾아온 통증은 당황할 겨를도 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정말이시죠? 어디 아프신 거 아니시죠?”
“응, 어디까지 말했지?”
다시 멀쩡해진 도아는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저 잠깐 지나가는 것 정도라 여길 만큼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자객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부원군은 그날 이후로 칩거 아닌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부부인이 항시 곁을 지키고 앉아 손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니 단절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채에 앉아 멀거니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책을 읽는 척하던 부원군이 골똘히 생각했다.
‘자객이 분명히 전하께서 활에 맞았다고 했는데 잘못 본 걸까?’
자객은 분명 강이 활에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대궐에서 쫓겨난 궁녀는 강이 어떤 상흔도 입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상하구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곁에서 수를 놓고 있던 부부인이 먼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긴 부원군을 응시했다.
“또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
“대감.”
“응? 뭐라고 했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 여쭈었습니다.”
궁녀가 하녀로 들어오고, 대궐에 다녀온 부부인은 몇 시간 동안 부원군을 붙잡고 화를 내다가 속상함을 토했다.
“옷고름을 끊겠다는 말을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어허, 또 그 소리요?”
“이번에는 전하께서 덮어 주셨으니 감히 들추지 않는 겁니다. 만약 또다시 중전마마께 어떤 해를 가하는 일을 하신다면 끝을 보시게 될 겁니다.”
“끝을 본다니, 그 무서운 소리 그만 좀 하시오.”
그러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였다. 부부인은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다.
“중전마마께서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위해 구휼미를 모으고 계신답니다. 갖고 있는 패물과 전답을 모두 내놓을 것이니 그리 아세요.”
“패물은 그렇다 쳐도 전답을 모두 내놓겠단 말이오?”
“그것들 아니더라도 우리 두 사람 평생 몫은 넉넉히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부인!”
“전하께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다. 마지막 말에 부원군은 입을 꾹 다문 채 반문하지 못했다.
“날이 밝는 대로 그리할 것입니다.”
“이건 뭐 상의도 없이 통보니…….”
“대감께서 일을 그르치지만 않으셨어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겠소. 알았으니 그만 말하시오.”
아직도 궁녀가 얼굴에 낙인을 찍고 궐에서 쫓겨 온 날만 떠올리면 오금이 저렸다.
“계속 거기 있을 것이오?”
“예, 당분간은 계속 대감의 곁에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었다. 구시렁거리던 부원군은 묘수를 내기 위해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 * *
대전에서 상소를 읽던 강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상소인즉 부원군이 제 앞으로 된 전답을 모두 나라에 환원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사저 몇 개를 거뜬히 사고도 남을 만큼의 패물도 내놓았다고 적혀 있었다. 강은 이렇게까지 무리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부원군이 무리를 했군.”
나쁘지 않았다.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이런 큰 기부라니 마다할 리 없었다.
“이 상소를 모든 신료가 돌아가면서 읽게 하라.”
“예, 전하.”
상선이 두 손으로 상소문을 받아 들고 나갔다. 그리고 다른 상소를 읽으려는데 상선이 급히 들었다.
“전하, 전라도로 순찰을 보냈던 어사가 환궁했사옵니다.”
“그래? 지체 말고 들이도록 해라.”
순찰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시현은 환복할 새도 없이 곧장 입궐했다.
변변치 못한 복장으로 대전에 든 시현은 큰절을 올리고, 기록한 서책을 곧장 상선에게 위임하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구나.”
“예,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생각하여 서둘러 환궁했사옵니다.”
“행색을 보아 고생이 장하였다. 상선은 가서 어사의 목을 축일 만한 것을 내오도록 해라.”
“예, 전하.”
그리 말을 남기고, 강은 곧장 서책을 펼쳤다. 모든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으니 눈앞에서 광경을 보는 듯했다.
장수를 넘길 때마다 강의 용안에 고통이 서렸다. 시현은 힐끔 고개를 들어 용안을 살피고 고개를 숙였다.
“이다지도 심각한 지경이란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시골로 들어갈수록 처지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지경이었사옵니다.”
“말해 보라.”
“먹을 것이 떨어져 먹은 것이 없는 어미는 젖이 말라 젖동냥을 하러 다니고,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땅은 불타는 듯 갈라지고, 곡식은 죄다 말라비틀어져 황무지가 따로 없었사옵니다. 또한 살기 위해 살던 고향을 버리고 떠난 탓에 폐허처럼 비어 버린 마을도 있었사옵니다.”
이것이 지방 관료들이 숨긴 명명한 민낯이었다. 강이 읽던 서책을 덮었다. 곧 제조상궁이 소박하게 상을 차려 가지고 왔다.
“들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강이 손을 들어 허락을 하자 시현은 마다하지 않고, 식혜가 든 사발을 들어서 단숨에 비워 내려놓았다.
“어사가 기록한 것을 과인이 읽어 본 연후에 다시 부를 것이니 오늘은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예,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그리하라.”
참상을 전해 들은 강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가 보라 했다. 이에 시현이 조용히 일어나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때 드르륵,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
열린 문 사이로, 그토록 염원하고 갈증하던 여인이 서 있었다.
‘도아야.’
마른 음성으로 치달아 불렀다. 덩달아 맞은편에 서 있던 도아도, 이 상황에 적잖게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