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화 동심결, 평생의 정인
기운이 범상치 않은 초가에서 앳된 소녀가 사발에 깨끗한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신당 아래에 무녀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 어제부터 한 끼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물이라도 좀 드세요.”
“고맙구나.”
이 무녀는 오래전 후궁 간택에서 도아의 사주를 읽었던 무녀였다. 앞에 있는 앳된 소녀는 신딸이었다.
“오늘 손님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 손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속된 기운을 지녔으니 신당이 더럽혀지지 않게 정화를 해야겠지.”
“대체 어떤 자들입니까?”
“대궐에서 올 것이다.”
그리 말을 하고, 무녀는 다시 단단히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읊조렸다.
“아가.”
“예, 어머니.”
“너는 사람의 사주가 읽히지 않는다면 왜일 것 같으냐?”
“사주가 읽히지 않는 사람이요?”
“그래, 무어라 생각하겠느냐.”
무녀의 신딸은 제대로 된 신을 모시는 아이였다. 그랬기에 단 한 번도 사주를 읽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명줄이 다한 사람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영물이 아닐는지요.”
“영물?”
신당을 밝히던 촛불이 바람 없이 잔잔함에 흔들렸다.
“예, 사람의 지혜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물만이 사주가 읽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물이라…….”
“아직 수련이 부족하여 어머니가 만족하실 만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아니니라. 어쩌면,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사주에서 나던 빛, 그것은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가득 지니고 있었다.
“손님이 왔으니 나가 보거라.”
“예, 어머니.”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는데 무녀는 대뜸 손님이 왔다고 했다. 이에 신딸은 뜻을 읽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마루로 나오자 마당 안으로 한 여인과 사내가 나란히 들어왔다.
“대궐에서 나오셨습니까?”
“그, 그것을 어찌…….”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시지요.”
“용하다더니, 말 꺼내기가 무섭구나.”
청아의 명으로 무녀를 찾아온 연 상궁은 신딸의 신기에 할 말을 잃었다. 신딸이 문을 열어주자 연 상궁이 들어갔다.
“숙의마마께서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시네.”
“쇤네는 대비마마의 명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연 상궁은 잠시 미적거리다가 반드시 데려오라는 청아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저무는 대로 입궐할 테니 준비하시게.”
“예, 그러십시오.”
무녀는 반항하거나 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 * *
퇴청을 앞둔 도총관이 사람들 눈을 피해서 조용히 나은의 처소에 숨어들었다.
‘원 죄인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얼마 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지라 나은을 만나러 오는 길이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더는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마, 마마!”
“아버지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자칫 대궐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다면 그 불명예를 어찌 씻을 수 있었습니까?”
처소를 찾아온 도총관에게 나은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청아와 손을 잡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숙의마마, 어찌 이리도 나약하십니까?”
“……이대로,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대궐에 발을 들이신 이상 그리 지내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 더는 남을 음해하는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로 충격이 컸던 나은인지라 쉬이 도총관의 뜻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마마, 숙의마마.”
“예, 아버지.”
“마마의 어깨 위에 우리 가문이 달려 있음을 모르시옵니까?”
“…….”
“진정 모르시어 이러시옵니까?”
그 말에 결국 나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굵게 흘러내렸다. 가련하고 처연하게 흐르는 눈물이 아기 새처럼 떨고 있었다.
“너무 두렵습니다. 귀인마마를 음해하고,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발각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저 때문에 귀인마마가 잘못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처럼 숨을 헐떡이는 나은을 바라보며 아버지인 도총관은 인간 같지도 않게 일말의 애정도 보이질 않았다.
‘쯧쯧……. 저러니 대비께서 대제학의 여식을 점찍었지. 저리 심약해서 원!’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한심스럽게 나은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양딸이라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숙의마마의 노고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히끅…….”
“허나 이미 한 배를 타기로 약조를 했으니 이대로 대제학을 저버린다면 이 아비는 대의를 어겼다 하여 배신자라는 낙오가 찍힐 것입니다.”
이번에는 도총관이 한탄을 하며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여 버리자 펑펑 울던 나은이 눈물을 멈추었다.
“이 자리도 겨우 버티고 있는 처지에 그리 낙오가 된다면 앞날은 불 보듯 뻔합니다.”
“아버지…….”
“마마께서 정 힘드시다면 이 아비가 물러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무, 물러나시다니요?”
“대제학이 아비를 이 자리에 그대로 두겠습니까?”
멈췄던 눈물이 어느새 다시 두 뺨을 적셨다. 도총관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자였다.
“하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마?”
“예…….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물러나시겠다는 말씀은 거두세요.”
원하는 대로 됐다. 말은 마친 나은은 손등으로 눈물을 거두고, 앞에 놓인 차게 식은 차를 입에 넣었다.
* * *
노란색 저고리를 받쳐 입은 도아의 얼굴에 그리움이 너울거렸다. 턱을 괴고, 달이 보이는 창밖을 내다보는 눈이 한 사람을 그렸다.
깊은 밤이 되어 무이는 그만 자리에 들라 권했지만, 그 없이 혼자 자리에 들려니 허전하여 누워지질 않았다.
‘정무에 시달리시니 오늘은 아니 오시려나.’
그리운 이를 그리는 마음이 전전반측이니, 마음의 깊이를 보여 주었다.
“귀인.”
“어?”
기다리던 목소리에 부름을 듣자마자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대가 기다릴 것 같아서.”
“용안이 어두우십니다.”
강의 얼굴에 서린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 시간까지 상소를 읽고, 신료들을 독대하고 오는 길이었다.
안쓰럽게 그를 보고 있자니 강은 애써 웃으며 그림자를 거두려 했다.
“궐 밖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이 모든 게 과인이 무능한 탓이오.”
“어찌 그런, 아닙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최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오. 그에 따른 결과가 이 모양이니 백성들을 볼 낯이 없소.”
그의 미소가 아프게만 느껴졌다. 도아는 위로를 해 주기 위해 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강을 안아 주었다.
넓은 그의 등을 쓸어 주며 말을 아끼며 해 줄 수 있는 위로를 해 주었다.
“이렇듯 백성을 사랑하는 전하이십니다.”
“…….”
“자책하여 상처 주지 마세요. 이미 너무 많이…… 상심하고 계십니다.”
그 마음을 느끼고 들을 수 있는 도아였기에 강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무릎을 베고 누우세요.”
“좋은 생각이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강은 도아의 무릎을 베고, 자리에 누웠다.
“잘될 것입니다.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
“그러니 조급해 마세요.”
다정한 말에 강은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한 손은 도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참 좋은 것이었군.”
“전하께 집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언제든 돌아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항상 그 자리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혼자라 생각지 마세요.”
구중궁궐, 항상 도망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마음 하나 내려 둘 수 없이 불안하고, 낯선 공간이었다.
평생을 살고도 정을 붙이지 못한 곳에 이제는 집이라 생각할 곳이 생겼다. 그게 그를 몹시울컥하게 만들었다.
강은 말없이 도아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눈물 맺힌 눈을 감았다. 책을 읽어 주듯 잔잔한 목소리에 강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렇게 도아는 한참 동안 강의 머리와 등을 쓸어 주며 재워 주었다.
* * *
스산한 기운을 품은 무녀가 어둠을 틈타 대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연 상궁을 따라 청아의 처소로 향했다.
그림자를 드리운 채 촛불에 의지해 앉아 있던 청아를 향해 무녀가 큰절을 올리고 앉았다.
“자네가 대궐의 일을 맡아 한다는 무녀가 맞는가?”
“예, 쇤네이옵니다.”
“내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어 보자고 했네.”
“하문하시옵소서.”
무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청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치 그 속을 보기라도 하듯 꿰뚫어 보았다.
“자네가 귀인마마의 처녀 단자를 보고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들었네.”
“그랬습니다.”
“그 연유가 무엇인가.”
그 의미에 대해 묻자 무녀는 입을 닫은 채 청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청아는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사람을 왜 저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피하면 기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연유가, 귀인마마의 사주에 국모의 기운이 있어서였나?”
“국모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지요. 임금은 해, 그 곁을 지키는 국모는 달, 그러니 하늘이 날 때부터 그릇을 달리 지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말이 맞는다는 것인가?”
“송구하오나, 잘못 짚으셨습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이에 청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으나 무녀의 답은 같았다.
“단지 쇤네가 머뭇거린 것은, 귀인마마가 지닌 사주가 고귀하여 그랬을 뿐입니다.”
“고귀하여 그랬다? 그 말을 믿으란 것인가?”
“쇤네가 달리 얼굴도 뵙지 못한 귀인마마를 위해 거짓을 고할 연유가 없사옵니다.”
“흠…….”
“숙의마마는 쇤네에게 진실을 듣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쇤네는 진실을 아뢰었을 따름이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녀는 끝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도아의 사주에 얽힌 비밀을 묵고했다.
“내 자네의 말을 믿어 볼 것이네.”
“예, 하오시면 밤이 깊었으니 쇤네는 이만 물러가옵니다.”
“살펴 가시게.”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무녀가 장옷을 챙겨 걸음을 떼려다가 멈추었다.
“숙의마마.”
“할 말이라도 있는가?”
“숙의마마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고명한 사주를 품고 나셨습니다.”
조금 전, 청아를 기분 나쁘게 하던 그 눈빛이 또 나왔다. 청아는 숨을 멈추고, 무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섭리를 어기지 않으신다면 날 때 품고 난 것을 평생 지니고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섭리를 어기지 마라?”
“간곡히 청하옵건대, 섭리를 거스르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친 무녀는 정중히 예의를 갖춘 후 장옷을 뒤집어쓴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섭리를 거스르지 마라?”
그 의미를 곱씹어 보던 청아는 이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