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화 동심결, 평생의 정인
본격적으로 암행을 위한 순찰에 나선 시현은 자신이 맡은 지역으로 들어선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한양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시끌벅적해야 하는 장터는 쥐 죽은 듯 고요했으며 농작물을 파는 아낙들도 보이지 않았다.
“장은 안 서는 모양이오?”
“내다 팔 것이 있어야 장도 서는 것이지. 하늘이 꽉 막혀서 나물이며 뭐며 다 말라죽은 지 오래됐소.”
그러했다. 간간이 비가 내리던 한양과 달리 아래쪽은 가뭄이 시작된 지 좀 더 된 듯했다.
바다에서 노인에게 들었던 말에 정신이 팔려 있던 시현이 정신을 바짝 차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더 안쪽으로 시골길에 접어들자 한창 익어 가고 있어야 할 논과 작물들은 이미 말라 죽어 있었다.
흙들은 물기 없이 쩍쩍 갈라져 어떤 생명도 자라나지 않을 것처럼 죽은 듯 보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혀를 끌끌 차던 시현은 붓과 서책을 꺼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듣고, 본 것을 일목요연하게 써 내려갔다.
여기까지 오면서 다행이라 여긴 것은 굶어 죽은 시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기근에 접어들었다면 길가에 치이는 것이 굶어 죽은 시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직전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이 정도만 해 두자.”
서책과 붓을 잘 정리해서 다시 보따리를 싸서 짊어졌다. 한숨을 돌리자 다시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호수에 인어가 있었다는 말인데…….”
300년 전, 도진의 가문은 인어 사냥으로 재물을 늘려 양반이 되었다고 했다. 인어를 잡던 가문이니 인어와 밀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냥한 인어를 그 호수에 가두었나?”
그렇게 생각해야 말의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렇지 않고는 도아의 별당에서 인어 비늘이 나올 수가 없었다.
“바다를 유난히 좋아한다고 했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네.”
문득 비늘이 도아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거두었다.
“우선은 서둘러 한양으로 돌아가자.”
낡은 도포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 시현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 *
낙엽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은하는 조용히 붓을 집어 들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종이 위에 검은색 먹이 떨어졌다.
그 길을 따라 선을 그리자 개울이 흐르는 강과 바위, 꽃들이 그려지며 한데 어우러졌다.
“마마께서는 어찌 같은 그림만 그리시옵니까?”
“…….”
“송구하옵니다.”
“그리워서.”
그림을 지켜보던 김 상궁의 물음에 은하는 그리 답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입궐한 날부터 지금까지 은하는 줄곧 같은 풍경만 그려 왔다. 간혹 계절의 흐름이 보일 뿐 장소가 바뀌진 않았다.
“대궐에 발이 묶인 처지라, 그리움에 그저 그려 보기라도 하는 것일세.”
“망극하옵니다.”
“간다 한들 이제는 지고 없는 것을 내 알고 있지.”
은하는 손을 뻗어서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 자리는 늘 인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이곳은 두 사람이 어른들 눈을 피해 몰래 만나던 장소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꽃이 피었으며 가을에는 붉은 잎이 날리는 명소였다.
바위에 다정스레 앉아 혼인을 하더라도 오순도순 손을 맞잡고, 이곳에 오겠노라 굳은 약조를 했었다.
‘좋은 아내를 얻으시어 가정을 꾸리셔야 할 텐데 걱정을 하다가도, 당신의 기억 속에서 잊힐까 걱정이 됩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저로 인해 오래 아파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내 그림을 반으로 접어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그리움이 오래가면 마음에 병이 들고, 구설만 만들 뿐이었다.
“소인이 듣기로, 전하께서 매일 밤 귀인의 처소를 찾으신다고 하옵니다.”
“오직 이 사람이 걱정할 것은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이지 투기가 아닐세.”
“마, 마…… 망극하옵니다. 소인이 입을 함부로 놀렸사옵니다.”
김 상궁이 놀라 바닥에 엎드려 빌자 은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자네는 내 측근일세.”
“…….”
“그런 사람이, 입을 가볍게 놀려서야 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자네의 말이 새어 나간다면, 모르는 이들은 내 자칫 투기를 한다고 여길 것일세.”
다소 낮아진 목소리에는 엄격함이 깃들어 있었다. 은하는 매서운 눈초리로 김 상궁을 훑어보았다.
“행여 중궁전에서 귀인을 음해하는 말을 꺼낸다면, 자네가 나서야 할 것일세. 알겠는가.”
“예,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잊지 말고, 명심하도록 하게.”
충성이 가득한 김 상궁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하는 작은 분란의 불씨라 할지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남은 여생을 그저 조용히, 물처럼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사과 사건 이후로 나은은 활발했던 성품을 찾아볼 수 없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바뀌었다.
매일같이 청아의 처소에서 지내던 나은이 처소 밖으로 잘 나오지 않자 오늘은 청아가 무언가를 잔뜩 들고 찾아왔다.
“이게 다 뭡니까?”
“안 숙의도 곧 전하와 합방일이 아닙니까. 소박하게 준비를 한다고 한 것인데 모아 놓고 보니 이리 많아졌습니다.”
“이 귀한 것을…….”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노리개며 뒤꽂이 등의 장신구들이었다. 하나만 몸에 달아도 화사해질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안 숙의와 내게는 합방일이 아니면 전하의 용안을 뵐 수 없으니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단단히 잡아야지요.”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이리 주시니 미안해서요.”
“그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자매처럼 지내기로 했으니 응당 줄 수 있습니다.”
목욕할 때 쓸 향료와 머릿기름 등은 모두 청아가 아껴서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고맙습니다. 내 사양하지 않고,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니 되레 고맙습니다. 그 후로 안 숙의와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마음이 여간 좋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숙하려 조용히 지냈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네, 그렇다니 되었습니다.”
활짝 웃던 청아는 보석이 덕지덕지 박힌 노리개를 들어서 나은의 옷고름 앞에 가져다 대 주었다.
‘나를 소박 놓은 전하께서, 안 숙의라고 품에 안으실 리 없지.’
처음부터 나은이 어찌 될지 그 처지를 알면서도 이 패물들을 챙겨 온 것이었다. 기대감이 크면 좌절은 그 곱절일 테니까.
“안 숙의는 귀인마마에 대해 들은 것이 없습니까?”
“들은 것이라니요?”
“귀인마마에 대한 소문 말입니다.”
“설마 아직도 귀인마마를 해할 생각이십니까?”
“놀라시기는, 걱정 마세요.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들출 겁니다.”
손에 잡고 있던 패물들이 스륵,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청아는 바닥에 놓인 패물을 집어다가 함에 넣었다.
“수상한 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잘만 알아보면 전과 같은 실수는 없을 겁니다.”
“다시 발각되면 우리 두 사람, 궐에서 쫓겨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안 숙의나 나나 이대로 후사를 잇지 못하면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합니다. 전하께서 후사를 얻지 못하시면 몇 해가 지나기도 전에 대비께서는 또 다른 후궁을 들이시겠지요. 그리되면 일이 더 어려워질 겁니다, 안 숙의.”
두 사람이 목소리를 죽여 가며 대화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은의 민 상궁이 목소리를 냈다.
“대전 나인에게 들은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자네가 낄 자리가 아닐세.”
“아닙니다, 안 숙의. 어디 무슨 말인지 들어나 봅시다.”
나은이 입을 막으려 했지만 민 상궁은 이 길이, 자신의 웃전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 자신이 출세할 수 있으니까.
“대비마마는 궐 밖에 있는 무녀를 부르시어 후궁 간택에 참여한 규수들의 처녀 단자를 읽어 보게 하셨사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규수들의 처녀 단자를 줄줄이 읊던 무녀가, 유독 귀인마마의 것은 쉬이 읽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이 얘기는 밖으로 새어 나간 적 없는 얘기였다. 처소나인의 입에서 말이 돌고 돌아 나돈 모양이었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 넘겼으나 지금 귀인마마가 전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계시니 말들이 나돈다고 하옵니다.”
“무슨 말이 나돈다고 하더냐?”
“혹 귀인마마의 사주에 국모가 될 기운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나은과 청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쩌면 그래서 무녀가 망설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녀를 찾아야겠습니다.”
“찾아서 어쩌시게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물어봐야겠습니다.”
“그렇다 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후궁이 중전 자리를 넘보는 하극상입니다. 달리 말하면 반역이 될 수 있지요.”
무서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청아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은도 놀라 손을 떠는 와중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궐의 대소사를 봐 주는 무녀이니 수소문이 어렵진 않겠습니다.”
“…….”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준비 잘하도록 하세요, 안 숙의.”
말을 마친 청아는 부리나케 처소를 빠져나갔다. 나은은 쓸데없는 말을 한 민 상궁을 매섭게 쳐다봤다.
* * *
패물함을 잔뜩 들고, 교태전을 찾은 도아는 뿌듯한 얼굴로 가져온 것을 모두 은하에게 내밀었다.
“뇌물인가?”
“그렇다고 하면 받아 주시옵니까?”
“음, 회초리를 들겠지?”
“예, 그래서 뇌물은 아니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김 상궁이 세 개의 패물함 중 하나를 은하의 서안 위로 올려 주었다.
은하는 다소곳이 내려 둔 한 손을 올려서 패물함 뚜껑을 열어 보았다. 자개로 꾸며진 함이 무색할 만큼 안에는 수많은 진주가 들어 있었다.
“이 많은 진주가 다 어디에서 났는가?”
“실은 소첩이 진주 보석을 좋아하는지라 입궐할 때 친정에서 가져온 것이옵니다.”
“이 많은 진주를 모두 친정에서 가져왔다는 것인가?”
“예, 유약했던 어린 시절을 무기 삼아 부친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이어서 김 상궁이 나머지 두 함을 열자 그 안에는 보석과 비녀, 은자가 들어 있었다.
“자네 친정이 부유하다는 것은 내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망극하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모두 가져다준 연유가 무엇인가?”
“소문으로 들으니 중전마마께서 백성들의 구휼미를 모으고 계신다고 들었사옵니다.”
“소문이 거기까지 흘러간 모양이군.”
“소박하나마 마마께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사옵니다.”
이는 은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은하는 고맙다는 인사로 패물함을 모두 거둬들였다.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게 말일세. 전하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신료들을 부르시어 방책을 논의하신다고 들었네. 허나, 비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인력, 그 말에 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하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전하께서도 심각성을 아시고, 기우제를 논하셨다니 곧 소식이 있을 테지.”
“전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럴 것이네. 아마 한번 시작하시면 비가 올 때까지 몇 번이고 하셔야 할 것일세.”
왕이 직접 주관하는 기우제는 지난 왕조에서 숱하게 있었다. 가뭄은 곧 왕을 향한 질책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을 두고 용신께서 노하시어 그렇다니, 가뭄이 길어질수록 전하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이 빗발칠 것일세.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그러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그 전에 비가 와야 할 것인데 큰일이네.”
“머지않아 비가 올 것이옵니다. 꼭 그리될 것이옵니다.”
“자네 말대로 된다면 더 걱정할 것이 없겠지.”
처소를 돌아서 나오는 길은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강은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신하들에게 근신하라 명했다고 한다.
은하의 말대로 강이 몇 번의 기우제를 지내고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성은 한 곳을 향할 것이다.
교태전을 벗어난 도아는 한참을 걷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치 바다와 같구나.’
오늘도 비가 올 기미는 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
‘비요? 하늘에서 내리는 그 비요?
-단, 이 능력을 사용하면 네 생명에 지장이 갈 만큼 큰 여파를 몰고 올 수 있으니 그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잘못 사용하면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그러니 신중을 기해 사용하도록 해라.
생각을 마친 도아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