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화 동심결, 평생의 정인
부부가 나란히 문안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단란했다. 붉은 용포에 녹색 당의가 잘 어우러졌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은하는 연신 웃음을 거둘 줄 모르는 강의 용안을 살피며 따라 웃었다.
“며칠 동안 전하의 용안에 그림자가 드리워 신첩이 걱정을 했사옵니다.”
“아……. 그랬소?”
“예, 그런데 오늘 뵈오니 그 걱정이 괜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나이다.”
지난밤이 도아와 합방일이었음을 알기에 은하의 말에 강의 얼굴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걷겠소?”
“예, 그러시옵소서.”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후원을 거닐었다. 저만치 뒤따르는 이들을 물리고, 오로지 두 사람만이 걷는 길이었다.
“신첩이 귀인에게 전하와의 사이에 연심은 없노라 말했사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강이 걸음을 멈추고, 은하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표면상으로는 전하와 신첩의 사이가 좋은지라 귀인이 망설이는 듯 보였사옵니다. 그대로 두면 전하께 가는 걸음을 머뭇거릴 듯하여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중전을 위한 생각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 그랬소.”
“귀인은 고운 사람입니다. 의리로 다져진 우리 부부 사이의 일로, 마음의 죄책감을 주고 싶진 않았사옵니다.”
이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강은 미안한 듯 어설프게 웃다가 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과인이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소.”
“전하께서는 이미 신첩의 큰 허물을 덮어 주셨사옵니다. 그것에 비하면 이는 보잘것없지요.”
“그렇지 않소. 고맙소, 중전.”
“망극하옵니다, 전하.”
서로를 향한 마음을 표현한 부부는 멈췄던 걸음을 함께 앞으로 내디뎠다.
“귀인과는 신첩의 짐작이 맞는 것이지요?”
“어리석음으로 그르칠 뻔했으나, 그리되었소.”
“큭, 귀인의 성정이 여간 대쪽이 아닐진대 전하께서 고생하셨을 것이옵니다.”
“내 평생 그리 빌어 본 적이 없었소.”
간밤의 일이 그려지니 은하는 믿기지 않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에 강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귀하게 얻은 마음, 귀하게 여기시어 오래도록 보듬어 주옵소서.”
“필히 그러리다. 고맙소.”
언젠가 은하가 바랐던 일이었다. 현숙한 규수를 곁에 얻으면 그 여인에게만은 마음을 주셨으면 하고 소망했다.
그게 본인이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애당초 줄 마음이 없으니 서로 애달파지기만 할 뿐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평생의 첫정, 그리고 마지막이 될 정이었다. 은하에게는 여전히 혼인을 약조했던 정혼자만이 가슴에 그득하였다.
* * *
지방 별저로 내려온 도화군은 가는 내내 말라 버린 땅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참혹한 광경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양에서는 눈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시골 곳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 동냥을 하는 이들도 숱하게 보였다.
가득 찬 곡식 창고를 쳐다보던 도화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눌 길이 없구나.’
이 곡식을 무턱대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었다간 이들이 도화군을 칭송하며 강을 깎아내릴 수도 있었다.
소문이 물살을 타 퍼지기라도 한다면 이는 반역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 도화군이었다.
“믿을 만한 상인을 부리시어 그들의 이름으로 곡식을 베푸시지요.”
뒤에서 들리는 군부인의 소리에 도화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상인의 입단속만 잘하신다면 별 탈 없이,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으실 겁니다.”
“부인.”
“굶주린 백성들 걱정에, 끼니를 거르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공연히 부인에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다가온 군부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도화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마음만큼 따듯한 손이었다.
“내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는데 고맙습니다.”
“그러니 이제 걱정 내려놓으시고, 끼니는 거르지 마십쇼.”
“그리하겠습니다, 부인.”
군부인의 손을 꼭 잡은 채 발길을 돌린 도화군은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별저의 후원을 거닐었다.
“형님께 서찰을 보낼까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아주버님을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서둘러야겠습니다.”
“예, 안부도 몇 자 적어 보내신다면 아주버님의 서운한 마음이 한결 풀리실 것입니다.”
안 그래도 강에게 인사 한 줄 건네지 못하고, 도망치듯 별저로 내려온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군부인의 말에 도화군은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별저에 눈이 내리면 경치가 아름다울 것 같아 항시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랬습니까? 진작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랬으면 눈길을 밟아 왔을 것인데.”
“우리 선이와 함께 오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허면 별저에서 선이가 첫눈을 보겠습니다.”
한양을 떠나자 두 사람의 마음은 전과 달리 한결 가벼워졌다. 한양의 대저택은 호화로웠지만 대비 조 씨의 감시 속에 사는 것 같았다.
한가로운 때를 맞이한 부부는 손을 잡은 채 뜰을 거닐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음률처럼 들렸다.
* * *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교태전에서 문안을 거두었다. 덕분에 밤을 꼴딱 새운 도아는 오래도록 이불 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뒤늦게 일어나 소세를 하고, 무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머리가 말끔하게 올라가고, 당의를 입고 그 위로 동심결 노리개를 달았다.
“참으로 곱기도 하지.”
노리개가 떨어지지 않게 잘 달아 준 무이가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마마.”
“응, 왜?”
“음……. 소인이 자리를 정리하면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뭐가 안 보여?”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얼굴을 붉혀? 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리개를 손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꽃잠 말이옵니다.”
“응?”
그리고 곧 무이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꽃잠, 혼인한 부부가 처음 갖는 잠자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설마! 설마…….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따지자면 또 아무 일도 없었지.”
“귀인마마!”
“귀청 떨어지겠네.”
두 사람이 밤새 아무 일도 없이 엎치락뒤치락했다는 소식에 무이는 얼굴색이 하얘졌다.
“전하께서 밤새 마마를 안고만 계셨다는 것이옵니까?”
“이르자면, 입술도…….”
“마마, 귀인마마.”
“한 번만 불러도 된다.”
“전하께서는 혈기왕성한 사내시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밤새, 괴롭히셨단 말이십니까?”
무이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내 만족할 줄 모르고 달려들던 강이 떠올라 시무룩해졌다.
“마마의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옵니다. 그렇다 하여 전하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수는 없으시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세상에……. 전하께서 참으로 마마를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 성교육을 확실하게 받은 무이였기에, 강의 인내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반면 입궐하여 노 상궁에게 남녀 간의 교합에 대해서만 얕게 배운 도아에게는 이런 지식이 전혀 깔려 있지 않았다.
“마마 목욕물 받는 것도 이젠 눈치를 봐야 할 지경입니다.”
“대궐에 물이 마르기라도 한 것이야? 어찌 그런 것을 눈치 봐야 해?”
“궐 밖에 가뭄이 들어서 난리도 아니라 합니다.”
“가뭄? 그러고 보니 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가만히 듣다 보니 비가 온다며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도아가 입궐한 뒤에는 이슬비도 마주치질 못했다.
“가뭄이구나.”
“예, 그래서 요즘 궁녀들에게도 물이 귀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당분간 남들의 곱절이나 되는 목욕통에 물을 반만 채우기로 했다.
* * *
조회에서도 가뭄에 대한 이야기로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이야기는 끝맺음을 맺지 못한 채 대전으로 이어졌다.
가뭄은 어느 왕조에나 있었던 흔한 재해였다. 그러나 흔한 재해라는 말이 무색하게, 가뭄은 역병과도 같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백성과 땅을 말려 죽이는 역병, 특히 가을에 찾아오는 가뭄은 겨울에 먹어야 할 곡식을 짓밟아 놓았다.
“예조에서는 각 지방으로 천신과 산천 기우제를 올릴 수 있도록 챙기도록 하라.”
“예, 전하.”
“또한 달리 어명이 있기 전에는 되도록 살생을 금할 것이며 죄인의 사형 집행도 당분간 금하도록 할 것이다.”
이는 비를 주관하는 하늘의 신, 용신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절박함에 왕조가 지켜 오던 일들이었다.
“또한 예조에서는 과인이 언제든지 기우제를 지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라.”
“명 받잡겠사옵니다, 전하.”
제사를 주관하는 예조는 가뭄이 들 때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가뭄은 곧 기우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다른 신료들은 가뭄으로 어려운 백성들의 구휼을 위해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소상히 적어 상소를 올리도록 하시오. 만일 차일피일 미루는 경들이 있거든 과인이 직접 독대하여 추궁할 것이오.”
모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휼에 대해 의견을 내놓고 있었으나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 품에 안은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행여나 구휼에 보탬이 되도록 내놓으라 할 것을 염려하여 땅속에 파묻는 자들도 생겨났다.
역병이든 가뭄이든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없이 사는 민가의 백성들이었다.
* * *
대궐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도아의 처소는 밤이 되면 죽은 듯 고요한 탓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잘 들리곤 했다.
고즈넉하게 밤을 보내고 있으니 정무를 마친 강이 처소에 들었다. 강은 애써 힘든 기색을 지우려 웃어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펼쳐 보시오.”
서안을 물린 강이 꺼내 든 것은 작은 족자였다. 도아는 머뭇거리다가 받아 든 것을 아래로 펼쳐 보았다.
그러자 족자 속에 가려져 있던 인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흩날리며 수려하게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과인이 직접 그린 것이오.”
“정말요?”
그 말에 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림과 강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궐로 돌아와 곧장 그린 것이오. 기억이 선명할 때 그려 두고 싶었소.”
“와…….”
“그러니 그림 속 여인은, 그대겠지.”
“그리되겠군요.”
그러면서도 도아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이었다.
“그대를 감히 무엇에 비할 수 있겠소.”
“…….”
“이리 아름다운데.”
그의 손이 도아의 흰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가까이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수줍음에 고개를 숙이자 강은 히죽 웃더니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낚아채 순식간에 제 무릎에 앉혀 놓았다.
“앗…….”
화들짝 놀란 도아가 그의 무릎에 앉아 두 손을 가슴에 댄 채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내가 말했었나.”
“무엇을요?”
“은애하오.”
가슴 시린 고백을 전한 그의 입술이, 도아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그는 도아의 등에 손을 대고,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잡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