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화 후궁이 된 인어
처음 입궐한 사람이라면 으레 대궐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혔다. 겹겹이 쌓인 장엄한 전각과 고요함이 주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시현은 대궐에 몸을 맡기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질 못했다. 그저 시현의 머리와 몸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도아뿐이었다.
깨끗하게 물을 먹인 푸른색 도포를 걸친 시현은 훤칠한 외모만큼 키도 높이 솟아 지나가는 궁녀들의 눈길을 잡았다.
대전으로 가는 길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경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서자 상선이 기다렸다는 듯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시오, 영상.”
대전으로 들자 강이 밝게 맞이해 주었다.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영의정을 따라 뒤이어 들어온 시현은 큰절을 올렸다.
“미욱한 소신의 자식 때문에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지시진 않을지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걱정 마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큰절을 올린 시현은 영의정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강은 날카로운 눈매로 시현을 관찰했다.
“자네는 과거에 뜻이 없었는가?”
“…….”
“부친이 나라에 큰일을 하니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해 과거에 뜻을 두고, 급제를 위해 누구보다 정진했어야 할 자네가,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묻는 것이네. 편히 답해도 좋네.”
언뜻 보기에도 시현의 용모는 준수하여 다른 사내에게 뒤지지 않았다. 무과의 장수처럼 벌어진 어깨와 솟은 키로 체격도 좋아 어디서든 주목을 받을 만했다.
“송구하오나, 소인은 평생 아버지에게 불효만 일삼았던 한심한 놈이었사옵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옆에서 듣고 있던 영의정이 민망하여 헛기침을 했으나 시현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월을 허송으로 허비하는 소인을, 기다려 주고 다시 보듬어 주시며 기회를 주신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한심하게 살았다는 소리군.”
“예, 집안 하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한심한 인생을 살았사옵니다.”
한 치의 숨김도 없이 시현은 자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지금도 그리 한심하게 살고 있는가?”
“소인을 두고, 모든 것이 달라진 채 떠나는 사람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이 자리에 혼자 남겠구나. 그 뒤로 새사람이 되고자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만약 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절대 소인을 대궐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진심에 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떠나는 사람은 한량으로 살던 시현을 끌어 올린 발단이 되었다.
“과거를 부끄러워할 줄 알고, 반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 솔직함이 과인은 좋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고개를 푹 숙인 시현이 인사를 올리자 강은 호탕하게 웃어 주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군. 다과를 내오도록 해라.”
“예, 전하.”
용기를 낸 시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강을 쳐다봤다. 과연 용상의 주인, 왕이었다. 용안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너의 반려, 지아비…….’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도아를 가졌고, 부부가 되어 합방을 치렀다.
시현은 순간 제 몸속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 *
그날 도총관이 가져온 첩보를 토대로 대제학은 은하의 고향에 사람을 풀어서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떠도는 생활을 한다고?”
“예, 1년에 한두 번 동네에 모습을 비추지만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 않으니 보는 이가 드물다고 했습니다.”
인겸에 대한 소식을 접한 대제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자를 내 편에 세울 수만 있다면 더없이 확실하게 중전을 찍어 낼 수 있을 텐데.”
“몇몇 동네 사람들은 돈으로 매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찌할까요?”
“전하의 신뢰를 깨려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증인들을 제대로 매수해서 준비시켜 놓아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명을 받은 이가 밖으로 나가자 대제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어 둔 창가 앞에 섰다. 쾌청한 날이었다.
“전하의 승은을 입었으니 기회만 잘 잡으면 회임은 문제없을 터.”
얼마 전 대비 조 씨의 명으로 후궁들의 합방일이 잡혔다. 이대로만 매달 승은을 입는다면 기회는 올 것이 분명했다.
“회임이 관건이군.”
청아는 입궐을 앞두고 의원에게 진맥을 받았었다. 회임에 문제가 없는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의원은 청아의 몸이 따듯하여 회임에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사내의 손만 스쳐도 회임이 될 정도라 했다.
진실의 내막을 모르는 대제학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기대에 부풀고 있었다.
* * *
우두커니 앉아서 무이가 곁에서 바느질하는 것을 쳐다보던 도아는 눈앞에 강을 그렸다.
괜히 기대하게 만드는 눈빛과 말투에 도아의 마음에 다시금 파도가 밀려들었다.
“내의원 의녀이옵니다.”
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무이는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의녀와 함께 들었다.
“내의원에서 무슨 일로 날 찾았는가?”
“예, 오늘이 주상전하와 귀인마마의 합방일이라 내의원에서 탕약을 지어 왔사옵니다.”
“……합방?”
“예, 그러하옵니다.”
이리하여 무이가 의녀에게 전해 받은 탕약을 도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발에 담긴 검은 물이 출렁거렸다.
“회임을 위한 탕약이옵니다.”
“…….”
“송구하오나 식기 전에 드셔야 하옵니다, 귀인마마.”
탕약을 앞에 놓고, 도아가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의녀가 재촉하였다.
“알겠네.”
이걸 마신다고 회임이 되는 건 아니니까. 도아는 사발을 들어서 탕약을 남김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의녀는 가고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아에게 잔뜩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그렇게 봐?”
“전하께 모질게 구셨는데 이런 때 합방이라니, 낙담하고 계시죠?”
“…….”
“그러게 왜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맞는 말이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무이는 혀를 끌끌 차면서 가까이 다가와 서안 앞에 앉았다.
“전하께서 혼란스러움에 빈말을 하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니 매일 밤 전하를 기다리시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전하를 밀어내지 마세요, 마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전하를 기다리지 않아.”
“지레 겁먹지 마시고, 전하께서 어찌하시는지 지켜본 연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평생을 함께했던 사이라 무이는 마치 도아의 몸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그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술술 읽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소인이 아니면 누가 우리 마마 마음을 알아주겠습니까?”
“피이…….”
“오늘 밤에 전하께서 건너오시거든 밀어내지 마시고, 그저 지켜보십시오. 네?”
“모…… 몰라.”
모르겠다며 고개를 돌린 도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이는 그 모습에 풉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같은 시간, 대전에서도 의녀가 다녀갔다. 탕약을 마시는 강의 얼굴이 마치 사약이라도 받는 사람 같았다.
‘출궁하고 싶습니다.’
이런 때 합방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날 보면 또 대궐을 나가고 싶다고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것이 강이 사약을 마시듯 탕약을 먹은 까닭이었다. 지금은 도아를 만나는 일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 * *
저녁상을 함께 받은 영의정과 시현은 오랜만에 부자간의 시간을 보냈다. 하인이 다과를 내놓고 사라지자 영의정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왕의 성지와 마패 그리고 허름한 옷 한 벌이었다. 잠시 얼빠진 채 바라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린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너를 어사로 특별 임명을 하셨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전국에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너도 들어서 알 것이다.”
“예, 얼핏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시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감이 왔다.
“다른 각 지역으로 어사들이 나갈 것이다. 너는 전라도로 내려가서 순찰하면 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가뭄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민낯으로 보고자 하신다. 하여 숨기기에 급박한 이들 뒤로 어사들을 파견하시는 것이다.”
시현은 이번 임무가 꽤 막중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첫인상에서 강에게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적되 너의 생각은 고집하여 적지 말거라.”
“예, 아버지.”
“궁핍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한 자도 빠짐없이 적도록 해라.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낱낱이 적어 와야 한다.”
“지방 현령에 대해서도 평판이 어떠한지 놓치지 않고 알아 오겠습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적을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임무에 대해 읊는 시현을 바라보던 영의정은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이 길로 짐을 꾸려서 떠나도록 해라.”
성지와 마패를 챙겨서 일어난 시현은 서둘러 자리를 나왔다. 가야 할 길이 멀었고, 할 일이 태산이었다.
별채로 돌아와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비단옷을 벗고 허름한 차림새로 갈아입었다.
“아!”
나서려던 길에 발목이 붙잡혔다. 그가 챙긴 것은 도아의 화원 호수에서 찾았던 ‘인어 비늘’이었다.
그것을 손아귀에 넣고 주먹을 꽉 쥔 시현이 다 됐다는 듯 미련 없이 별채를 빠져나갔다.
* * *
은은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붉은색 치마에 초록 저고리를 걸치고 앉아 머리를 빗질하여 말끔하게 올렸다.
굵은 머리 타래를 지탱하고 있는 매화 비녀가 어둠 속에 반짝였다. 무이는 혼신을 다하여 꾸민 듯 꾸미지 않게 도아를 꾸며 주었다.
“이제 전하께서 오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으응…….”
“매일 그렇지만 오늘 더 곱고, 어여쁘십니다.”
그리 말하며 무이는 생긋 웃어 주고, 단장에 쓰였던 도구들을 들고 나갔다.
경대를 펼쳐서 제 모습을 살피던 도아는 괜히 매화 비녀를 어루만지다가 서안의 서랍을 열어서 서신을 꺼냈다.
이것은 입궐 전 강에게 도장을 받았던 ‘후궁 조건서’였다. 세 번째 항목, 서로 동의 없이 합방을 할 수 없다는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을 느꼈다. 그런데 길시라 정해 준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밖에서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술상에 놓인 음식이 차갑게 식어 버린 지 오래였다. 자정이 넘자 무이가 울상으로 들어와 당사자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들리지 않았다.
“괜찮으니 나가 봐.”
그 말을 끝으로 서안에 기대어 있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일순간 따듯한 체온과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으음…….”
잠결에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뜨자 몸이 허공에 떠 있음을 알았다.
“조건서는 안에 넣어 두었소.”
“왜…… 왜…….”
“누가 보면 어쩌려고 꺼내 놓고 잠들었소?”
당황한 사이에 강은 도아를 금침 위에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그러자 도아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온돌에 납시지 않으시고…….”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소.”
“…….”
“오늘 아주 예쁘네.”
그는 진심을 모아서 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용히 처소에 들어온 강은 서안에 누워서 잠든 도아의 모습에 넋을 놓고 말았다.
몇 날 며칠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품에 안아 든 것이었다.
“오늘 꼭 주려고 했던 것이 늦어져서 덩달아 늦었소.”
“…….”
“많이 기다렸소?”
이에 도아는 눈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 저고리처럼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상했던 반응에 강은 픽, 하고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동심결로 만든 노리개요.”
바다를 품은 동심결은 단단히 여며진 채 잘 다듬어진 네모진 옥을 잡고 있었다.
“영원히 함께.”
“…….”
“내 평생을 건 정인에게 주는 것이오.”
아직 닳지 않은 촛불이 은은히 처소를 밝혔다. 도아는 노리개를 보다가 믿기지 않는 듯 강을 쳐다봤다.
평생의 정인이란 말에 도아의 심장이 터질 듯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