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37)화 (38/93)

제 37 화 후궁이 된 인어

큼지막한 목욕통에 물을 찰랑이게 받고, 그 위로 꽃잎을 흩뿌렸다. 무이는 침울한 도아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었다.

꽃잎을 띄운 물에 들어간 도아는 잔잔히 흔들리는 잎을 손에 쥐었다. 이내 물속 깊이 얼굴을 묻었다.

물속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가셨겠구나.’

오늘이 강과 청아의 합방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말아 쥐어 가슴으로 가져갔다. 손바닥을 펼치자 쥐고 있던 붉은 꽃잎이 퍼져 나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온 신경이 한 곳으로 향했다. 강이 청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를 향해 가까워져 갔다. 입술이 닿을 찰나 도아는 물살을 출렁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강이 대전에서 술기운에 자신의 입술을 훔쳐 갔던 일을 떠올리자 더욱 괴로워졌다. 

* * *

작은 처소를 잘도 꾸며 놓았다. 색색이 고운 색감을 따라서 청아가 연분홍색으로 물들인 소복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강이 조용히 혼자 술을 따라 마시자 머뭇거리던 청아가 손을 내밀었다.

“소첩이 따라 드리겠사옵니다.”

“됐소.”

단칼에 거절이었다. 민망해진 두 손이 황급히 치마폭 아래로 사라졌다.

“혼자가 편해서.”

“예…….”

“과인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오.”

그 말에 청아는 뜻을 가늠하지 못하고 강을 쳐다봤다.

“해서 무슨 일이든 의심부터 하고, 그 진위 여부를 따지려 들지.”

“그것이 소첩에게도 해당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예외는 아니오.”

“소첩의 무엇을, 의심하시옵니까?”

기분이 틀어진 청아가 경련이 날 것 같은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고, 물었다. 

“진정 몰라 묻소?”

“…….”

“숙의에 대한 과인의 의심이 풀릴 때까지 손끝 하나 건들지 않을 것이오.”

앞으로 숱한 합방일을 만들어도, 결코 옷고름 하나 건들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이 의심을 만든 것은 숙의, 그대요.”

“부디 소첩을 향한 전하의 의심이 속히 풀리기를 바라옵니다.”

“과인도 바라는 바요.”

“망극하옵니다.”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었다. 몸속에 솟구치는 화를 잠재울 길이 없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짓눌렀다. 

“술상을 물려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술상이 물러가고, 처소는 한층 더 조용해졌다. 이제는 적막감만 맴돈다는 말이 어울렸다.

“누우시오.”

말을 마친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어서 한쪽에 두고, 보료를 깔아 둔 곳으로 가 앉았다.

자리마저 함께 눕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청아는 말을 아낀 채 깔아 둔 금침 위로 건너가 누웠다. 안락한 잠자리가 더없이 불편하기만 했다.

‘전하께서 그리 아끼는 귀인이, 정조가 없는 계집이어도 마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건너편 보료에 앉아 팔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은 강이 청아를 응시했다. 이러고 있으니 도아와 보낸 첫날밤이 떠올랐다.

원삼을 깔고 그 위에 누운 채 잘도 잤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도 나오고, 가슴도 저려 왔다.

‘물거품이라…….’

결국 도아가 남긴 말을 생각하다가 보료 위에서 손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 * *

아침 문안을 들기 위해 교태전을 찾은 도아는 들어도 좋다는 윤허를 기다리며 앞에 서 있었다.

“일찍 오셨사옵니다, 귀인마마.”

“어서 오시게, 숙의.”

뒤이어 나은이 당도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한 쌍처럼 붙어 다니던 청아가 보이질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도아는 나은에게 안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빌미를 자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사하게 차려입은 청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볼이 봉숭앗빛으로 물들어 생기가 넘쳐 보였다.

“눈이 떠지질 않아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늦었사옵니다.”

“보기 좋네.”

물론 화사하게 치장한 모습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달리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마마의 안색이 좋지 않으시옵니다.”

“내가?”

청아의 말에 도아는 당의 속에 넣어 둔 손을 꺼내 뺨을 만져 보았다.

“예, 어디가 좋지 않으시옵니까?”

“그런 것은 없네. 내 안위까지 생각해 주니 고맙네.”

“아니옵니다, 행여 근심이라도 있으실까 염려되어 드린 말이옵니다.”

말이 길어질 찰나 교태전 김 상궁이 밖으로 나와 세 후궁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으로 듭시라 하시옵니다.”

“알겠네.”

말을 마친 도아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짹짹거리는 청아를 두고, 앞장서서 가 버렸다. 

* * *

지밀나인이 노비로 쫓겨나고, 대전에 배치된 궁녀들은 대거 물갈이가 되었다. 특히 지밀 쪽 나인은 오랫동안 강을 모셔 왔던 이들만 살아남았다.

오늘은 영의정이 대전에 들어 꽤 오랫동안 독대를 하고 있었다. 나날이 깊어 가는 가뭄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각 지역별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질 않고 있소.”

“자신들에게 해가 될까 피해를 숨기는 지역도 적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럴 것이오. 더 늦기 전에 암행을 보내 순찰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전하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확인하시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암행을 보내는 일은 인재를 골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어떤 이를 뽑느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과인에게 진정 영상의 자제를 안 보여 줄 것이오?”

“……예?”

“이럴 때 과인에게 힘이 될 인재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자식이나마 전하께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어찌 마다하겠나이까.”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시기를 살피고 있던 차에 좋은 때가 되었다. 

“좋소. 허면 당장 내일이라도 입궐토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영의정은 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이 기회로 한량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호수는 하늘을 품은 채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속에 도아도 깃들어 있었다.

반 시진을 넘도록 한 자리에 서서 멀거니 호수를 바라보던 도아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떠나고 싶어.’

궐에 처박혀 오로지 사내의 마음을 갈구하며 기다리는 이런 삶은 도아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 강이 다른 후궁의 처소에 들었다는 소식에 몸부림치던 것을 떠올리면 이대로 살 수는 없었다.

“……싶어.”

맴도는 말을 뱉지 못하고 주저했다. 

“또 어딜 가고 싶소?”

말소리에 일어나 뒤를 돌자 여지없이 강이 서 있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이오?”

“아니요.”

“그럼 안색이 어찌 이리 창백하단 말이오?”

“김 숙의와 같은 말을 하십니다.”

말에 뼈가 있었다. 강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랬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제 숙의와 일심동체이십니다.”

투기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어도 그런 것을. 강은 둔하여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슨 소리냐는 눈짓만 해 보였다.

“바쁘신 분을 오래 잡아 두었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물거품이 되겠다던 말, 변함없소?”

가려던 발길을 붙잡았다. 도아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싫다고 해도, 그럴 것이오?”

“…….”

“과인은 그대가 물거품이 되는 건 싫은데.”

또 뒤흔들어 놓았다. 지옥 불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던 도아는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과인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오?”

“…….”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당장 쫓아내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미웠다. 동굴에서 먼저 그렇게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듯 떠나간 사람이 누구인데 이제 와서 저렇게 말하는 게 미웠다. 

“저를…….”

“응?”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신 분은 전하이십니다.”

“아…….”

당장은 힘들다고 표현한 것인데 그게 도아에게 상처가 될 줄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도아를 배려하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출궁하고 싶습니다.”

듣고 있는 귀를 의심했다. 그 말이 믿기지 않아, 눈썹을 찌푸리며 도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그리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대궐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오?”

생각지 못한 말에 강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느 여인과 다르다는 것은 몸소 겪어서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예상치 못한 것이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

“후궁이 제 뜻대로 대궐을 박차고 나간다, 라. 하…….”

“전하께서도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 여자,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도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과인은 귀인이 떠나길 원한 적 없었소!”

“제 정체를 아시고는 줄곧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 전하께 제가 여인이긴 한가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시오!”

“출궁시켜 주신다면 더는 억지 부리지 않겠습니다.”

“단 한 번도 그대를 궐 밖으로 내보낸다고 생각한 적 없었소.”

“그럼 이제라도 생각해 주세요.”

“귀인!”

“어떤 방법이든 좋으니…….”

그 순간 강은 도아의 팔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 왔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뒤로 돌아섰다.

“그 입을, 막아야 조용히 할 것이오?”

입을 맞추겠다는 뜻에 도아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강은 그럴수록 제 품으로 더 끌어 와 안았다.

“이처럼 그대는, 달아날 수 없소.”

“…….”

“궐 밖으로 한 발자국도 용납하지 않아.”

“…….”

“헛된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삐끗하기만 해도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어오르자 도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서로가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기만 했다. 출궁을 운운하며 끝까지 저를 외면하는 도아를 바라보던 강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 * *

처소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던 은하는 기다리던 사람의 방문에 한달음에 문 앞으로 가 맞이했다.

“어머니.”

“마마.”

은하는 부부인의 손을 꼭 잡은 채 처소 안쪽으로 걸어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마마를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어머니가 그러실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찌하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못을 박아 놓은 터라 조용히 근신하고 있사옵니다.”

“그게 얼마나 갈지…….”

맞는 말이었다. 항상 기회만 노리는 부원군에게 조용히 근신하며 지내는 일은 어려웠다.

그렇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굳이 한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를 어려워하시니 곁에서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로 마마에게 심려를 끼쳐 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전하께서 베푸신 자비의 무게를 아셔야 할 겁니다.”

“예, 알다마다요. 잘 타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부원군을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떨구었다.

“궐 밖에서는 가뭄으로 많은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리 전해 들었사옵니다. 상황이 점점 힘들게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예……. 이런 때 중전의 사가에서 말이 나온다면 일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걱정 마시옵소서.”

“예, 어머니만 믿겠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감정이 좋지 않을진대 부원군은 좀처럼 마음을 다스리질 못했다.

“지내시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후궁마마들이 입궐하셨지만, 전하께서 마마를 아껴 주시는 듯하여 마음이 놓입니다.”

“예, 전하께서는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부부인은 손을 올려 은하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오직 이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 * *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것이 언제였는지를 잊은 듯 하늘은 맑고, 화창하기만 했다. 야속하였다.

그 하늘을 등진 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시현이 부친을 따라 입궐을 했다.

훤칠한 외모와 우뚝 솟은 키가 푸른 도포와 더불어 어우러졌다. 지나가는 궁녀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궐은 시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깊고, 크고 넓었다. 

입궐하던 날 가마에 오르던 도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제 네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대궐을 둘러보며 눈길이 닿는 곳마다 도아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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