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화 후궁이 된 인어
달을 등지고 선 도아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아직 인어 책자를 읽지 않은 강은 이 말의 의미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물거품, 조용히 따라 말하던 강을 바라보던 도아는 처소로 돌아가려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아직 회복하지 못한 종아리가 문제였다.
인어에게 생명인 다리를 다친지라 쉬이 회복이 되지 않았다. 상처가 깊어 애를 먹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버린 도아가 휘청이자 강은 한달음에 달려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아에게서 떨어졌다.
벌레를 만진 듯 서둘러 떨어지는 강을 쳐다보던 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실소를 터트렸다.
“치유가 되지 않은 것이오?”
“…….”
“아직 아픈 것이오?”
“…….”
“묻고 있잖소, 귀인.”
터져 버린 실소가 얼굴을 차지하였다. 도아는 가까스로 그것을 누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존재가, 전하께 악몽이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로, 다시금 도아의 가슴에 가시를 박았다.
“이깟 몸의 상처에 비하겠습니까.”
“아까부터 귀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소.”
“비단 말뿐이겠습니까.”
“어의에게 맥을 짚어 달라 합시다.”
도아는 웃었다. 이미 끈 떨어진 인연이었다. 강에게 도아는 가까이할 수 없는 께름칙한 존재가 되었다.
“쉬고 싶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내일이면 말끔해질 상처입니다. 아시질 않습니까?”
“…….”
“들어가겠습니다. 가세요, 전하.”
말을 마친 도아는 더는 자리에 있기 싫다는 듯 들어가 버렸다.
“실수한 것 같은데…….”
도아를 잡아 주던 손을 황급히 치운 것은 그 마음을 들킬 것 같은 알량한 마음에서 비롯된 짧은 행동이었다.
그 행동에 상처받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처소로 들어온 도아는 강이 잡았던 손을 꼭 쥐어 잡았다.
* * *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기 위한 대비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때가 되자 관상감과 은하를 나란히 불렀다.
뒤늦게 들어온 은하는 저만치 앉아 있는 관상감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중전.”
“예, 찾아계시옵니까. 어마마마.”
“오늘은 내 중전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이리 불렀습니다.”
은하가 대비 조 씨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대비는 관상감에게 계속하라 손짓했다.
“이번에 돌아오는 길일과 길시를 적은 것이옵니다.”
“틀림없는 것이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대비마마.”
“앞으로 매달 날을 받아서 가져오도록 해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길일을 받아 낸 대비는 흡족하게 웃으며 관상감을 내보냈다. 은하는 이 상황을 어리둥절하게 지켜보았다.
“내 앞으로 매달 주상과 후궁들의 합방일을 관상감에 청할 것입니다.”
“후궁들과의 합방은 전하께서 정하실 일인 줄로 아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허나, 주상께서 한 후궁만 지극히 총애하니 별수 없잖습니까?”
“그 또한 여러 후궁들을 거느린 궁중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옵니다.”
역시 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대비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물러설 기미가 없는 은하를 응시했다.
“이런 말은 내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중전.”
“예, 어마마마.”
“새로 들인 후궁들이 그저 주상께서 적적하시어 들인 것이었습니까?”
“……아니옵니다.”
후사 문제로 넘어가자 은하는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주상께서 혈기왕성하지만 여태껏 후사가 없다는 것은 큰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염려하여 후궁을 들인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옵니다.”
“그런 중에 주상께서 귀인만을 총애하시어 가까이하시니 내 지극히 염려가 됩니다.”
“…….”
“주상께서 꽃놀이를 하는 것도 중하지만 후사를 보는 것이 우선이니 내 이런 수를 꺼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중전께서 내키지 않더라도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조용히 할 말을 마친 대비가 은하의 눈치를 살폈다. 후사를 물고 늘어졌으니 여태 입덧 한번 없었던 중전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마마마의 명을 따르도록 하겠사옵니다.”
“호호홋, 고맙습니다. 중전.”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아닙니다, 이럴 때 중전께서 회임을 하시면 가장 좋겠지만 이젠 다른 후궁들이 있으니 그 짐을 덜어도 될 것입니다.”
한숨을 쉬며 은하를 감싸 주듯 말했지만 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말라는 대비의 뜻이 잔뜩 숨겨져 있었다.
* * *
바다에서 자객이 돌아온 이후 불안함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부원군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대감마님! 대궐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대궐에서?”
장 서방의 다급한 목소리에 부원군이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 보았다. 마당으로 나가자 이미 먼저 온 부부인이 서 있었다.
“손님이라니…….”
부원군이 중얼거리며 나가자 부부인이 몸을 비켜 주었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대궐에서 온 손님이 드러났다.
“헉……!”
“대감께서는 아시는 일입니까?”
“이…… 이게 무슨…….”
대궐에서 온 손님은 지밀나인이었다. 성치 못한 몰골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조용한 목소리에 부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 사람은 보는 눈을 피해 사랑채로 들어갔다
시종일관 바닥만 쳐다보던 지밀나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부부인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기함을 했다.
“전하께서 소인을 이 댁 노비로 하사하셨습니다.”
한쪽 뺨에 노비라는 낙인이 크게 찍혀 있었다. 살을 지지는 형벌을 당한 듯했다.
“전하께서 왜 자네를 우리에게 노비로 보내셨단 말인가?”
“부부인 마님은 자초지종을 모르시겠지만 소인은 대궐에서 지밀나인으로 있었습니다. 그런 소인에게 부원군께서 패물을 줄 테니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달라 하셨습니다.”
얼굴에 자자형을 당한 여인이 지밀나인이었단 사실과 부원군이 벌인 일을 알게 된 부부인은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옆에 앉아 있던 부원군을 쏘아보자 그는 어버버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께서 부원군에게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 저, 전하께서 말인가?”
“예, 부원군.”
“뭐, 뭐라고 하시던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연한 모습의 궁녀는 조용히 강에게 듣고 온 것을 전했다.
“이번 일은 반역이었소.”
“……!”
“그럼에도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모두 중전의 공인 줄 아시오.”
일의 내막을 모르는 부부인은 혼절 직전이었다. 그리고 부원군은 무릎을 꿇은 채 궁녀의 말을 전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두 번은 중전의 폐위로 본보기를 삼을 것이니 명심하시오.”
중전의 폐위란 소리에 섬뜩해졌다. 궁녀는 할 말을 마치고 소임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강은 장인이라 하여 높여 주던 말을 더는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하의 옥체는 무사하시더냐?”
“예, 그런 줄로 압니다.”
“무사하시다고?”
“예, 부원군대감.”
분명히 활을 맞았다고 했는데 무사하다니 다행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선은 나가 있도록 해라.”
부부인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뒤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반역을 꾀하셨습니까?”
“다, 당치 않소! 그런 것이 아니오, 부인.”
“지금부터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무슨 일을 어찌 꾸미셨는지 소첩에게 말씀하십쇼.”
“…….”
“만일 거짓이 있을 시 그길로 옷고름을 끊고 이 집에서 나갈 것입니다.”
이 기세라면 당장이라도 부부인은 이혼을 요구할 것 같았다. 부원군은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순간 교태전에서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경기를 일으켰다.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낙담한 듯 추락했다.
“괜찮으시오?”
“무모한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사옵니다.”
“가만히 있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소.”
부원군의 사저로 궁녀를 보내고, 강은 교태전으로 건너와 일의 전말을 말해 주었다.
“송구하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그러지 마시오. 내 누구보다 이 일이 중전과 연관이 없음을 알고 있소.”
“도망치고 싶어도 신첩의 아버지시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우리 사이에, 되었소.”
사색이 된 은하에게 강은 차를 권했다. 은하는 입 안이 소태처럼 써서 무엇도 넘길 수가 없었다.
“진실이 발각되면 중전이 후궁을 투기하여 벌인 일이라 말이 많아질 것이오.”
“……모두 신첩의 허물이옵니다.”
“과인은 그리되길 원치 않소. 하여 덮기로 했소.”
“전하!”
“두 번은 그러지 못할 것이오.”
그리 말하며 강은 자못 여유로운 미소를 띠면서 차를 마셨다.
“두 번 다시 소란을 피우면 그대를 폐위시키겠노라 못을 박았으니 한동안 조용할 것이오.”
“이대로 물러날 아버지가 아니옵니다.”
“눈엣가시인 후궁을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전하…….”
“됐소. 괜찮소.”
말을 마친 강은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말자며 선을 그었다. 은하는 처음으로 그를 볼 낯이 없었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듯하여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씀하시오.”
“대비마마께서 앞으로 후궁들에게도 길일을 택일하여 합방일을 잡아 주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
“꽤 급하셨던 모양이오.”
기분이 상한 듯 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선택이 뭘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오.”
“어찌하시겠습니까?”
“썩 내키진 않지만 어려울 것도 없지.”
“예?”
“그저 잠자리가 바뀌는 것뿐이오.”
어떤 의미도 부여되지 않는 그저 잠자리일 뿐이었다. 그의 말뜻을 알기에 은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거침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끝에 인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흔적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도아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강은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제조상궁이 들어와 야장의를 내놓았다. 오늘은 청아와 합방을 하는 날이었기에 처소를 옮겨야 했다.
야장의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앉았다. 가는 내내 강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오직 도아 한 사람이었다.
청아의 전각에 당도하여 처소 문을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강은 도아에게 향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세상 향기는 모조리 가져와 부어 놓은 듯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덕분에 생각에서 깨어난 강이 청아를 발견했다.
살결이 은은히 비추는 소복 차림을 하고, 머리를 올린 채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