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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33)화 (34/93)

제 33 화 어긋난 채 닿은 입술

말 위에 앉아 새벽 공기를 가르며 시원하게 질주했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로 거친 산길도 마다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달렸다.

도아는 비단결 같은 손으로 고삐를 능숙하게 그러쥔 채 유연하게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사내인 강이 봐도 놀라운 솜씨였다. 사내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솜씨에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좌상이 여식을, 사내대장부로 키웠군.’

그러는 사이 해가 솟아오르며 주변으로 환한 빛이 일었다. 몇 시진을 숨 가쁘게 달린 끝에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이 냄새, 이 소리. 모든 것이 도아를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도 더해졌다.

이윽고 두 눈에 바다가 담기자 도아는 그제야 달리던 말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바다 냄새를 삼켰다.

온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찰나였다.

‘내 몸이, 이토록 강렬하게 바다를 원하고 있었어.’

도아가 일렁이는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는 모습을, 뒤따라온 강은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러다 강의 눈도 어느새 바다를 좇고 있었다. 세자 시절 사고를 당하고, 처음으로 바다에 오는 것이었다.

인어……. 마르지 않는 갈증이 꿈속에서도 강을 바다에 묶어 두었다. 

* * *

자경전으로 문안차 건너온 은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청아가 언제 온 것인지 대비 조 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의아함을 지우고, 자리에 앉아 간단히 문안을 여쭈었다. 따듯한 차가 나올 때까지 청아는 종알종알 입을 다물지 않았다.

“주상께서 동이 트기도 전에 대궐을 나섰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예?”

“귀인도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어찌 감히 내명부의 여인이 함부로 궐을 나선단 말입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대비가 격분하여 찻잔을 내려놓아야 했다.

“송구하오나 귀인이 신첩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나이다.”

달그닥거리며 다구를 정리하던 청아는 손길을 멈추고 은하를 응시했다.

“중전께서 허락을 하셨단 말입니까?”

“예, 귀인이 허락을 구하기에 전하께서 함께 가신다는 말을 듣고, 허락을 해 주었사옵니다.”

“이 사람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중전 혼자서 결정을 내린 겁니까?”

“송구하옵니다.”

대비 조 씨는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 빌미로 도아를 잡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내명부의 소관은 신첩의 일인지라 독단적으로 그리했사옵니다. 어마마마께 미리 상의를 드리지 못한 것은 신첩의 불찰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구색을 갖추기 위한 말이었다. 내명부의 수장이 후궁의 일을 주관한 것인데 누가 뭐라 할 수 없었다.

“귀인의 버릇이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리 쉽게 허락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처음이라 쉬이 허락을 해 준 것이옵니다. 이후에 다시 출궁을 원한다면 엄히 꾸중을 할 것이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그리 답하자 대비 조 씨는 한숨을 내쉴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은하에게 나가라 손짓을 했다.

‘대비께 휘둘리지 마시오.’

연에 오르니 강이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대궐 살림의 주도권을 슬슬 찾아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 * *

말을 두고, 모래사장을 거닐며 함께 걸었다. 철썩이며 다가오는 바다를 볼 때마다 도아는 점점 욕심이 생겼다. 

시원하고, 맑은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은 욕망, 그것은 인간에게는 없는 인어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버젓이, 나란히 걷고 있는 강이 있으니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씰룩이며 옆을 쳐다봤다.

‘혼자 보내 주시지.’

그러다 함께 쳐다본 강과 눈이 마주쳐서 서둘러 시선을 접었다. 

그저 아쉬운 마음에 한쪽에 앉아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가온 바다는 어느새 저 멀리 멀어져 있었다.

“바다에 왜 그렇게 오고 싶어 했소?”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던 도아는 말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강은 저만치 멀지 않은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앉았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예…….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바다를 의지하고,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다에 자주 왔겠소.”

가장 가까운 곳이 이 바다였으니까. 도아는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바다에서, 전하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 인연이 이리 닿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비밀, 도아는 옅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바다의 저 너머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었다. 

“과인도 그렇소.”

저 멀리 수평선을 넘어갔던 생각이, 강의 한마디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섬겨 어마마마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자주 오고는 했소.”

“그러셨군요.”

“그러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면서 강요로 발길을 끊게 되었지.”

“…….”

“과인은 이 바다에서 찾고 싶은 것이 생겨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중이오.”

찾고 싶은 것에 대한 미련이 ‘인어’의 존재란 것을 도아는 알고 있었다. 

“왜 찾으려 하십니까?”

“응?”

“바다에서 무언가를 찾고 계신다는데 그것을 왜 찾으려 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뜻밖이군.”

그렇게 말하면서 강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만하라는 사람은 있어도, 그 연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소.”

“…….”

“믿지도 않았겠지만…….”

그의 작은 미소가 꽤 쓸쓸해 보였다. 이제는 인어의 존재를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치부할 것이다. 

이미 이 땅, 바다에서 멸종한 지 300년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만나 보고 싶을 뿐이오.”

“그저 그뿐이십니까?”

“은인을 해코지할 수는 없지 않소.”

“……은인이군요.”

“말하자면 그렇소.”

처음 강이 인어를 찾는다고 할 때 그가 해코지를 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의 눈이 바다를 품고 있는 모습은, 결코 인어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이번에는 모래사장을 벗어나 저만치 절벽을 향해 올랐다. 그곳은 도아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말을 돌보는 상선이 만류했지만 도아의 의지와 지기 싫은 강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이 험한 곳을 어릴 때부터 다녔단 말이오?”

“예, 힘드시면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앞장서서 올라가던 도아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뒤처져 있던 강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아주 괜찮소.”

“옥체 상하시면 제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그런 걸 걱정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도아는 활짝 웃으며 머리에 쓰고 있던 갓을 끈을 건 채 목 뒤로 넘겼다. 

땀을 흘린 만큼의 보답이 있었다. 과연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그간 강이 봐 왔던 곳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주 오래전에 이 바다의 주인은 인어였다고 합니다.”

바다를 한눈에 담고 있던 도아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에 강은 시선을 돌려 도아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던 인어를 인간의 그릇된 욕심으로 멸종에 이르게 했다지요. 만약 그때 인간들이 무자비하게 죽이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에도 인어는 바다의 주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도아가 이런 몹쓸 저주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300년 동안 자식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조상들이 스쳤다.

인과응보, 모두 준 대로 돌려받은 것이었다. 누구도 원망하고 탓할 수 없는 순리였다.

“일전에 과인이 귀인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한다 했었소.”

“예, 그러셨습니다.”

이 말에야 도아는 바다를 두고, 강을 바라봐 주었다. 

“귀인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인어.”

도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 사이로 들리는 소리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절벽에, 올 사람은 없는데? 

“나 참, 숨넘어가겠네.”

걸쭉한 목소리를 타고, 세 사내가 절벽을 올랐다. 낯선 사내들의 등장에 강은 본능적으로 도아를 가렸다.

“사내에게는 볼일 없으니 가도 좋다.”

“이곳에는 사내밖에 없다.”

“누구를 호구로 아나. 당신 뒤에 있는 계집, 내놓고 꺼져.”

이들은 도아가 남장을 했음에도 여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강이 아닌 도아를 노리고 있었다.

“누가 보낸 자들이냐.”

“재미 좀 보려는 놈들이지. 누가 보낼 놈들인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목숨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무서워라!”

이 사내들이 노리는 사람이 도아란 사실에 강은 빛보다 빠르게 소매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빼 들었다.

“고작 그 작은 검으로 우리를 상대하시겠다고?”

“이것도 네놈들에겐 과분하지.”

“뒤에 바짝 숨긴 계집만 내놓으면 편할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계집은 없다고 했다. 네놈들이 상대할 건 나다.”

절대, 결코 저들에게 도아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강은 검집에서 검을 빼 들어 단단히 쥐어 들었다.

“저 뒤로 가 서 있으시오.”

앞에 있던 두 사내가 무서운 속도로 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 버리고 말았다.

도아는 주춤거리며 강의 말대로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존재가 저들을 상대해야 하는 강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그 순간 뒤 춤에서 활을 들고 있던 사내가 화살을 쏘아 올렸다. 모두의 시선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 막을 새가 없었다.

화살은 정확히 도아의 올림머리에 명중했고, 머리를 잡아 주던 끈이 화살에 찢겨 나가자 긴 머리 타래가 너울거리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래도 사내라 할 테냐?”

활을 쏜 사내가 비아냥거리며 다시 활을 집어 들자 강은 단도를 그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이미 강의 단도에 적당히 자상을 입은 앞의 두 놈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강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도 강은 검에 능숙하게 훈련되어 있었다. 일순간에 세 사내를 제압하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도아에게 달려왔다.

절벽 끝에 서 있는 도아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연신 흩날리고 있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다친 곳은 없소?”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야말로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소. 저런 자들 상대하는 일은 혼자서도 충분해.”

“그래도…….”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걱정하느라 연신 몸 곳곳을 살폈다. 

때 이른 안심이었다. 뒤에서 피를 토하는 소리에 강이 황급히 돌아봤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가슴에 칼을 맞았던 사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활을 쏘고 쓰러졌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사내는 정확히 도아를 노렸고, 화살은 맹렬히 날아들었다. 

“흐억……!”

강은 온몸으로 도아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화살은 강의 등을 꿰뚫고 들어가 꽂혔다. 

“전하!”

“윽…….”

급히 강의 품에서 나온 도아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여유롭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괴로움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저…… 전……하…….”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강의 상처를 만지려 할 때 강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더니 이내 도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화살에 맞고, 절벽 아래로 추락한 강은 살갗을 파고드는 바다로 떨어졌다. 등을 파고든 화살의 통증은 이내 사라졌다.

그날도 이러했다. 바다에 빠진 몸은 속절없이 아래로 빨려가듯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 없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인…….’

절벽에 홀로 두고 온 도아를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 할 때, 익숙한 기운에 겨우 눈이 반쯤 떠졌다. 

청명한 빛을 내며 무언가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손을 뻗은 채 다가온 그것은 망설임 없이 가라앉고 있던 강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긴 머리는 바닷물에 자연스럽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꼬리, 분명한 인어였다.

인어는 강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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