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32)화 (33/93)

제 32 화 어긋난 채 닿은 입술

밝은 낮에 찾아오라 말하고 가 버리려고 했는데 바다 얘기에 걸음이 딱 멈추었다. 

“……바다요?”

싸늘하던 눈빛마저 달라졌으니 강은 통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붙었다.

“모레 새벽, 어떻소?”

“그저 하시는 말씀 아니시죠?”

“허언은 하지 않소.”

그 말에 찰나였지만 도아의 얼굴에 보름달보다 더 밝고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바다가 멀지 않아 말을 타고 가면 될 것이오.”

“예, 알겠습니다.”

“말은 탈 줄 알 것이고?”

“물론입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인데 역시나였다. 

“그럼 그때 봅시다.”

“예,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어련하실까.”

그리 말하며 강은 대치했던 상황이 종료됐다는 안도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바다로 끝났다고 여기시면 안 됩니다.”

“…….”

“물러가겠습니다.”

바다로 해결이 될 거라 생각한 강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선 도아의 얼굴에 봄꽃이 활짝 피었다.

걱정스레 따라나섰던 무이도 이내 주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따랐다.

* * *

화원에 서서 꽃에 물을 뿌려 주고 있던 청아는 오랜만에 방문한 대제학을 반갑게 맞이했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다가오는 대제학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마마에게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함께 기뻐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 말하자 대제학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대비마마께서 아무래도 중전마마께 마음을 돌리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돌리시다니요?”

“후사에 대한 마음 말입니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후궁을 뽑으신 게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국본을 두시고도 마음을 달리 드신 것 같습니다.”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기뻐할 일 없던 청아의 얼굴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자경전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대비마마의 심중을 제게 밝히시며 마마를 도와주시겠노라 약조를 하셨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예, 마마의 태에서 나올 후사를 고대하고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분명 무언가를 기대할 만할 말이었다. 그러나 들뜬 마음도 잠시, 청아는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다. 

‘후사는 고사하고, 승은 한번 입지 못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전하께서 귀인마마의 처소에만 드시니 달리 방도를 내시어 마마의 처소에 드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갑자기 대비마마께서 왜 제게 이토록 호의적으로 나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문으로는 얼마 전에 전하와 대비마마가 크게 언성을 높이셨다고 하옵니다.”

“음, 후사를 방비하여 자리를 굳건히 하시겠다는 거군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쪽으로 해박한 청아는 단번에 대비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어찌 움직여야 할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예, 마마라면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옵소서.”

연분홍 연지를 곱게 칠한 입술이 가지런히 열렸다.

“영상대감에게 자제가 있다지요?”

“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은 어찌 물으십니까?”

“두루두루 살피다 보니 흥미로워서요.”

“아, 아. 그럴 만도 하실 겁니다. 워낙에 사생활이 지저분하여.”

음?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말에서 청아는 눈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설마 영상대감의 자제가 그러려구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런데 어려서부터 치마 두른 계집을 쫓아다니기 좋아하여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그리 방탕하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런……. 영상대감의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이제는 영상대감도 손을 놨다고 하니 말 다 했지요.”

이보다 좋은 배경이 어디 있을까. 청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에 정보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 * *

허공을 가로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화살이 과녁을 가까이 두고 비켜 지나갔다. 

“실력이 나날이 늘어 가시옵니다.”

“아직 멀었네.”

아쉬운 듯 화살이 꽂힌 곳을 바라보던 은하가 창피하다는 듯 웃으며 도아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도아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은하에게 내밀었다. 

“고맙네.”

받아 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을 몇 번만 쏘아도 땀이 났는데 이젠 날이 서늘해 그러지도 않았다.

“음……. 저어, 마마.”

“왜 그러는가?”

“그것이, 음…….”

“무슨 말을 하려고 귀인이 이리도 망설이는가?”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꺼내 놓는 성품이었다. 은하는 선뜻 말하지 못하는 도아를 살피며 웃었다.

“편히 하게.”

“송구하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그것은 아니옵고,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요.”

“허락? 내 허락 말인가?”

그 물음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은하가 강의 조강지처라, 이런 허락이 도리에 어긋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망설였다.

“전하와 내일 궐을 나서려 하옵니다.”

“전하와 함께 말인가?”

“예, 중전마마.”

도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 이미 전하께서 계획하신 일이겠지. 맞는가?”

“예? 아…….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되었네.”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도아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은하는 알 수 있었다. 표면상 두 사람은 단란한 부부이니까. 그럴 수 있었다.

“전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시지만, 외로운 분이시네.”

“예?”

“화살을 가져다주겠는가?”

은하가 알 수 없는 물음을 묻고 화살을 달라고 하자 도아는 끄덕이며 화살을 내밀었다. 그러자 은하가 평소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간격이 무척이나 좁아졌다. 은하는 비밀스럽게 웃으며, 도아의 귓가에 다가왔다.

“전하와 난 연정이 아닐세.”

그리고 귀에서 떨어져 도아와 눈을 마주쳤다.

“의리일세.”

말을 마친 은하는 크게 당황한 도아에게 검지로 제 입술을 가리며, 비밀임을 말했다.

화살을 받아 든 은하가 뒤로 물러났다.

“잘 다녀오게.”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은하는 다시 웃어 주며 자리로 돌아가 활을 겨누었다.

‘연정이 아니라 의리라고……? 말도 안 돼.’

이미 많은 이들에게 두 사람은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직접 후궁에게 깨 주다니, 얼떨떨했다.

아마 은하는 자신의 존재가, 도아가 강에게 가는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 순간 은하가 날린 화살이 처음으로 과녁 정중앙을 꿰뚫었다. 

“명중이옵니다!”

관군의 외침에 은하는 입궐 후 처음으로 체면을 벗어던지고 두 팔을 힘껏 올린 채 도아를 향해 한껏 기쁨을 표했다.

“보았는가!”

“잘하시었습니다, 마마.”

그렇게 은하는 한참을 청량한 햇살보다, 더 밝고 환하게 웃었다. 

* * *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도아는 누가 깨우기도 전에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곁방에서 무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처소에 들어왔을 땐 소세도 끝낸 후였다.

“설마 밤을 새우신 건 아니시죠?”

“아니야, 이리로 와서 머리 좀 만져 줘.”

“아함! 예, 마마.”

하품하던 무이는 생기가 넘치는 도아의 뒤로 가 머리를 풀어서 곱게 빗질해 주었다. 

“바다에 가시니 그리도 좋으시옵니까?”

“좋아. 생명수라도 마신 기분이야.”

그 대답에 무이는 한껏 웃으며 길고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쥐어 잡아 머리 위로 올려 묶었다.

“정말 남장으로 가실 거예요?”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데 그러는 편이 수월해.”

“전하께서 알고 계세요?”

“아니?”

너무 당연한 대답에 무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로 묶여 길게 내려온 머리를 잡아 돌돌 말아 올렸다.

“선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네가 오늘도 고생이 많았네.”

꽤 능숙하게 도포를 입고, 마무리로 머리 위에 갓을 씌워 주었다. 

“몸 성히 다녀오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동행하시니 걱정하지 마.”

“예, 너무 좋다고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고 그러시면 큰일 나세요. 아시죠?”

“고삐가 풀리면 네가 잡아 줘야 하는데.”

두 사람은 처소를 나서는 순간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무이는 아직 말을 타기에 무리인지라 처소에 남기로 했다.

문턱을 넘고 밖으로 나가자 상선과 강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도포 차림으로 변복을 한 후였다.

“귀인……마……마?”

밖으로 나오는 도아를 보고는 당황한 상선이 말을 더듬거렸다. 등지고 서 있던 강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돌아보았다.

“가시지요.”

“우리 구면인 것 같소.”

“또 뵙습니다, 나리.”

강은 도아를 야시장에서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도아는 강의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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