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31)화 (32/93)

제 31 화 어긋난 채 닿은 입술

원치 않아도 고스란히 전해 들은 강의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사과를 하려고 불렀는데 오지는 않고 되레 적반하장이라 한 소리를 들었으니 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전하께서 부르시면 원치 않아도 억지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이 나라에서 과인의 말이 곧 법이오. 모두가 그리 따르니까.”

이런 가치관은 애초에 갖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도아에게 억지를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삐뚤게만 나갔다.

“그런데 귀인은 그런 과인을 능멸하고 있소. 알고 있소?”

“제 하늘은 전하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어찌 얽혔든, 과인은 그대의 지아비요. 귀인의 하늘과 주인은 곧 과인이어야 맞소.”

“다른 후궁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그곳에 납시어 강요하십쇼.”

강은 튀어 나가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이에 도아도 지지 않고 맞섰다. 

“보아하니 과인이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인데.”

“…….”

“박식한 귀인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소.”

얼굴에 감정을 싹 지운 강이 도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는 늙어 죽을 때까지 과인의 후궁일 것이오.”

“…….”

“내가 안지 못해도, 내 여자로 남는다고.”

그 말에 도아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려고 하자 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 버렸다.

“가자!”

짜증이 섞인 강의 말에 상선과 궁녀들이 줄을 지어 우르르 나갔다.

“어린아이 심술도 아니고, 기가 막혀.”

듣고 있으니 딱 어린애가 어른에게 심술을 부리는 꼴이었다. 도아에겐 어떤 위기감도 끼치지 못했다.

콧방귀를 뀌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아 마저 읽던 책을 눈에 담으려 했으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전에서 강에게 손을 잡혔을 때 그의 생각을 읽은 것이 떠올랐다. 대비 조 씨와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친자식이 아니었나?’

대화를 듣고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생각보다 그런 대비에게 강이 입은 상처가 커 보였다.

그의 피부로 읽히는 가슴의 상처와 슬픔이 꽤 오랫동안 몸에 웅크리고 있던 것 같았다. 이젠 점차 감정마저 읽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날의 일이 용납되는 건 아니야.’

물속에서 나누었던 짧은 입맞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사내의 힘은 감히 밀어낼 수 없이 강력했다.

순식간에 도아의 입술을 머금어 집어삼켰다. 이대로라면 먹히겠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도아는 한 손으로 입술을 만져 보았다. 거칠었지만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일까? 의문이 들었다.

* * *

부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원군은 한양으로 돌아왔으니 강에게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 고집하여 입궐을 했다.

그러나 막상 입궐을 하고 보니 대전에 들 엄두가 나지 않아 반 시진을 망설인 끝에 겨우 들었다.

“돌아오셨다고요.”

“예? 아, 예. 전하. 그리되었사옵니다.”

“언뜻 소식은 들었습니다.”

“예, 돌아와 곧장 입궐해서 전하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송구하옵니다.”

그런데 강은 초지일관 상소문에만 눈길을 둘 뿐 앞에 앉아 있는 부원군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뭐 굳이.”

“…….”

“가뭄으로 점점 어려운 시국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상소문을 읽어 내려가며 말을 이어가던 강이, 드디어 부원군에게 눈을 맞추었다.

“이런 때에 자칫 구설에 휘말리게 되면 중전의 입장이 난처해질 겁니다.”

“…….”

“자중해야 할 것입니다, 부원군.”

왕과 중전의 사이가 좋다는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위의 냉담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은하가 자신을 가까이하지 않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이 났다. 자신이 은하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강은 어떤 식으로도 살갑게 장인이라 불러 주지 않았다.

언제나 공적으로 왕과 신하로서 대화를 이어 갔다. 그조차도 멀리 떨어져 있어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예? 아, 아니옵니다. 허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환영받지 못한 귀환이었다. 부원군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쯧쯧……. 돌아와서 뭘 어쩌려고?”

강은 부원군이 쓸모없이 권력욕에만 미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정혼자와 혼인을 코앞에 둔 여식을 팔았겠지. 

혀를 끌끌 차던 강은 상소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가뭄의 전조 증상을 보이던 땅은, 어느새 메말라 갈라지고 신음을 뱉기에 접어들었다.

지방 곳곳에서 올라오는 상소에는 한창 곡식이 여물어야 할 때 물이 부족해 말라 죽는 일이 허다하다는 보고가 적혀 있었다. 

하필 한 해 농사의 수확을 앞둔 시점에 가뭄이었다. 강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담겼다. 

* * *

강이 다녀가고, 분노에 차오른 대비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예에 몰두했다. 

생각이 마무리된 대비 조 씨는 엄 상궁에게 일러 대제학을 불러들였다. 

“오래간만입니다, 대제학.”

“대비마마께서 이렇듯 불러 주시니 광영일 따름이옵니다.”

이런 대화는 무의미했다. 강의 대찬 외면 속에 대비 조 씨의 마음이 한껏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김 숙의가 품행이 바르고, 용모가 단정하여 내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망극하옵니다.”

“그 태에서 나온 후사가 어떠할지 심히 고대하는 중입니다.”

후사에 대한 얘기에 대제학은 굳고 말았다. 저 말은 대비가 청아의 후사를 세자로 염두에 두어 두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물론 대제학도 그러하겠지요.”

“하루를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럴 것입니다. 허나 주상께서 워낙 귀인만을 총애하시는지라 걱정이라면 그것이겠지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왕이 후궁을 총애하겠다는데 막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주상의 걸음을 김 숙의에게 돌려놓는다면 대제학은 무얼 약조하겠습니까?”

“그리만 해 주신다면 소신이 감히 무엇인들 못 내어 드리겠사옵니까?”

“핫하하하! 목숨이라도 말입니까?”

“김 숙의마마가 회임만 하신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 드리겠사옵니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된 듯 우렁차게 말하던 대제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주상의 뜻에 반하는 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예?”

“예를 들자면 말한 것이네.”

“아, 예. 예…….”

“목숨도 내놓겠다고 한 말, 잊지 마세요.”

활짝 웃는 대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대제학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내 그럼 그리 알고,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제학.”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대비마마.”

그럼에도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왕의 손을 잡을 수 없으니 그다음의 권력자에게 붙는 것이 살길이었다. 

* * *

해가 저물고, 시원한 바람이 불자 도아는 몸을 회복한 무이와 함께 후원 산책을 나섰다. 다행히 도아의 치유로 인해 다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큰 호수를 끼고, 주변을 살피며 나란히 걸었다. 도아는 어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매일 조금씩 치유술을 펼쳤다.

“어의가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혼났사옵니다.”

“너랑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걱정하지 마.”

“그래도 소인은 새가슴이라 무섭사옵니다. 행여나 들킬까 봐.”

“바보. 그렇게 말하다가 엿듣는 게 더 빠르겠다.”

도아가 그렇게 말하자 무이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사옵니다!”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아무렴요. 마마께서 밤낮으로 곁에서 극진히 간호를 해 주시는데 얼른 나아야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예, 마마.”

돈독해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껏 웃어 준 뒤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후원 길을 따라서 한껏 피어 흐드러지던 꽃들이 모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아마 가을이 올 모양이었다. 

“참, 어제 전하께서 오셨사옵니까?”

“저녁에 잠깐.”

“큰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건너가 보려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단단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

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줌 빛도 보이지 않는 깊은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마마 때문에요?”

“응, 아마 당분간은……, 아니다. 어쩌면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야.”

그런데 저만치 작은 소리가 들렸다. 호수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돌아보자 연에서 내리는 강이 보였다.

“그만 돌아가자.”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 도아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무이는 먼저 가는 도아를 두고, 강을 향해 예의를 차렸다.

인사를 하고 있던 무이를 지나친 강은 무서운 기세로 도아를 따라갔다.

“귀인.”

“…….”

“이봐!”

“…….” 

“아랫것들이 보는데 과인을 이다지도 업신여기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강은 도아가 자신을 몇 번이나 불러도 무시하자 앞을 가로막으며 도아가 어제 했던 말을 똑같이 읊었다.

“전하께서 소첩을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지 않아서요.”

“귀인을 보려고 연에서 내린 것이오.”

“그렇다니 송구합니다.”

“후……. 귀인.”

어제는 서로 극으로 치달아 못 할 소리를 뱉었다. 돌아서 나오면서 뱉었던 모든 말을 후회했던 강이었다. 

어느새 도아는 고개를 돌린 채 강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과인이 실수했소.”

“…….”

“인정할 테니 그만 흘겨보고.”

“…….”

“얘기 좀 합시다.”

먼저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사과가 나와야 도아가 받아 줄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때…….”

“당장 바다에 보내 달라고 하지 않았소.”

다시 밀어내려는 기미가 보이자 강은 비장의 무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싸늘하던 도아의 눈빛이 바다 얘기에 달라졌다.

“……바다요?”

넌지시 물어본 말에, 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