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화 어긋난 채 닿은 입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술잔을 앞두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취기를 이기지 못한 강은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품 안으로 끌려온 여인은 한 송이 꽃이었고, 술기운에 이성은 이미 마비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거칠게 도아의 입술을 머금은 강은 진득하게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처음 맛보는 여인의 입술이었다.
아니, 그 순간 강의 머릿속으로 인어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도아를 꽉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자 뒤로 밀려났다.
강의 품에서 벗어난 도아는 잔에 담겨 있던 술을 망설임 없이 강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그러고는 강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손등으로 거칠게 제 입술을 닦았다.
“상선에게 일러 잠자리 궁녀를 들이라 하겠습니다.”
모욕감에 몸서리치던 도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뒤에서 술을 뒤집어서 쓴 강이 도아를 붙잡았다.
“가지 마라.”
뒤를 돌자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강이 보였다.
“그리 말씀하실 거라면, 소첩을 모욕하시면 아니 되셨습니다.”
“…….”
“더 이상의 모욕은 당하지 않습니다.”
꽉 붙잡은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처소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상선이 다가왔다.
“전하의 취향은 자네가 알 것이네.”
“예?”
“몹시 궁하신 듯하니 궁녀를 들이시게.”
“예……?”
궁하다는 표현에 상선이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도아는 이미 가고 없었다.
술에 흠뻑 젖은 얼굴 위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은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우는 듯 웃는 듯 한참을 실성한 듯 웃어 대던 강은 손을 이마에 얹어 얼굴을 가린 채 숨을 죽였다.
* * *
사람이 없는 듯 고요하기만 한 도화군의 사저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너 명의 하인들이 봇짐을 잔뜩 짊어지고 대문을 나섰다. 그러자 가마와 말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이는 괜찮습니까?”
“예,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놀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부인에게는…….”
“안 그래도 한곳에 머무는 것이 지루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군부인이 활짝 웃어 주자 도화군도 마지못해 따라 웃었다.
“그런데 아주버님께 한마디 말씀도 없이 가도 되겠습니까?”
“…….”
“많이 서운해하실 것입니다.”
“다녀와서 꾸중을 들으면 될 겁니다.”
그날 궐에서 돌아온 도화군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괴로워했다.
“가마에 오르시지요.”
“예, 서방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부인은 지방에 있는 별저로 내려가기를 권했다. 결정은 빠르게 내려졌고, 오늘 떠나게 된 것이다.
도화군은 가마 앞으로 가서 문을 올려 주었다. 남은 손으로 군부인의 손을 잡아 잘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힘이 들면 언제든 멈추라 말씀하세요.”
“예,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거든 지체 말고 가마를 내리라 하세요. 우리 선이가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겠습니다.”
농을 치듯 그리 말하니 도화군이 마저 웃어 주었다. 문을 내리고, 앞에 있던 말 앞으로 다가가 고삐를 쥐어 잡았다.
단숨에 날렵하게 말 등에 안착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기 전 군부인이 남긴 말에 강이 떠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부디 이 못난 아우가 돌아오는 날까지 강녕하시옵소서, 형님.’
생각을 마친 도화군이 말의 고삐를 당기며 앞장서서 출발했다. 뒤이어 가마와 짐을 꾸린 하인들이 줄을 지었다.
* * *
이대로 있다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고통을 이기며 눈을 떴다. 처소 안을 가득 메우며 들어온 볕이 유난스럽다 여겨졌다.
며칠은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목구멍은 갈증으로 쩍 하고 갈라질 것 같았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켜 앉혔다. 작은 기척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던 상선은 강의 기침을 알아차렸다.
“전하.”
“들어와라.”
강의 허락에 냉수를 들고 상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린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강은 서둘러 사발을 들어 목에 쏟아부었다.
“하……. 살 것 같군.”
빈 그릇을 상선에게 건네고 입술에 묻은 물기를 닦는데 저만치 인어 서책이 보였다.
그러자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기억 속의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억지로 도아를 쥐어 잡아 입을 맞추는 기억에 닿자 강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뱉었다.
“어제 과음을 하셨사옵니다.”
“누가 멋대로 귀인을 들이라 했느냐!”
“송구하오나 서책만 드리고 가려는 귀인마마를 전하께서 들이라 명하셨사옵니다.”
“하…….”
눈치껏 상선이 조용히 물러가려 했으나 강이 물었다.
“어제 귀인이 대전을 나서면서 남긴 말은 없었느냐?”
“그것이…….”
“남겼구나. 뭐라고 했느냐?”
상선이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예사말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괜찮다. 뭐라고 하고 갔느냐?”
“모…… 몹시 궁하신 듯하니 궁녀를 들이라 하셨사옵니다.”
“…….”
“주, 죽여 주시옵소서!”
입에 담고도 망극하여 상선이 바닥에 엎드려 외쳤다. 그러자 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기어이 미쳤구나.”
‘날이 밝으면 후회하실 일은 하지 마십쇼.’
마치 앞을 내다본 듯 도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 *
사건이 일단락되고 처음으로 세 후궁이 나란히 교태전에 문안을 올리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교태전을 등지고 걷던 도아가 뒤를 돌자 나은과 청아가 따라 걷고 있었다.
“오랜만일세, 안 숙의.”
“송구하옵니다, 귀인마마.”
“그럴 것이네. 자네로 인해 고초를 겪어야 했던 내 궁녀는 아직 누워 있으니.”
“…….”
“많이 야위었군. 그만큼 마음고생을 했다고 내 멋대로 생각해도 되겠는가?”
이 말에도 나은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은 죄에 자백을 하는 것보다 중한 것이 뭔 줄 아는가?”
“…….”
“지은 죄에 대한 뉘우침이네.”
곁에 서서 모두 듣고 있던 청아는 순식간에 매서운 눈을 하고, 도아를 응시했다.
“다시는 내가 아니라도, 다른 이에게 죄를 지어 고개 숙일 일은 만들지 말게.”
할 말을 마친 도아는 청아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는 돌아서 가 버렸다.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청아가 나섰다.
“고생했습니다, 안 숙의.”
“……아닙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처소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때 마음이 어찌나 아프던지.”
그렇게 말하면서 청아는 나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잡혀 있는 손을 바라보던 나은이 애써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 써 주었다니 고맙습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예……. 그렇지요.”
“그간 격조했으니 함께 처소로 가서 얘기나 나눕시다.”
잡혀 있는 이 손을 놓아야 도아의 말대로 할 수가 있었다. 이 손을 잡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마, 이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 손에 가문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그럴 수가 없었다.
“네, 제 처소로 가시지요.”
“그럼 그럽시다, 안 숙의.”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 일이었다. 나은은 조용히 단념한 듯 잡힌 손에 끌려 걸음을 걸었다.
* * *
토론을 마치고 나오는 강의 얼굴에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지금뿐 아니라 오늘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일과를 마친 강은 뒤죽박죽 엉킨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누각에 올랐다. 다행히 귀신처럼 있던 도아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미치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술을 먹고 누군가에게 실수를 저지른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 한 번도 여인을 안아 본 적은 없었지만, 성욕이 넘쳐 참지 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도아가 남기고 간 말이, 충격에 충격을 입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궁하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예?”
“뭘 그리 놀라느냐? 가서 귀인을 데려오너라.”
화들짝 놀란 상선에게 강은 큰 임무를 떠넘겼다. 상선이 울상을 지었지만 강은 휑하니 몸을 돌려 버렸다.
반 시진이 흐리고, 갈 때보다 더 울상으로 상선이 돌아왔다.
“귀인은 어찌하고 혼자 오느냐?”
“…….”
“거절했느냐?”
“송구하옵니다.”
어렵게 마음을 먹고 사과라도 하려고 부른 것인데 당차게 거절당했다.
“귀인이 올 때까지 있을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
“전하…….”
“어서 가서 전하거라!”
그리하여 상선을 억지로 보내 놓고 기다렸다.
“이번에는 귀인이 뭐라고 했느냐?”
“…….”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그대로 말해라.”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그리고 날아온 것은 면박이었다. 그 말을 그대로 듣고 있었냐며, 그대로 전했다고 온갖 화를 다 받아야 했다.
살벌하게 세 시진이 흘렀다. 그리고 뱉은 말처럼 도아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과인을 능멸해도 유분수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강은 그 길로 도아의 처소로 향했다. 상선이 몇 번이나 화를 앉히고 가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문이 부서지든 손이 부서지든 무언가 하나는 사달이 날 소리였다.
처소에 불을 밝히고 앉아 저고리 차림으로 서책을 보고 있던 도아는 큰 소란에도 의연한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린 채 분노에 찬 강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밤 희롱을 하신 것으로 부족하셨습니까?”
“이보시오, 귀인!”
“아랫것들이 보는데 소첩을 이다지도 업신여기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제의 일로 화가 난 것은 도아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 앞으로 다가갔다.
“과인이 상선을 보내 전한 말을 듣지 못했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뜻도 함께 전해 보냈습니다. 듣지 못하셨습니까?”
“……들었소.”
“가지 않겠다 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밤에 과인을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한 것이오?”
언성을 높이려 했으나 도아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마도 어제 일에 대해 말하시려 부르셨을 겁니다.”
“…….”
“그런데 전하.”
다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돌렸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원치 않아 거절했다고 되레 쫓아와 이리 역정을 내시다니, 밖에서는 이것을 두고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
“적반하장이라 하옵니다.”
밖에서 이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상선은 다문 입에 힘을 주었다.
‘백전백패시옵니다, 전하.’
밤이 깊었다. 길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