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화 어긋난 채 닿은 입술
진득한 어둠이 도아를 감싸 안아 빛이 없는 대신 달과 별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와 같이 군림한 강이 나타나자 주변으로 달처럼 환한 등불이 누각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군.”
“…….”
“이 밤중에 깜깜한 누각에 홀로 서서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소?”
“그저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가고 싶다며 보내 달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젠 못 들은 것으로 하란다.
“이미 할 말은 다 해 놓고.”
“어차피 불허하실 것 아닙니까?”
“귀인이 과인 속에 들어와 봤소?”
“예?”
“과인이 뭐라 할 줄 알고, 그리 단정 짓는 것이오.”
사실 도아는 잘 모르겠지만 강에게도 바다는 이상하게 늘 그리운 곳이었다. 인어에 대한 갈증이 바탕이었지만 바다는 평온함을 안겨 줬다.
“안 그래도 가 보려던 참이었소.”
“바다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바다.”
점점 어둡던 곳에서 희망이 보였다. 도아의 얼굴이 점차 노을을 그리는 하늘처럼 천천히 밝아졌다.
“까짓것.”
“……?”
“갑시다, 바다.”
믿기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바다에 갈 수 있다니,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대신 과인과 동행해야 할 것이오.”
“그리하시지요.”
“썩 내켜 보이진 않지만, 과인이 함께 가야 웃전의 허락을 받기 수월할 것이오.”
“아무렴요. 전하의 말씀을 따를 것입니다.”
항상 강이 한 마디를 하면 두세 마디를 쏘아붙이던 도아가 이번에는 순순히 따랐다.
“평소에도 이렇게 공손해 보시오.”
이 말에는 대꾸 없이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렇게 큰 성과를 안은 채 누각을 내려오자 강은 상선에게 귓속말로 지시를 내렸다.
어둠 속이었지만 상선의 얼굴이 절망으로 그을렸다. 그리고 이내 강의 눈짓에 부리나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가도 되옵니다.”
“등 하나 없이?”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오. 줄 것도 있고.”
그리 말하며 강이 먼저 앞장을 섰다. 줄 거? 되뇌던 도아도 총총걸음으로 강을 따라 걸었다.
후원을 가로질러 처소로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딱히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흐헉……. 헉……. 전하.”
당도할 무렵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뒤를 돌자 커다란 서책을 든 상선이 서 있었다.
“맞춰 잘 왔다.”
“마…… 망극하옵니다.”
상선이 소중히 들고 온 서책을 강이 건네받았다.
“줄 거.”
그리하여 서책이 다시 도아의 손으로 넘어왔다. 서책을 받아 든 도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펼쳤다.
“어……?”
안에는 놀랍게도 인어로 보이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도아는 정체를 들켰다는 두려움에 강을 올려다봤다.
“인어, 처음 보시오?”
“예? 아, 음……. 그, 그게……. 예. 처, 처음…… 봅니다.”
“말을 더듬을 만큼 놀랍소? 인어가?”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강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도화군에게 받은 것이오.”
“아, 그래서 그때 입궐하셨군요.”
“맞소. 그러니 아주 주는 것은 아니고, 다 보고 나면 돌려주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도아는 서책을 가슴팍에 넣어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들어가시오.”
“예, 살펴 가세요. 전하.”
어색하게 마무리된 자리였다. 도아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난 후 처소로 들어와 서책을 펼쳤다.
“똑같아. 이 꼬리…….”
흐려지는 말꼬리, 도아는 손가락으로 그림 속 인어의 꼬리를 만져 보았다.
* * *
보름의 시간을 보내고, 처소 밖으로 나온 나은은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포동포동하던 볼살은 찾아볼 수 없이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덕분에 이목구비가 또렷해져 순둥이처럼 착해 보이던 인상은 사라졌다. 단정히 차려입고, 은색 비녀를 찔러 넣은 모습이 단아했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중전마마.”
“덕분에. 앉으시게, 숙의.”
“망극하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태전이었다. 문안 인사를 올리고, 사뿐히 자리에 앉았다.
나은의 인상이 달라졌음을 은하도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보름이 긴 시간은 아니었네.”
“예, 송구하옵니다.”
“허나 그 시간을 쓰는 사람이 어찌 사용했는지가 가장 중요하겠지.”
“멍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있는 시간을 쓰고도 남은 모든 시간을 사죄하며 보냈사옵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거뭇해진 눈 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 말한다니 내 더는 이 일을 거론하지 않을 것일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당분간 내가 달리 말을 할 때까지 문안을 올 때마다 내훈을 필사해서 가져오도록 하게.”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필사만 하지 말고, 내훈에 깃든 글과 뜻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도록 하게.”
『내훈』은 부녀자의 훈육을 위해 만들어진 서책이었다. 그 양이 상당하여 매일 필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나은은 군소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모두가 나서서 숙의를 궐 밖으로 쫓아내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르겠사옵니다.”
“처음이기 때문일세.”
“……?”
“그 말은 실수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제야 나은은 이해를 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실수가 아닐 테지.”
“…….”
“부디 모두의 자비를 저버리지 말게.”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끝말이 작게 흐려지긴 했지만 은하는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정말 실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제학의 여식이 꽤나 총명하여 믿고 따르기에 그만이라 하더구나. 그러니 입궐하여 길이 막히거든 그의 여식을 따르도록 해라.’
‘무슨 일이라도…… 말입니까?’
‘그래, 한 배를 탔으니 한 길을 가야 한다.’
입궐을 앞두고 부친이 당부했던 말이, 나은의 마음을 꾹꾹 눌렀다.
* * *
자경전은 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산이 연신 재를 뿜는 듯했다. 대전에서 돌아온 후 대비 조 씨는 아끼는 난을 산산조각 냈다.
오랫동안 꽤 공들여 키우던 난을 한순간에 죽였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강이 올 때까지 궁녀들을 힘들게 했다.
“어마마마, 소자입니다.”
엄 상궁이 외치려 했으나 강이 나섰다. 처소 안에서 아무 말도 없자 강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료에 앉아 있던 대비 조 씨는 강이 멋대로 들어오자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자 몸을 옆으로 돌리고 앉았다.
‘흥! 무릎을 꿇고 빌어도 이번에는 순순히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주상!’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강의 말을 기다렸다.
“그날은 소자가 선을 넘었습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도화군 앞에서 그리했습니까?”
“송구하옵니다. 허나 어마마마께서는 도화군에게 이미 진작 그 선을 넘으셨습니다.”
“뭐요? 지금 뭐라 했습니까!”
납작 엎드려 잘못을 구걸할 줄 알았던 강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나오자 대비가 버럭 역정을 냈다.
“다시는 도화군에게 그러지 마십쇼. 이제는 어엿하게 부인과 자식을 둔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언제까지 어마마마께 일방적으로 고개를 숙일 수는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화가 나지도 않으십니까? 감히 아우인 도화군이 보란 듯 주상을 기만하려 자식을 먼저 본 것입니다. 게다가 버젓이 사내아이를 낳아 놨으니! 내 분통 터지지 않게 생겼습니까?”
아이를 갖고, 사내를 낳는 일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대비 조 씨는 도화군의 일을 곱게 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자 강은 낮은 한숨을 쉬며 눈을 진득하게 감았다가 떴다.
“소자를 불경하다고 여기셔도 오늘은 꼭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얼마나 불경한 말인지.”
“소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화군을 경계하실수록 어마마마와 소자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강은 강한 우애로 도화군을 아끼고, 곁에 두려 했다. 대비 조 씨가 떨어뜨려 놓으려 할수록 그 우애는 끈끈해져 갔다.
“그러니 주상께서는 이 어미보다 도화군이 우선이란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란 것은 잘 아실 겁니다.”
“허! 내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소리를 듣나 봅니다.”
지겨웠다. 세자 시절부터 줄곧 강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목숨과 연관 지어 은근한 협박을 하고는 했다.
“소자를 대궐에 묶어 두신 것으로는 부족하십니까?”
“묶어 두다니요?”
“왕좌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 소자에게 어마마마께서 어찌하셨습니까?”
“…….”
“소자를 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소자는 정작 원하는 길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왕은, 천하의 주인입니다.”
“원한 적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미 그날부터 좁혀질 수 없게 되었다.
“어마마마께 묻겠습니다.”
“…….”
“그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길이셨습니까?”
“……주상.”
“소자는 한 시도, 이 자리에 앉아 행복하다 여겨 본 적 없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강의 눈가에 무언가 비추었다 사라졌다. 야속하게도 대비 조 씨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간곡히 청하옵니다. 부디 지금 어마마마께서 갖고 계신 것에 만족하십시오.”
“…….”
“그것을 지키신다면, 지금처럼 효를 다할 것입니다.”
“…….”
“소자 이만 물러가옵니다.”
할 말을 마친 강은 유유히 처소를 빠져나갔다.
* * *
최후를 맞이한 인어는 목소리를 건네고, 인간의 다리를 얻은 희생을 하고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쓸쓸하고 가엾게 죽어 가는 모습이 도아의 마음을 묶어 놓았다.
“연정이란 것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면 애써 할 필요가 없지.”
아직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본 적 없는 도아에게 인어공주의 비극적 결말은 따갑게 다가왔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 들고 처소를 나섰다. 강이 인어를 애착하니 이 책도 아끼겠단 생각이 들어 마음이 급해졌다.
“귀인마마.”
대전 앞을 지키고 있던 상선이 도아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고생이 많네.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옵니다. 고하올까요?”
“아니네, 밤이 깊었으니 이것만 좀 전하께 전해 드려 주게.”
“예, 알겠사옵니다.”
들고 온 것을 상선에게 넘긴 도아는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에 서늘함을 느낀다면 여름이 물러가고 있단 뜻이었다.
휑하니 부는 바람에 도아는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여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귀인마마! 마마!”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상선이 있었다.
“전하께서 마마를 대전으로 모시라 하셨사옵니다.”
“음……. 밤이 깊었는데.”
“허면 소인이 이미 떠나셨다 전해 올리겠사옵니다.”
“아닐세, 인사 정도는 올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인사를 말하긴 했지만 사실 바다에 관한 얘기를 꺼낼 수도 있겠단 생각에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발길을 돌려 대전 처소에 들었다. 안으로 걸음을 들이자마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도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도아는 강에게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귀인?”
“예,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더 많이 취하셨습니다.”
머뭇거리다가 다가가 자리에 앉자 주변으로 널브러진 술병이 보였다. 듣기로 강은 술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주변을 둘러보다가 까맣게 내려앉은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이 있어서 마신 것은 아니었다.
“책은 다 본 것이오?”
“예, 귀한 책 같아서 바로 돌려드렸습니다.”
그 말에 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술이 가득 찬 잔을 위태롭게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좌상은…… 좋은 아버지요?”
“예?”
“그대에게 좋은 아버지인지 묻는 것이오.”
“아버지는 언제나 좋은 분이셨습니다. 되레 오랫동안 아파서 속을 썩인 것은 소첩입니다.”
“그 차디찬 좌상이…… 자식에게는 너그러웠나 보군.”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앉아서도 중심을 잡지 못할 만큼 취기가 몸을 넘어 영혼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상선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해야겠습니다.”
“왜?”
“취기에 좋은 탕약이라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취하려고 마신 술에 굳이.”
강이 위태로워 보였다.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에, 도아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런데 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잔에 술을 채워서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도아가 서둘러 강의 손을 저지시켰다.
와락 다가온 손길에 잔에 담겨 있던 술이 흘러넘치고 말았다.
“뭐 하는 짓이지?”
“술은 이제 그만하세요.”
“그대를 보려고 부른 거지, 간섭하라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그래도 강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간섭이라 치부하며 정색을 하자 도아의 기분도 상하고 말았다.
잔을 말아 쥐고 있던 손을 푼 도아가 물러나려 몸을 틀었다.
“가려고?”
계속 반말을 섞어 쓰던 강이, 도아의 팔을 잡더니 제 쪽으로 끌어 왔다.
“날이 밝으면 후회하실 일은 하지 마십쇼.”
“후회? 내가 뭘 할 줄 알고.”
“이것부터 놔주십쇼.”
그는 어느새 도아의 팔목을 꽉 잡고 있었다. 도아가 잡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강은 히죽 웃었다.
“싫은데.”
“취기를 빌려 희롱을 하시렵니까?”
“내 후궁인데 그러면 안 되오?”
“전하.”
도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강을 쏘아보며 차갑게 그를 불렀다.
“하고 싶은데.”
그는 위험한 발언을 뱉고서 도아의 얼굴을 훑었다. 위험을 감지한 도아가 잡힌 손을 풀고 도망가려 하자 강은 힘을 썼다.
잡고 있던 손목을 품으로 잡아끌어 도아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