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28)화 (29/93)

제 28 화 닿는 손길 그리고 생각

지극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은 무이는 제법 빠른 속도로 쾌차하고 있었다. 거기에 도아가 의녀들의 눈을 피해 상처가 깊은 발목을 봐 주고 있었다.

환한 빛이 일렁이며 무이의 발목을 잡고 있던 도아의 손 주변을 감쌌다. 빛은 오래지 않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보는 눈이 많아서 한 번에 낫게 해 줄 수가 없어.”

“아무렴요. 소인은 괜찮습니다.”

“그래,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낫게 해 줄게.”

“네, 그런데 마마께서 이 능력을 사용하시면 기력이 쇠하시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마음씨 고운 무이는 자신의 절름거리는 발목의 상처보다 도아가 더 걱정이었다. 

“걱정 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너무 자주 쓰지 마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조절하도록 할게. 너는 네 몸 회복하는 일만 신경 쓰도록 해.”

아직 얼굴과 손등에 남은 상처 자국이 도아의 눈길을 머물게 했다. 치유 능력을 쓰면 흔적을 지울 수 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평생 원망스럽던 내 저주가, 요즘은 고맙네.”

“마마.”

“내 평생의 짐을 덜어 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그리 생각지 마셔요. 소인은 정말 괜찮사옵니다.”

“늘 그리 말해 주어 고마워.”

이 일을 함께 겪으며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다. 도아는 무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자리에 눕혀 주었다.

“이제 마마를 모셔도 됩니다.”

“당분간만 더 누워서 쉬도록 해.”

“마마께는 소인뿐이 없는데…….”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는 무이를 다독여 주며 도아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저만치 문 너머에 서 있는 치열이 보였다.

“아버지!”

“귀인마마.”

반가움에 어린아이처럼 치열을 부르며 냅다 달려간 도아는 손을 내리 잡았다.

그렇게 처소로 들어와 앉았다. 귀인이 되어 처소를 하사받은 후 치열은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무이의 고초가 컸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예, 안 그래도 노심초사 마마 걱정에 한시름도 놓지 못하고 있으니 말하지 못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별거 아닌 일로 걱정을 끼쳐 드릴 순 없습니다.”

어느새 입궐하고 도아는 한 뼘이나 성장한 모습이었다. 

“내명부의 일은 아무리 좌의정이라 할지라도 쉬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비마마께 미운털이 잔뜩 박히셨을 텐데 더욱 조심스러우셨을 것을 압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이번 일로 아셨겠지만, 내명부 안에 마마를 노리는 무리를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대비와 단단히 틀어졌으니 되돌리기 힘들 것이다. 어차피 강의 손을 잡았으니 모두를 가질 수는 없었다.

“예, 입궐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을 아득하니 잊고 지내다가 탈이 난 것입니다. 앞으로는 예의주시하여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와 오라버니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쇼. 저는 잘 있노라 그리 전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해 주겠습니다.”

오라버니란 호칭을 부르는 것만으로 도아는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실과 바늘처럼 떨어지지 않던 오누이 사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혹 전하께서는 아직 마마의 비밀을 모르시옵니까?”

“아…….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대궐 안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마음 놓으세요.”

“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하께서는 주도면밀하신 분이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것보다 이 일이 밝혀지면 어떤 일을 초래할지 부녀는 알 수 없었다. 

“들어가세요, 마마.”

그리하여 치열은 홀로 궐을 나섰다. 가는 내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도아의 전각을 쳐다보았다.

치열한 전쟁터에 딸을 홀로 두고 떠나는 기분이라, 발이 가볍지 않았다. 

* * *

이번에도 그의 목적지는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는 길이 그가 머무는 곳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이를 어미라 믿는 짐승처럼, 인겸은 처음 마음에 담은 은하를 결코 지울 수가 없었다.

소문의 여파가 두려워 시작된 방랑은, 이내 잡을 길 없는 마음을 죽이려 이어지고 있었다.

유유자적 바람처럼 거닐다가 쉬러 들른 작은 주막에 몸을 앉혔다. 국밥을 기다리며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처자식 굶어 죽게 생겼어도, 지도 양반이라고 첩을 들인 꼴을 보고 어찌나 우습던지.”

“쯧쯧……. 당장 곳간이 비었는데 첩을 들였단 말인가?”

“아이, 그렇다니까? 그러면서 임금님도 있는 첩이 자기만 없었다면서 조강지처에게 헛소리를 늘어놓더군.”

“저런, 저런! 임금님하고 지깐 놈하고 같아?”

하도 소리가 커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들어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짐 정리를 하던 인겸의 손이 얼어붙은 듯 자리에 멈췄다. 그가 알기로 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저어……. 임금님께서 후궁을 들이셨습니까?”

“그걸 모르고 있었소?”

“예, 소식을 들을 곳이 없는지라 금시초문입니다.”

“하긴 우리들한테 그런 게 어디 중요한가? 중전마마께서 후사를 낳지 못하셔서 얼마 전에 후궁마마를 셋이나 들이셨소.”

“그랬군. 고맙습니다.”

얘기를 듣고 다시 밥상으로 몸을 틀어 앉힌 인겸은 전해 들은 소식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더는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이래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면서도 은하가 후사를 낳지 못해 후궁을 들였다는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주모가 주고 간 국밥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지 오래였다. 허기를 채우러 들어온 주막이 다시 인겸을 짓눌렀다. 

‘나는 둘러말하는 성격이 되지 못합니다.’

‘오래 봐 왔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첩은 두실 수 없으십니다.’

‘그대가 두라 권해도 그럴 생각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십쇼.’

‘약조하셨습니다.’

‘예, 이것만은 살면서 꼭 지킬 것이니 걱정 마십쇼.’

‘어길 시, 지체 않고 도련님 곁을 떠날 테니 그리 아세요.’

그때와 상황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정혼자로 엮여 혼인할 날만 기다리던 그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 외로이 홀로 앉아 힘들어할 은하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하였다. 

* * *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목욕통에 몸을 담근 청아는 향긋한 꽃잎을 두 손에 담아 올렸다.

“새로 가져온 잎이라 향기가 좋으실 것이옵니다.”

“향긋하니 좋군.”

손에 담았던 잎을 다시 물에 놓아주었다. 잔물결에 잎들이 둥둥 떠밀려 나갔다.

“알아 온 것이 있거든 말해 보게.”

“예, 먼저 가장 수상한 점은 귀인마마가 목욕을 하실 때 물을 다른 처소보다 몇 곱절은 더 쓰신다는 것이옵니다.”

“물을 몇 곱절이나 더 쓴다고?”

“예, 처소나인이 물 항아리에 물을 길어 나르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목욕통이 크다는 말이겠군.”

“그러하옵니다. 사가 시절에 워낙 사치를 부려 좁은 목욕통은 쓸 수 없다 하여 새로 만들어서 들였다고 하옵니다.”

일의 내막을 모르는 청아에겐 그저 고까울 뿐이었다. 연 상궁의 말을 듣고 보니 괜히 제 목욕통이 비좁아 보였다.

“좌상이 딸이 병약하여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고 하더니 안하무인으로 키웠군.”

“그리고 궐 밖에서 가져온 소식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궐 밖의 소식이란 말에 청아는 몸을 돌려서 연 상궁을 마주 보았다. 

“사가에서 지낼 적에 오라비와 절친한 벗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저를 드나들었다고 하옵니다.”

“오……. 그래?”

“예, 오라비란 자와 아주 가까운 벗이었는지 세 사람이 함께 잘 지냈다고 하옵니다.”

“망측하여라. 어찌 양반집 여인이 사내를 가까이한단 말이냐?”

그리 말하면서 청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벗이란 자는 어느 댁 자제라더냐.”

“영의정 대감의 자제라 하옵니다.”

“그래. 뭐라? 영의정 대감?”

“예, 그렇사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청아는 벗의 신분을 듣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까득, 이를 힘주어 깨물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역으로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송구하옵니다.”

“허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데…….”

“앞으로 계속 귀인마마의 주변을 살피라 하올까요?”

“그리하도록 하게.”

말을 마친 청아는 눈을 감은 채 연 상궁의 손에 몸을 맡겼다. 따듯하고 향긋한 물이 몸을 적셔 주었다. 

‘사가에 드나들던 외간 사내라……. 훗, 그 얼굴에 파리 하나 꼬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암담했던 기운이 목욕물에 싹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이 기회를 잘만 살리면 강과 도아의 사이를 벌려 놓을 수 있었다.

* * *

비좁은 목욕통을 덩그러니 쳐다보던 도아는 이내 처소를 나섰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낮과 달리 밤은 선선하기만 했다. 

모래알이 밟히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처소를 나설 때 지고 있던 노을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등불 하나 없이 어둠을 걷다가 누각을 발견하고 위로 올라갔다.

“여기는 좀 낫네.”

도아는 사람의 몸을 갖추고 있었지만 내면에는 인어의 본능이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갑갑한 대궐 생활보다 좁은 목욕통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숨을 크게 마시며 밤공기를 마시자 바다 향기가 묻어나는 듯했다.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선 인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만나야 할 것이다. 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인간들이 그리도 할 수 있겠느냐? 눈이 시뻘게져 팔아넘길 테지.’

‘만일 그런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저주는 그 대에서 끝나고, 그 인어는…….’

뭉글거리는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황금 인어가 남긴 유언이 떠올랐다. 잊고 지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저주가 끝난다?”

인어의 본모습을 알고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답이 서지 않았다.

인간들은 인어의 육신을 취하고 재물을 얻어 종국에는 인어를 멸종시켰다. 과거를 알기에 겪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끝에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황금 인어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창과 화살에 난도질이 된 몸으로 죽어 간 황금 인어를 떠올리자 도아는 마치 자신도 그렇게 될 것 같은 생각에 몸서리쳤다.

그러다 갑자기 느껴지는 다른 무언가에 뒤를 돌았다. 

“귀신인 줄 알았소.”

“…….”

“등불 하나 없이 혼자 뭘 하고 있소?”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말은 뇌를 거치지 않고, 일직선으로 나갔다.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바다?”

“보내 주세요.”

비좁은 대궐을 나가게 해 줄 사람은, 눈앞의 사내뿐이었다. 

“……?”

보내 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바다처럼 깊은 두 눈이 어둠에 지지 않고 강을 맹렬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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