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23)화 (24/93)

제 23 화 불화의 씨앗

새벽안개를 밟고 대전에 당도한 강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앉아만 있었다.

“제조상궁을 들이도록 해라.”

강의 어명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제조상궁이 안으로 들었다. 

“귀인의 처소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그 일을 은밀하게 대전에서 조사하려 한다.”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서 있던 제조상궁이 이내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네가 쉬이 움직일 수 없으니 지밀나인을 동원하여 진상 조사를 하도록 해라. 귀인의 주변만 조사할 것이 아니라 두 숙의에 대해서도 샅샅이 알아보도록 해라.”

“예, 전하.”

“대비전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전하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평안을 지켜 온 소인들이옵니다. 어명에 목숨 바쳐 움직일 것이옵니다.”

제조상궁과 지밀은 강의 측근에 놓인 사람으로 대전의 그늘에 놓여 누구도 쉬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의금부에 잡혀간 나인이 죽기 전에 끝내야 한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만 나가 보라.”

“하오시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임무를 전해 받은 제조상궁이 조용히 물러났다. 오랫동안 대궐 밥을 먹은 사람이니 곳곳에 연줄이 닿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맥을 어찌 활용할지 그것은 오직 제조상궁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귀인마마를 믿으시옵니까?”

“괜한 오해 말아라. 다만,”

“예?”

“귀인은 불만이 있으면 그 성품에 참지 못하고 대놓고 말할 것이다. 뒤에서 그런 음흉한 짓을 꾸밀 사람이 못 되겠지.”

그 말을 듣고 있던 상선이 넌지시 미소를 지었다. 이에 강이 왜 그러냐는 듯 찡그리며 쳐다보자,

“송구하오나 그것이 믿음이 아닐는지요.”

“뭐라?”

“소신이 듣기에는…….”

“헛소리.”

바로 그리 대꾸를 했지만 상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괜히 민망해진 강은 헛기침을 하며 돌아앉았다. 

* * *

길었던 여정을 뒤로하고 부원군이 말 위에서 사뿐히 내렸다. 그는 옷을 툭툭 털면서 환하게 웃으며 뒷짐을 졌다.

지방에서 지냈던 별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으리으리한 사저였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말 그대로 호화스러운 곳이었다.

“흐음! 돌아오니 살 것 같구나.”

숨을 고르던 부원군은 뒤따라온 가마를 향해 한달음에 걸어갔다. 하녀가 가마 문을 올리자 얼른 손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소, 부인.”

부부인이 부원군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부부인은 부원군과 달리 낯빛이 어둡기만 했다.

“들어가시지요.”

“그럽시다.”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던 하인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손님들이 벌써 몇 번이나 다녀가셨습니다.”

“손님이라니?”

안채로 가려던 부부인이 손님이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올라오는 길이었는데 누가 알고 왔다 갔단 말이냐?”

“예? 아, 그것이…….”

“진정하시오, 부인.”

“대감께서 이미 서찰을 돌리신 겁니까?”

“오, 오해 마시오!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돌아온다고 사저를 쓸고 닦고 광을 냈을 텐데 그 소란에 눈치 못 챈 이가 있겠소?”

사실 미리 몇몇 사람들에게 돌아간다고 서찰을 돌렸지만 바로 수긍을 했다간 부부인이 눈에 불을 켤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잘 들어라.”

“예, 부부인 마님.”

“이 댁은 중전마마의 친정 사가로 사사로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허니, 웃전에 고하여 묻지 않고는 누구도 사저로 들이지 말며, 너희들도 안에서든 밖에서든 행실을 바르게 하고, 입을 함부로 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엄히 꾸중하듯 명령을 하니 아랫것들은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모습에 부원군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부원군은 은하를 돕는다는 명목 아래 끊임없이 세력을 넓히고 권력을 쥐려고 들 것이다.

* * *

몸조리를 계속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 나은을 찾아온 청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저리 심약해서 어찌 다음 일을 도모할까?’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 앉았다. 나은은 제법 나아진 얼굴빛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청아를 맞이했다.

“몸은 좀 어떠합니까?”

“그만저만합니다.”

“어제보다 안색이 밝아 보여 다행입니다.”

그 말에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오늘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것입니다.”

“예? 무엇을요?”

“그날 미리 챙겨 먹었던 환과 사과즙을 어찌 처리했는지 듣질 못해서요.”

“아, 아……. 그날 돌아와서 홍 상궁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래요? 홍 상궁 있는가.”

이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청아는 곧바로 홍 상궁을 안으로 불렀다. 

“일전에 내가 시킨 일은 잘 처리했는가?”

“예, 마마의 명대로 처리했사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마음 놓으세요, 김 숙의.”

다시 나은이 묻고, 홍 상궁이 제대로 답하자 청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수고했네.”

“아니옵니다, 다과상을 준비하겠사옵니다.”

다시 밖으로 나온 홍 상궁이 다른 나인에게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리고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자네가 이것을 흔적도 없이 치우시게.’

‘예, 숙의마마.’

이것저것 받아 들고나온 홍 상궁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내가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해야겠느냐.’

‘마마님, 무슨 일이세요?’

‘숙의마마가 이것을 나더러 치우시라는데,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언제 또 이것을 치우고 온단 말이냐.’

‘그러게 말이옵니다. 마마님이 이 처소를 주관하시는데. 소인이 다녀오겠습니다.’

‘응? 네가?’

이 나인은 꽤나 믿을 만한 아이였다. 오랫동안 홍 상궁의 수발을 들며 곁에서 입 안의 혀처럼 굴어 준 아이였다.

“덤벙대는 아이는 아니니 잘했겠지.”

홍 상궁은 아직 나은을 자신의 주인으로 진심을 다해 모시지 않았다. 왕의 승은조차 받지 못하고 먹을 것만 밝히니 가끔 한심하게 보기도 했다.

웃전을 섬기지 않으니, 감히 제 주인이 시킨 일을 귀찮다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 것이다. 

* * *

찬물에 몸을 담그고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도아는 힘없이 늘어진 꼬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목욕통에서 나와 물기를 닦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차려입고 치장하여 밖으로 나갔다. 나인으로 변복하여 가는 것이 안 되면 귀인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금부로 향해 그 앞에 서자 군사들이 묻지도 않고 도아의 앞을 막았다.

“들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내 사람만 보고 갈 것이다. 소란 피울 생각 없으니 물러서라.”

“송구합니다. 대비마마와 전하의 명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얼굴만 보는 것도 안 되겠느냐?”

그들에게 구걸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송구하다는 말뿐이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듯했으나 도아는 앞을 막고 있던 무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귀인마마!”

“안 됩니다! 들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두 명의 군사가 막아 세우려 했으나 도아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다 군사가 도아에게 손대려 하자 눈을 매섭게 떴다.

“내 몸에 손대면 무사할 것 같으냐?”

“…….”

“전하께서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매서운 호통에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도아는 의금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찢어지는 비명에 걸음이 멈추었다.

“으아아아악!”

죽어 나갈 듯 외치는 비명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인 듯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도아는 홀린 듯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추국장 형틀에 앉혀져 고문을 당하고 있는 무이가 보였다.

“무이야…….”

그 순간 비명을 지르던 무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떨군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핏 보이는 옷가지는 피로 물들어 붉은 옷을 입은 듯했다. 바닥에는 피가 낭자하여 물이 고인 듯 피가 고여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말문이 막혀 손이 떨려 왔다. 저대로 두면 죽겠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허공에 벌벌 떠는 손을 뻗으려는데 일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보지 마시오.”

무이의 참담한 모습에 넋이 나가 버린 도아는 눈이 가려진 채 서 있다가 이윽고 거센 힘에 돌려세워졌다.

“누가 귀인을 이따위 곳에 출입시켰느냐!”

가려졌던 손이 치워지니 불길이 솟을 듯 화가 난 강이 보였다. 그는 주변에 널린 군사들을 죽일 듯 소리를 질렀다.

‘무이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해.’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무이를 의금부에 둘 수 없다는 마음만이 들었다. 도아가 다시 돌아서려 하자 강이 양어깨를 꽉 잡았다. 

그제야 도아는 온전치 못한 시선으로 강을 마주 보았다.

“처소에 묶어 둬야 얌전히 있을 것이오?”

“…….”

“대체 어쩌자고 의금부를 찾아온 것이오!”

금방이라도 영혼이 흩어질 것 같은 도아에게 강은 자비 없이 언성을 높였다.

“과인이 그대 때문에 미쳐 날뛰는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소?”

“…….”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신 의금부에 걸음하지 마시오.”

도아를 집어삼킬 듯 화를 내던 강은 이내 손을 잡고, 의금부를 빠져나왔다. 끌려 나오듯 나오던 도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손길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강이 다시 화를 내려는데 도아가 두 손으로 강의 손을 감싸 잡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전하.”

오만하게 콧대를 세우던 여인이라 생각했다. 제게 순종하지 않으니 방자하다고 여기며 언젠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겠노라 여겼다.

그런 여인이, 쓰러질 듯 가녀린 몸으로 눈물을 머금고 간곡히 청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 하시면 꿇겠습니다.”

“이봐, 귀인.”

“뭐든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허공을 머금은 두 눈이 강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무릎을 굽히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이에 강은 황급히 손을 뻗어서 도아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

“바닥에 그 피가…… 모두…… 그 아이의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나간 듯 허공에 대고 말하던 도아는 눈앞의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땅은 하늘이 되고, 하늘은 땅이 되었다. 버럭버럭 화를 내던 강의 모습도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귀인마마!”

이내 정신을 잃고 혼절한 도아가 고꾸라지자 주변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

도아를 우악스럽게 잡고 있던 강은 제 품으로 쓰러진 도아를 잡은 채 깊은 한숨을 뱉었다.

꽃 한 송이를 옮겨 놓은 듯 말갛던 얼굴이,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꽃이 되어 강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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