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화 불화의 씨앗
그을린 어둠 속에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나인은 다름 아닌 도아였다. 붙잡은 쪽도 붙잡힌 쪽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도아는 강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힘주어 꽉 잡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
“이 꼴로 어딜 가고 있었소?”
“의금부요.”
망설이던 도아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강은 다시 깊은 화를 삼키며 한숨을 뱉었다.
“궁녀로 변복하고, 끌려간 나인을 만나려고 했단 말이오?”
“예, 송구합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말은 잘한다. 강은 꽉 잡고 있던 도아의 손목을 신경질을 내며 놓아주었다.
“태어나 지금껏 한시도 곁에서 떨어뜨린 적 없는 아이입니다. 남들 눈에는 노비에 불과했으나 피를 나눈 자매처럼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쩌고 있는지 봐야 할 것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이것뿐이라 이리했습니다.”
강은 모를 것이다. 지금 도아가 얼마나 눈물을 참고, 한 마디씩 눌러서 말하고 있는지. 그는 절대 모를 테다.
“못 본 것으로 해 주세요, 전하.”
“그게 될 것 같소?”
“부탁입니다. 조용히 가서 얼굴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이보시오, 귀인.”
“제발…… 못 본 척, 해 주세요.”
나지막이 읊조린 말은 간곡한, 애절한 청이었다. 달 아래 선 도아는 고개를 들어 강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옷가지며 장신구를 모두 내던지고 단출한 궁녀 차림이었지만 무엇도 도아를 가릴 순 없었다.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소.”
“전하.”
“상선 있느냐.”
저만큼 있던 상선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러다 강의 앞에 서 있는 궁녀가 도아란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오늘 귀인의 처소에서 침수 들 것이다.”
“예……. 예?”
“그리 이르도록 해라.”
“예, 전하.”
상선에게 어명을 내린 강이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도아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게 좋을 것이오.”
“…….”
“알아보면 낭패일 것이니.”
말을 마친 강은 화가 난 도아를 둔 채 먼저 발길을 돌렸다.
* * *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조용한 도화군의 사저에는 선이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새근거리며 잠든 선이를 바라보던 도화군은 새삼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선이가 서방님의 품만 찾으니 큰일입니다.”
“괜찮습니다. 항시 곁에 있을 것인데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응석만 부릴까 봐 그렇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군부인은 행복한 듯 활짝 웃으며 잠든 선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잠든 선이를 뒤로하고, 뜰로 나와 손을 잡은 채 산책을 했다.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것 같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자라 있어서 신기하긴 합니다.”
“나는……. 난 말입니다.”
도화군이 좀처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우리 선이가, 종친이라는 굴레에 갇혀 나처럼 살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서방님.”
“출타하는 일마저 눈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대신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를 갖는 대신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선이에게 결코 독이 되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 마세요.”
언제나처럼 군부인은 따듯한 마음으로 도화군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부인.”
“예, 말씀하세요.”
“저 멀리, 아주 멀리……. 시골에 가서 살자고 하면 나를 버릴 겁니까?”
대비 조 씨가 펼쳐 놓은 감시망은 언제나 도화군을 옥좼다. 도화군은 대비 조 씨에게 눈에 보여서도, 안 보여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버리다니,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다.”
“함께 가 줄 것입니까?”
“서방님이 계시는 곳이, 곧 소첩이 있을 곳입니다.”
“…….”
“시골로 내려가고 싶으십니까?”
물음에 도화군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서 달을 바라보았다.
“소첩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어진 처를 얻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아셨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다정하게 말하며 도화군이 군부인을 품으로 끌어 와 안아 주었다. 대비 조 씨가 가장 잘한 일은 두 사람을 맺어 준 일이었다.
도화군도 내내 그것만은 가슴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뜻은 아닐지언정 천생연분이 연을 맺게 되었다.
* * *
제 발로 걸어오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강에게 끌려온 것이나 다름없는 도아는 처소에 들어와 반 시진째 대치 중이었다.
그가 도아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는 말의 저의를 알고 있었다. 도아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난 도아는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계속 그 복장으로 그러고 있을 것이오?”
“…….”
“누가 보면 과인이 나인에게 승은이라도 내리는 줄 알겠소.”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과인이 가면 그 꼴로 의금부에 가려고?”
그걸 말이라고? 도아는 맞는 말에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지켜보던 강은 고개를 저으며 걸치고 있던 야장의를 벗었다.
“대궐 법도를 아무리 모르는 여인이라도 그대처럼 굴진 않을 것이오.”
강은 금침으로 건너가 이불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도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혼자 씩씩거리던 강이 고개를 돌려 요지부동인 도아를 쳐다보았다.
“누누이 말했지만, 그대의 고집은 대체 누굴 닮은 것이오?”
“…….”
“부친이오? 모친이오?”
“…….”
“이젠 말도 섞지 않을 작정이군.”
혼자 중얼거리던 강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도아는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강을 물끄러미 보다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냉혈한.”
작게 읊조렸으나 아직 잠들지 않은 강의 귀에 가만히 담겼다.
깊은 새벽, 불편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강이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벽에 기대어 잠든 도아가 보였다.
‘대단하군, 정말이지.’
그 고집불통이 대단했다. 여전히 나인 복장으로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니,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 그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꽤 깊이 잠든 것인지 도아는 깨지 않았다.
“영명한 귀인이 어찌 그리 어리석소?”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이 일이 발각되면, 대비는 나인을 즉시 죽였을 것이오.”
가뜩이나 도아에게 감정이 좋지 않으니 이 일을 빌미로 무이의 목을 쳤을 것이다. 강이 발을 묶은 연유는 거기에 있었다.
가엾이 앉아서 잠든 도아를 쳐다보던 강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국 강은 밤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 버렸다. 문을 열고 나가자 저만치 졸고 있던 상선이 놀라 달려왔다.
“가자.”
강은 한 마디를 남기고, 처소를 등지고 가 버렸다.
* * *
자경전을 찾은 은하는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명부의 일이었으나 은하가 나설 수 없었다.
대비 조 씨가 수장을 맡고자 나섰으니 며느리 입장에서 감히 나설 수 없어 뒤로 물러난 꼴이 되었다.
“의금부에 잡혀간 나인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렇다더군요.”
대비 조 씨는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의연하게 차를 당겨 마셨다.
“친정에서 데려온 노비이니 쉬이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송구하오나 그 나인이 충정을 떠나 진실을 두고, 실토할 것이 없을 수도 있사옵니다.”
“흠…….”
“죽고 죽이는 쪽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상 어느 쪽도 믿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어쩌면 두 숙의가 목숨을 걸고, 귀인을 음해하려 했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 말에 대비 조 씨가 언짢아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반응은 예상외였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마저 지었다.
“물론입니다. 두 숙의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숙의의 측근들도 의금부로 압송하여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사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대비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더 크게 웃었다. 이에 은하가 의아하여 얼굴빛을 굳혔다.
“미안합니다. 내 중전을 조롱하려 웃는 것이 아닙니다.”
대비는 그리 말하며 얼굴 속에서 미소를 정리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을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기회로 삼으시다니요?”
“부친과 가문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귀인의 작태를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하오나 귀인은…….”
“후궁 간택에서 보질 않았습니까? 내게 불손하게 굴기 위해 어떠한 말을 꺼내 들었는지. 잊지 않고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습니다.”
이런 식의 보복은 반칙이었다. 전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꺼내 들어 도아를 무릎 꿇게 할 작정이었다.
“친정에서 데려온 아이를 꽤나 아끼던 눈치였습니다.”
“어마마마…….”
“내 그 아이를 손수 만신창이로 만들어 본보기로 삼으려 합니다.”
입가에 살기로 가득한 미소가 올라왔다. 대비 조 씨의 눈앞으로 치열의 일그러질 얼굴이 그려졌다.
“어디까지, 얼마나 버틸지 두고 봅시다.”
대궐에서 괴로움에 물들어 시들어 가는 자식을 보며 그가 무릎 꿇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