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21)화 (22/93)

제 21 화 불화의 씨앗

나은의 처소를 등지고 나서는 도아의 얼굴에 살벌한 화마가 가득했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나서는 길이었다.

치맛자락을 질끈 잡은 두 손에 힘이 실렸다. 밖으로 나오자 저만치 나은을 보러 걸어오는 청아가 보였다.

“귀인마마.”

“두 사람 사이가 돈독하긴 한 모양일세. 이렇듯 새벽부터 병문안을 온 것을 보니.”

“예, 어제 숨넘어가게 괴로워하던 모습이 눈에 밟혀 일찍 찾아왔사옵니다.”

“그리 돈독하여, 같은 길을 가는 것인가?”

도아가 그리 말하며 활짝 웃었다. 햇살을 받은 미소는 두 눈을 멀게 할 듯 아름다웠으나 살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무슨 말씀을…….”

“두 숙의가 나란히 같은 길을 가겠다니 내 말리진 않겠네.”

“…….”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은 치우게.”

이미 두 사람이 도아에게 올가미를 씌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는 전과 같이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얼굴은 전하께나 흘리시게.”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계속 그렇게 그 가면 속에 사시게. 그래야 전하께서 눈짓 한 번이라도 주실 테니.”

“마마!”

도아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청아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부들부들 떠는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며 지나쳤다. 

* * *

의금부에 끌려온 무이는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무자비함과 열악한 환경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비록 노비로 태어나 지금껏 일만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상전이었던 도아는 단 한 번도 짐승 취급하지 않고 아껴 주었다.

이 때문에 의금부에서 겪는 모든 일이 무이에게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 지키고 서 있는 관군들과 함께 갇힌 죄수들은 험악했다.

‘그래도 우리 아기씨가 끌려오시지 않아 다행이야. 이런 무뢰배들이 있는 곳에…….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네.’

그때였다. 군사들이 감옥으로 들어와서 다시 짐짝처럼 무이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사,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들은 무이의 외침에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끌려온 곳은 추국장으로 곧장 형틀에 앉혀져 묶였다.

손발이 달달 떨리고, 두려움에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딱딱한 얼굴의 의금부도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무이의 뺨을 내려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두렵겠지. 지체 높은 자들도 형틀에 앉혀지면 절로 사지가 덜덜 떨리는 법이다.”

“……사, 살려 주세요.”

“누가 널 죽인다고 했느냐?”

“…….”

“내가 묻는 말에 진실만을 말하면 되느니라.”

의금부도사는 그리 말하며 무이가 예상했던 질문을 뱉었다.

“누가 네게 안 숙의마마의 차에 사과를 넣으라고 지시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그런 명을 내린 적 없습니다. 그 차에는 절대 사과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런……. 이러면 대화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로 물러났고, 관군 두 명이 기다란 막대기를 가져와 무이의 다리 사이에 꽂았다.

“주리를 틀어라.”

마침내 명이 떨어지자 관군들이 무이의 가랑이에 넣었던 기다란 막대기로 주리를 틀었다.

“으…… 으악!”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입이 찢어져라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아래쪽 감각이 무뎌졌다.

생살이 막대기에 짓눌려 허벅지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소복은 어느새 피로 물들어 붉은 옷가지가 되었다.

“멈춰라.”

“으…… 으으…….”

“이제 진실을 말하겠느냐?”

이 사람은 애초에 진실의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무이가 그 답을 하도록 유도 심문을 했다.

“누가 지시했느냐? 네가 그것을 말하면, 목숨 부지하여 이곳을 나갈 수 있다.”

“없습니다. 정말……. 아무도 제게 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아직 기력이 남아도는 모양이구나.”

“정말입니다. 흑……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진실을 말할 것이냐?”

그 물음에 무이는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것이 없었다.

“이 흙바닥이 네 피로 강을 이루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

“뭐 하느냐? 어서 주리를 틀어라.”

결국 가엾은 무이는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모진 고문을 감당해야 했다. 그사이 몇 번을 혼절하고, 물세례로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나인이 죽으면 어찌합니까?”

쉴 새 없이 주리를 틀던 관군이 무이가 다시 정신을 잃자 걱정스레 물었다.

“대비마마께서 죽여도 좋다고 하셨다.”

“예?”

“진실만 받아 내라고 하셨으니 걱정할 것 없다. 가서 냉수나 떠 오거라.”

“아, 아……. 예.”

이미 대비 조 씨는 의금부도사에게 무이가 죽어도 좋으니 진실만 받아 내라는 가혹한 명을 내려 놓았다.

그들의 줄다리기에 무이가 희생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 * *

먼지가 깃들 듯 어둡기만 한 구름 아래로 치열이 서 있었다. 그는 대비의 부름으로 자경전으로 가고 있었다. 

그 부름의 의미를 알기에 자경전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에 무게가 실렸다. 

“대비마마를 뵙니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처소에 든 치열은 대비 조 씨를 향해 절을 올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좌상.”

“예,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대비마마께 소홀해졌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귀인이 입궐하기 전에는 간이고 쓸개고 모두 이 사람에게 내줄 것처럼 구시더니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겁니까?”

간과 쓸개를 내줄 만큼 절박하게 매달렸던 것은 도아를 후궁 간택에서 제외해 달라는 조건을 붙였을 때 얘기였다. 

“소신이 피붙이인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대비마마께 감히 경솔하게 굴었사옵니다.”

“그때와 지금의 마음이 다르다는 뜻입니까?”

“망극하옵게도 그렇사옵니다.”

“좌상이 지금 이 사람과 농을 주고받자는 겁니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겠나이까. 그저 귀인마마가 입궐했으니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소신의 뜻이옵니다.”

결국은 두 사람의 동맹은 결렬되었다는 말이었다. 대비 조 씨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터라 큰 분노는 없었다.

“좌상이 꽤 현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착각이었나 봅니다.”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저 행동으로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치열을 쳐다보던 대비 조 씨는 어금니를 꽉 물고 미소를 지었다. 

“들어서 알 겁니다. 귀인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요.”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내 그 일을 두고 좌상과 상의하려고 부른 것인데 그것도 알고 있습니까?”

오늘 치열의 행동이 도아에게 앞으로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치열은 말을 무를 수 없었다.

“소신이 어찌 감히 내명부의 일에 관여하겠나이까.”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내명부의 일에 손가락 하나 얹을 수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만 물러가도 좋습니다, 좌상.”

“예, 허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대비마마.”

예의를 차리고 자리를 떠나는 치열을 묵묵히 지켜보던 대비 조 씨가 싸늘하게 웃었다.

“본래 부모의 업은 자식이 받는 법이지.”

* * *

궐에서 가장 높게 지어진 누각에 오른 강은 한참 동안 먼발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곳은 강이 사심에 잠길 때마다 찾는 곳이었다. 한번 찾으면 몇 시진은 꼼짝없이 자리를 지켰다. 

‘분간이 서지 않는 상황에,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십니다.’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 속에 도아의 날카로운 말들이 날아들었다. 

‘소첩의 불행이, 전하께 기쁨이 되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 용안에 내내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아…….’

‘전하께 쉬이 기쁨을 드리진 않을 것이니 기대하지 마십쇼.’

강의 곁에 머물던 바람이 사라지듯 이내 도아가 남긴 말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별스럽게 잊히질 않네.’

해가 지고 찾아온 어둠은 달을 돋보이게 했다.

“전하.”

“무슨 일이냐.”

“바다에 보내셨던 군사들이 돌아왔사옵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강이 바다에 보낸 군사 얘기에 서둘러 뒤를 돌았다.

“뭐라더냐?”

“망극하오나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다고 하옵니다.”

“다시 돌아가 살피라 해라.”

“예? 바다로 다시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다시 돌아가 샅샅이 살피라 해라.”

벌써 몇 년째인지 횟수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바다에 든 물을 모조리 빼라 어명을 내리면 어떨 것 같으냐?”

“예? 지…… 진정…… 그러실 것이옵니까?”

상선이 사색이 되어 더듬으며 되묻자 강은 피식 하고 조소를 띠었다.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사람이니 걱정 마라.”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물러가 있어라.”

“예, 전하.”

물러가라는 어명에 상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누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돌아선 강은 먼발치의 닿지도 않을 허공을 눈길로 쓸어 만졌다.

“그만할 때도 되었지. 지긋지긋하단 말이 나올 만도 하지.”

혼잣말이 어둠을 휘저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

그렇다고 다시 인어를 찾아서 무언가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말 그대로 강은 인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어쩌면 소유욕에서 비롯된 마음일 수도 있었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인어의 존재는 강의 마음을 밀고 들어왔다. 

인연이란 것이 얄궂기도 했다. 이토록 강한 열망으로 재회를 기다리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미 그 인연이, 곁에 있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 *

해가 질 무렵 누각에 올랐던 강은 꽤 늦은 시간이 되어 내려왔다. 

무심한 듯 누각을 내려가고 있을 때 저만치 행동이 수상해 보이는 궁녀가 보였다. 

“쉿.”

강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손을 들어서 저지시키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새앙머리를 한 나인은 종종걸음으로 주변을 의식하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마 누각에 있던 강에게 발각된 걸 모르는 듯했다.

순식간에 강은 나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인을 당기자 무방비 상태였던 나인이 힘없이 끌려왔다.

“……!”

까만 어둠 속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인?”

강은 믿기지 않는 듯 나인을 훑어보았다. 이런 얼굴을 가진 여인은, 대궐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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