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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18)화 (19/93)

제 18 화 불화의 씨앗

다시 외딴 사저로 돌아온 부원군 내외는 먼 길을 오가며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에 고단함이 가득했다.

사랑채에 들어서자마자 부원군은 쓰고 있던 갓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중전마마께서 이러실 수 있는 것이오?”

“그러니 가지 말자고 하질 않았습니까.”

“국혼을 치르고, 근 2년 만에 처음 뵙는 자리였소. 그런데 그런 부모를 문전박대한 것이오!”

“마마께서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러신 겁니다. 전하께서 외척 세력을 경계하시니 그러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부원군은 자신이 한 짓은 잊고, 모든 잘못을 은하에게 몰고 갔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마께서 너무하셨소.”

“그만하세요, 대감.”

“안 되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양으로 돌아가야겠소.”

대궐에서 한 말은 그저 으름장을 놓으려는 빈말일 뿐이라 생각했다.

“이러다간 모두에게 잊히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마마의 허락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으니 모두가 마마를 무시해 후궁 간택을 치른 것이오!”

“후궁 간택은 대비마마의 뜻이었다질 않습니까.”

“대비마마도 그렇소.”

부부인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나뒹굴던 갓을 집어 들었다. 

“중전마마와 척을 지게 될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처음에는 마마께서도 언짢아하실 테지만 훗날 이 아비를 이해를 하실 것이오.”

“대감!”

“내 이렇게 살려고 그 집안과 정혼을 깨고, 마마를 대궐로 시집보낸 것이 아니오!”

“대감의 야심에 우리 마마가 희생된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대감의 강요로 우리 마마께서 얼마나 상심했는지 그새 잊으셨습니까? 제발 경거망동 말고, 자중하세요!”

속에만 담아 두고 하지 못했던 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부부인의 말에 부원군의 입이 합죽이가 됐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자중하세요. 대감.”

말을 마친 부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을 일며 나가 버렸다. 

* * *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난 시현은 말끔하게 소세를 하고, 도포를 차려입었다. 별채에서 서책을 보다가 집을 나섰다. 

서책을 보다가 집에 도진이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은 이내 집을 나섰다.

도아가 입궐하고 한동안 찾지 않아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았다. 도진을 보러 사저 안으로 들어가자 하인이 다가왔다.

“시현 도련님 오셨습니까?”

“안에 있는가?”

“서고에 다녀오신다며 출타를 하셨습니다. 오래 걸리시진 않을 겁니다.”

“흠, 그럼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네.”

“예, 도련님.”

꽤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곳이라 이 집 하인들에게도 시현은 익숙한 인물이었다. 

저벅저벅 뒷짐을 지고 별채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주인 없는 별당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시현은 도아가 쓰던 별당의 문을 열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 번도 들어온 적은 없었지만, 이곳에 항상 도아가 있었다.

가끔 이 앞을 지날 때면 도아는 차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고는 했었다. 이젠 그리운 모습이 되어 쓴웃음이 나왔다.

다시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저만치 작은 문이 만들어진 공간이 보였다. 아마 화원으로 쓰던 곳일 것이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 공간과 다른 세상이 드러났다. 작은 숲을 일군 채 꽃과 풀이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저만치 끝에 맑은 물을 끌어안은 호수가 보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시현은 화원에 어우러져 있었을 도아를 떠올렸다.

“뭐지?”

물에 넘실거리며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마치 보석인 듯 반짝거렸다.

시현은 물속에 손을 넣어서 반짝거리던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물을 털어 내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잉어 비늘인가?”

그러나 잉어 비늘이라기에는 크기가 크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잉어는 보이지 않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이때는 비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호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시현은 이내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비늘을 감쌌다.

아마 이 비늘이, 인어의 것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 *

대전으로 돌아온 강은 도아에게 졌다는 사실에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스무 발을 쏘고 손이 벌게져도 흔들리지 않는 도아였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드세단 말이냐?”

“활을 다루시는 솜씨가 대단하셨사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말하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적당히 선을 보아 물러날 줄 알아야지.”

적당히 할 줄 알았지만 스무 발을 쏘고도 도아는 멀쩡했다. 단지, 손가락이 붉어졌을 뿐이었다.

“괜히 그 손을 봐서…….”

“예?”

“됐다. 황소고집인 좌상을 닮아 그 모양인 것을 어쩌겠느냐.”

“…….”

“나가 봐라.”

괜히 욕만 먹은 상선이 울상을 하고 나갔다.

“두고 봐라. 내 그 성미를 붙들고 말 테니.”

이제는 오기가 생기려고 했다. 다른 여인들처럼 순종하고, 순명하여 사내의 뜻을 받들지 않는 도아의 태도에 신선함이 느껴졌다.

* * *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청아와 나은 사이에 붉게 잘 익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탐스럽게 익은 사과를 구경하듯 전시해 놓았다.

그런 사과를 쳐다보는 나은의 얼굴이 퍽 난처해 보였다. 그와 반대로 청아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먼저 말하기 민망하지만 대궐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을 하겠습니다.”

“예? 무엇을 말인지요?”

“아직 전하를 뵙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입궐해서 아직 강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승은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강이 밤에 청아를 찾아온 일로 암암리에 승은을 입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진실은 달랐지만 이로써 나은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만일의 하나라도, 대비마마께서 후사를 잇기 위해 들인 후궁이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한다고 여기시면 내쳐지는 겁니다. 안 숙의.”

“내, 내쳐지다니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려고요.”

“부친에게 대궐이 어떤 곳인지 충분히 들었을 겁니다.”

알고 있었다. 대궐은 쓰일 곳이 없는 사람은 필요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러했다.

“이대로 궐서 쫓겨나게 된다면 왕의 승은을 입지 못했다고 웃음거리가 될 것은 분명하고, 가문에 막대한 해가 될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일그러진 나은을 청아는 즐겁다는 듯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던 나은의 머릿속에 간택을 하루 앞두고 찾아온 도총관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우리 가문은 대제학 가문과 한 배를 탔다.’

‘예? 그럼 소녀가 무엇을 어찌하면 되는 것입니까?’

‘대제학의 여식이 꽤나 총명하여 믿고 따르기에 그만이라 하더구나. 그러니 입궐하여 길이 막히거든 그의 여식을 따르도록 해라.’

‘무슨 일이라도…… 말입니까?’

‘그래. 한 배를 탔으니 한길을 가야 한다.’

도총관은 나은의 머리가 총명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여 입궐 전부터 세뇌하듯 나은에게 해 놓은 말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청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어찌하면 될지 일러 주세요, 김 숙의.”

“잘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서로 돕고,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예…….”

“한길을 가게 되었으니 오늘이 뜻깊은 날입니다.”

활짝 웃는 청아의 얼굴에 악함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잘 듣거라.’

‘예, 말씀하세요. 아버지.’

‘도총관의 가문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 쪽이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했습니다. 굳이 제 손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소녀 명심하겠습니다.’

대제학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 보던 청아는 좀 더 입꼬리를 들어 올려 환하게 웃었다.

* * *

문안 인사를 다녀와 처소에서 쉬고 있을 때 고요한 평화를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와 나은이 나란히 찾아온 것이다. 

“두 숙의가 나란히 어인 일이신가.”

“후원을 거닐다가 귀인마마의 처소가 보이기에 결례인 줄 알면서도 들었사옵니다.”

청아는 그리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입궐 이후 처음이었다.

“아니네, 귀한 걸음을 해 주었으니 대접을 해야지. 가서 다과를 내오도록 해라.”

“예, 귀인마마.”

곁에 있던 무이가 밖으로 나갔다. 

“며칠 전에 전하와 활쏘기로 경합을 벌이셨다는 얘기를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것까지야…….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고작 그것뿐인 것일세.”

“고작이라니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첩들에게도 보여 주십쇼.”

“그리하지.”

사이가 가깝지 않아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려던 차에 무이가 들었다.

아기자기하게 차려진 세 개의 다과상이 주인 앞에 내려졌다. 

“들도록 하게.”

“예, 잘 먹겠습니다. 귀인마마.”

그리 말하며 나은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약과가 아니라 차였다. 은은한 향기가 처소를 맴돌 만큼 좋은 찻잎이었다. 

“자네들은 처소에서 주로 무얼 하는가?”

“소첩은 사가에 있을 때부터 자수와 서예를 즐겨 했기에 그것을 하고 있사옵니다.”

“부럽네, 나는 손재주가 뛰어나질 않아 손만 대면 망가뜨린다네.”

“참으로 겸손하시옵니다. 귀인마마께서 못하시는 것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도아는 있는 그대로 말했지만, 청아는 곧이듣지 않았다. 도아가 민망하여 손을 젓다가 기침을 하는 나은을 보았다. 

“자네 고뿔에 든 것인가?”

“예? 아니, 그런 것이 아닌데……. 왜 갑자기, 기침이……쿨럭!”

“괜찮은가?”

“그게……. 갑자기 왜 이러는지……모르겠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옆에서 약과를 집어 먹던 나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괴로워했다.

“안 숙의, 괜찮습니까?”

“숨이…… 숨이, 막힙니다.”

“귀인마마! 어의를 부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밖에 무이 있느냐!”

상황이 심각해지자 도아가 서둘러 무이를 불렀다. 

“당장 가서 어의를 불러오도록 해라! 어서!”

그렇게 서둘러 무이를 어의에게 보내고 돌아서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은이 보였다.

“안 숙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가?”

“소첩도 모르겠습니다.”

도아가 가운데 있던 다과상을 옆으로 밀고 나은에게 다가왔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던 나은이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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