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가르쳐 주기 전에 시범을 보여 달라는 말에 도아는 능숙하게 화살을 집어 들고, 앞으로 나갔다. 과녁은 꽤 먼 거리에 놓여 있었다.
시위를 끝까지 당겨 과녁을 노려보고 있을 때,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도아는 습관처럼 낯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과녁을 돌렸다.
화살을 지탱한 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긴 채 돌아서자, 강이 서 있었다.
“날 죽일 것이오?”
화살을 엉성하게 잡았더라면 실수를 했겠지만 도아는 능숙하여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강을 보고도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시위를 자리로 돌려놓았다.
“전하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중전이 궁도장에 있으시다기에 의아하여 와 본 것이오.”
“예, 귀인에게 궁도를 배우기로 했사옵니다.”
“아…….”
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저만치 앞에 서 있는 도아를 쳐다봤다. 애써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귀인은 과인이 보이지 않는가?”
“전하를 뵈옵니다.”
“엎드려 절 받기군.”
강의 반응에 도아가 정색을 하려 했으나 옆에 은하가 보여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중전이 시위를 당길 수는 있겠소?”
“그렇게 어려운 것이옵니까?”
“여인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그럴 수 있소.”
“그럼 귀인이 대단한 것이옵니다. 어릴 때부터 궁도를 가까이했다고 하옵니다.”
“병약했다더니 그런 힘은 어디서 났을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도아는 저벅저벅 부부 앞에 가까이 섰다.
“마침 귀인이 시범을 보이려던 참이었으니 보고 가시지요.”
“어디 그럼 얼마나 잘하는지 잠시 보고 가겠소.”
“예, 전하. 귀인, 계속하시게.”
부담을 주는 말이었지만 도아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보란 듯이 강을 쳐다보며 자리로 가 섰다.
다시 시위를 끝까지 당기고, 과녁을 응시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시위를 놨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정확히 정중앙에 꽂혔다.
“명중이오!”
관군이 깃발을 흔들자 은하는 박수를 쳐 주었다.
“참으로 대단하네. 귀인!”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귀인의 솜씨가 참으로 대단하옵니다, 전하.”
“과찬이시옵니다.”
도아는 손에 활을 들고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강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과인과 한번 겨뤄 보겠소?”
“소첩은 또 마다하질 않는 성정이라.”
“좋소.”
갑자기 시합이라니, 가운데 있던 은하가 당황하여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뭐랄까, 후궁과 왕의 관계라기보다는 이상한 구도가 설정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과녁이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 승부에는 무언가 걸려 있어야 승부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주 자신만만이군. 그래서 귀인은 무얼 걸겠소?”
“소첩을 전적으로 믿겠다는 전하의 약조를 주십쇼.”
“하?”
상선이 가져온 활을 만지작거리던 강이 도아가 승부에 걸고자 하는 것에 황당하여 입을 벌렸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과인을 향한 복종.”
“…….”
“이제라도 자신 없으면 물러도 되오.”
그는 화살에 활을 끼워 이리저리 돌리며 각을 재고 있었다.
“좋습니다.”
“화통해서 좋소.”
“내기는 열 발이 어떠십니까?”
“열 발을 온전히 쏠 수는 있겠소?”
“50발 100발도 거뜬합니다.”
말을 마친 도아도 자리로 돌아가 화살을 골랐다. 열 발로 승부를 보려면 잡생각 없이 집중이 필요했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게, 귀인.”
“예, 걱정 마시옵소서. 중전마마.”
걱정하는 은하를 뒤로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과녁이 보이는 곳 앞에 섰다. 거리는 꽤 멀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만만했다.
“먼저 하시오.”
“연습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먼저 하라 손짓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에 도아가 먼저 앞섰다.
첫발은 두 사람 모두 깔끔하게 명중시켰다. 그리고 남은 아홉 발도 모두 똑같이 명중시켰다.
그렇게 다시 열 발이 주어졌다. 두 사람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말없이 시합에 열중했다.
궁도장 안에는 화살이 날아가 꽂히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지막 열아홉 발째.
어느새 시위를 당기는 도아의 손가락이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그것이 강의 눈에 들어왔다.
‘좌상이 저 정도로 황소고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도 같은 곳, 정중앙에 날아가 꽂혔다.
“당장 전쟁에 나가도 되겠소.”
“사내였다면 가장 앞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겠지. 이 실력, 그 성정에 뭔들 못 했을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리고 강이 활을 들었다. 힘껏 시위를 당기는데 조금 전 빨갛게 올라와 있던 도아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집중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 결과는 참담하게 나오곤 했다.
“살짝 빗나가셨습니다.”
“알고 있소.”
강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필 그 순간에, 그런 게 생각날 게 뭐람.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기억하고 있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되오.”
“망극하옵니다.”
“중전, 과인은 이만 가 보겠소.”
눈으로는 도아를 노려보며 입으로는 은하를 향해 말했다.
“또 봅시다, 귀인.”
“영광일 것입니다, 전하.”
도아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강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 * *
궁도장에서 막 돌아가고 있을 때 교태전 나인이 급히 달려왔다.
“마마, 중전마마.”
“어찌 그러는가?”
“부원군께서 부부인마님과 입궐하셨다는 전갈이옵니다.”
모두가 이토록 놀라는 까닭은 부원군과 부부인은 은하가 대궐로 시집온 이후 단 한 번도 입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오고 가는 서신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입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부원군과 부부인이 교태전에 당도하여 처소에 들게 되었다.
“기별도 주지 않으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참으로 듣기에 서운하옵니다. 얼마 만의 만남인데 그리 말씀을 하시옵니까?”
“예는 사가가 아니라 대궐이옵니다, 아버지.”
“알고 있사옵니다. 마마께서 교태전에 듭시고, 난생처음 구경하는 곳이라 넋을 놓고 구경 중이었사옵니다.”
부원군이 뻔뻔하게 나오려 하자 은하의 시선이 옆에 앉아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부부인에게 향했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어머니.”
“기별을 드렸더라면 아마 오지 말라고 하셨을 겁니다, 마마.”
“아버지.”
“예, 제가 마마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문전박대를 하시옵니까?”
“대감, 마마께 언사를 가려서 하셔야지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부부인이 조용히, 무겁게 말하자 부원군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전하께서 후궁을 새로 들이셨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온 겁니다. 마마께서 괜찮으신지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사옵니다.”
“정말 제가 괜찮은지 보러 오신 게 맞으십니까?”
“중전마마.”
대화의 창을 닫았던 세월이 있었다. 부원군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입궐한 후궁들과도 잘 지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옵니다.”
무미건조한 답을 내놓은 은하는 조용히 고개를 틀었다.
“아직도 이 아비를 원망하십니까?”
“대감!”
“중전마마.”
고개를 틀고 있던 은하는 부원군의 물음에 시선을 마주했다.
“평생을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답변을 예상치 못했기에 부원군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머니.”
“예, 기별도 드리지 않고 민폐만 끼치다가 가옵니다. 마마.”
“아닙니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세요.”
“예, 중전마마.”
다과상이 들어오기도 전에 은하는 부모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결국 뜻을 알아차린 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부원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예, 살펴 가세요. 어머니.”
그렇게 조용히 가는가 싶더니 부원군이 자리에 멈췄다.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드립니다.”
“…….”
“기회를 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려 하옵니다.”
“…….”
“물러가옵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던진 부원군이 저벅저벅, 홀로 처소를 나가 버렸다.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예, 가 보세요.”
부부인이 부원군의 뒤를 따라 나가자 은하는 한숨을 뱉었다.
“누가 반긴다고 오십니까.”
만약 그 말대로 부원군이 돌아온다면 외척 세력이 강해지는 꼴이니 강이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볼 리 없었다.
* * *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은 시현은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고, 사랑채로 향했다. 부친에게 따귀를 맞고, 처음 보는 자리였다.
난을 치고 있던 영의정은 시현이 들어와 절을 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아버지.”
“작심삼일이겠지.”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 적 없으니 부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소자를 궁금해하신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다.”
“소자를 대궐로 부르기라도 하신 겁니까?”
“전하께서 찾으셨다니 관심이라도 생긴 것이냐?”
시현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서예에 열중하던 영의정은 붓을 내려놓고, 시현을 쳐다봤다.
아프고 나서라 그럴까? 확실하게 시현이 달라졌다. 늘 장난으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이 단단해져 있었다.
“방탕하게 살 줄만 아는 너를 데려다가 전하께 보여 드리면 뭐라고 하시겠느냐? 없던 일로 할 것이니 너도 그리 여겨라.”
“소자가 어찌하면 아버지께서 소자를 전하의 앞에 세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묻고, 결연한 의지로 바라보니 영의정도 더는 무시하지 않았다.
“네가 달라졌다는 것을 내게 증명해야겠지.”
“글공부에 정진하면 되는 것입니까?”
“당장 술을 끊고, 기방 출입부터 멈춰라.”
“…….”
“네 말대로 공부에 정진하여 달라졌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생각해 보마.”
먼저 술과 여자를 끊고 소홀히 했던 글공부에 정진해야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진정이냐?”
“예, 몸소 보여 드리겠습니다. 더는,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 보마.”
영의정에 말에 시현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다. 이번에도 실망을 안긴다면 다신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될 것이다.
“네게 찾아온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라.”
“예, 아버지.”
굳은 결심이었다. 꼭 대궐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시현의 의지가 만든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