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16)화 (17/93)

제 16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매일 생과방에서 보내 주는 간식을 받아만 먹던 나은은 직접 만들어 먹고 싶다며 두 손을 걷어붙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이 그날이었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신랑의 얼굴을 보는 날!

옷소매며 얼굴이며 평소와 다르게 다과를 만드느라 지저분했다.

“뭐? 지, 지금 오고 계신다고?”

“예! 어서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묻히셨사옵니까?”

“난 몰라! 이 꼴을 하고 어찌 전하를 뵙느냐?”

“그러니 어서 움직이셔요!”

지밀나인이 물어 온 소식은 기뻐야 마땅했지만 상황이 그러질 못했다.

헐레벌떡 밖으로 나온 나은은 접어 올린 소매를 내리며 옷가지에 묻은 먼지를 털고, 처소로 들어가려 했다.

“주상 전하 납시오!”

“어떡해.”

상선의 외침에 나은은 울상으로 홍 상궁을 쳐다보며 매달렸다.

“거기서 뭐 하시오?”

입궐해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강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나은이 몸을 틀어 인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처소에 든 두 사람. 나은은 얼굴 꼴을 알기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 숙의?”

“예? 예, 전하.”

“과인이 어려워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이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러고 보니 옷이 청결하지 못한 듯했다. 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나은이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얼굴이?”

“다……. 다과를 만드느라…….”

“아, 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과인이 미리 말을 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온 것이니 괘념치 마시오.”

“예……. 전하.”

그렇게 말해 주니 바닥만 설설 바라보던 나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강의 얼굴을 보고 눈이 마주쳤다. 

보름 동안 살이 올라 볼이 포동포동해서 강아지 같았다. 

“궁중 법도를 잘 익혀서 중전을 섬김에 있어 실수가 없도록 하시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음……. 그럼 쉬시오, 안 숙의.”

“예?”

왜 벌써 가냐는 눈치였지만 강은 이미 나은을 향한 탐색이 끝났기 때문에 더 머물 생각이 없었다. 

보름 만에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강이 일어서자 따라 일어난 나은은 잘 가라는 인사밖에 할 수 없었다.

* * *

마루에 나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도아는 당의를 벗어 두고, 저고리 차림이었다.

하늘을 붉게 수놓은 노을이 오늘이 끝났음을 말해 주었다. 도아는 그 노을에서 두 눈을 떼지 않았다. 

대궐에 들어와 노을을 볼 때마다 사가의 친정 식구들이 그리웠다. 

“가족들이 생각나셔서 그러세요?”

“응……. 아버지는 입궐하실 때 오시기로 해 놓고, 좀처럼 오시질 않네.”

“세간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그러실 겁니다. 모두 마마를 위해서겠지요.”

“안다. 알지만 서운하구나.”

한시도 떨어져 지내 본 적 없는, 어느 가정보다 가족애가 넘쳤던 집이었다. 그래서 그 빈자리가 하루가 지날수록 크게만 느껴졌다.

붉은 노을이 어느새 도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반짝, 무언가가 도아의 치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만 들어가세요, 마마.”

“…….”

“달달한 것을 내올 것이니 처소로 드시옵소서.”

“응……. 알겠어.”

쾌활했던 모습 뒤로 가족을 그리워하는 도아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무이의 설득에 자리에서 일어서자 치마 속에 떨어져 있던 진주가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에구머니!”

도아는 조용히 뺨에 묻어 있던 눈물을 닦으며 무이를 따라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흙 위로 반짝이는 진주가 눈에 뜨였다. 도아는 무이와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진주를 주웠다. 

마침 그 타이밍에 전각으로 들어선 강이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뭘 저렇게 줍고 있는 거야?’

가까이 다가가도 모를 정도로 두 사람은 줍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닥에 금이라도 떨어졌소?”

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도아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손에 들린 진주와 바닥에 떨어진 진주가 보였다.

그리고 도아의 눈가가 붉어진 것도 보였다. 

‘친정이 그립겠지.’

생각은 했지만 섣불리 위로를 한다거나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대비마마의 부름을 받고, 자경전에 다녀왔다고 들었소.”

“예, 오래 머물진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소?”

아마도 두 사람의 협상이 걱정되어 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직은 도아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특별한 말씀을 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리 말하니 더 알고 싶은데.”

“차를 내어 주시며 자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귀인은 뭐라 했소.”

하나하나 소상히 묻자 도아는 그 뜻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소첩을 믿지 못하시어 이러십니까?”

“얼마나 보고, 얼마나 안다고 그대를 덥석 믿겠소?”

“조건서에 도장을 찍으실 때 소첩을 믿기에 그런 것이 아니셨습니까?”

“그건 순전히 그대 가문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소.”

분위기는 나날이 얼음장이 되어 갔다. 자신을 조금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강의 행동에 도아는 화가 났다. 

도아는 도장을 찍고 한 배를 타기로 한 순간부터 그를 믿기로 했다. 입궐해서도 줄곧 가볍지 않은 모습에 마음은 변하지 않았었다.

“전하께서 소첩의 가문을 필요로 하신다면, 전적으로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언제고 대비마마를 뵙고 온 날마다 심문하시듯 물으실 순 없으십니다.”

“왜 이렇게 발끈하지? 과인에게 숨기는 거라도 있나?”

이러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대비 조 씨를 만나고 왔다니 궁금하기도 하고, 도아의 처소에 발길이 뜸한 것 같아서 와 본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생각과 다르게 헛나오고 말았다. 

“사랑도 받아 본 자만이 알고, 믿음도 온전히 받아 본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갇혀 계셔서 그것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뭐라?”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후궁 주제에 과인을 가르치려 드는 것도 우습거늘. 이젠 능멸하려 드는 것인가?”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강이 매서운 얼굴로 다그쳐 물었으나 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첫날밤에 삐걱대던 것이 오늘은 부서질 듯 균형을 잃고 있었다.

“그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언젠가 부러질 것이오.”

“부러지는 쪽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 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감히 후궁 주제에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듣기에 거슬렸던 말을 빗대어 말하자 강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소첩,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자리에 일찍 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강은 도아의 인사를 무시한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가 버렸다. 

“문 부서지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아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마마,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사옵니다.”

“그러니 문을 부서져라 닫고 가셨겠지.”

“왜 그러셨어요.”

“전하께 가서 물어보거라.”

이후 도아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 

* * *

도아를 입궐시키고 심란한 마음에 출타를 하지 않던 도진이 오랜만에 시현의 사저를 찾았다.

“안에 있는가?”

“도련님께서 몸이 불편하시어 누워 계십니다.”

“시현이 그 친구가 말인가?”

“예, 별채에 계십니다.”

생전 어디 아파서 누워 본 적이 없던 지기였다. 그런 지기가 아파 누워 있다니 도진은 걱정이 되어 별채로 향했다. 

열이 나는 것인지 이마 위에는 물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도진은 하인에게 나가 보라 손짓하고 곁에 앉았다. 

“흠……. 꾀병인 줄 알았더니.”

도진에게 간병은 아픈 누이로 인해 익숙한 일이었다. 하여 습관처럼 이마에 있던 수건을 물에 담가서 물기를 짜 다시 이마에 얹어 주었다.

얼굴을 만져 보니 다행히 열은 많이 내린 듯 미열만 느껴졌다.

“정신이 드는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던 시현은 눈앞의 도진을 그만 도아로 착각하고 말았다. 

‘궐에 있어야 할 네가…….’

입 밖으로 이름을 꺼내려던 찰나 다행히 정신이 돌아와 도진을 바로 보았다.

“생전 아파 본 적 없던 녀석이 어인 일이냐.”

“그러게 말이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볼 건 얼굴밖에 없는데 큰일이군.”

“입이 살아난 걸 보니 이제 살 만한가 보다.”

시현의 말장난에 도진이 웃어 주자 자연스레 도아의 얼굴이 나왔다. 이 남매, 닮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상사병인가.”

“상사병?”

“그래, 나도 모르는 상사병.”

“밤새 열이 났다더니 아직 제정신이 아니구나.”

“요즘은 매일 제정신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심란해 보이는 웃음에 도진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일은 무슨.”

“생전 아프지 않던 녀석이 앓아눕질 않나, 상사병 소리를 하질 않나.”

“내가 언제 번듯한 소리 하는 거 봤냐.”

헛소리를 한 것이라 말했지만 영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네 누이는 잘 지낸다더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내는 것 같다.”

“그래? 거참, 희한하구나.”

“하루 만에 쫓겨나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내심 그것이 시현의 바람이기도 했다. 

“나도 이제 슬슬 정신을 차리고 살아 볼까 싶다.”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잘 생각했다.”

“그럴까?”

“당연하지. 네 부모님이 아직도 네게 거는 기대가 있음을 알지 않느냐. 이제라도 스스로 그리 생각했다니 다행이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다.”

고열에 시달리며 며칠 동안 누워 있으면서 여러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이 생각의 중심에 도아가 있으리란 것을 도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 *

청명한 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당의를 입은 도아의 얼굴이 맑게 빛났다. 오늘은 은하에게 궁도를 알려 주기로 한 날이었다.

친정에서 가져온 활을 들고, 궁도장에 선 도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은하가 쓸 활을 살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네.”

“오셨사옵니까, 중전마마.”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도아는 은하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것이 자네가 사가에서 쓰던 활인가?”

“예, 활은 처음 접하시는 것이옵니까?”

“배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네.”

오래전 기억이, 은하를 아프게 눌렀다. 인겸에게 궁도를 배우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만류했다.

예쁜 손이 행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그는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귀인이 고생을 좀 할 것일세. 먼저 시범을 좀 보여 주게.”

“그럼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도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능숙하게 화살을 집어 들고, 앞으로 나갔다. 과녁은 꽤 먼 거리에 놓여 있었다.

활시위를 당길 때만큼은 다른 생각을 접고, 오직 과녁에 맞혀야 한다는 생각만이 필요했다.

시위를 끝까지 당겨 과녁을 노려보고 있을 때,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도아는 습관처럼 낯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과녁을 돌렸다.

화살의 끝에, 강이 서 있었다.

“날 죽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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