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청아는 강이 돌아가고, 앉은 자세로 아침을 맞이했다.
문안을 다녀와서도 여전히 강이 남기고 간 말들이 머리에 남아 청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안 숙의마마가 오셨사옵니다.”
“안 숙의가?”
“숙의마마.”
“안으로 모시게.”
문이 열리자 며칠 만에 포동포동 볼에 살이 오른 나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었다.
‘소박맞아 놓고 왜 저렇게 신났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대궐 음식이 입에 잘 맞는 모양입니다.”
“예, 사가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좋아 보여 다행입니다.”
청아가 애써 웃어 주자 나은은 홍 상궁에게 건네받은 주전부리를 풀어놓았다.
“처소에서 먹다가 김 숙의가 생각나서 가져왔습니다.”
“이렇듯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적적하던 참인데 잘 왔습니다.”
“김 숙의도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네, 안 숙의는 뭐든 잘 먹으니 웃전에서 참으로 좋아할 겁니다.”
진실이라고는 한 푼도 깃들지 않은 거짓이었다. 속으로는 음식에 연연하는 게 한심하다며 혀를 차고 있었다.
“뭐든 다 잘 먹는데 한 가지 못 먹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게 뭡니까?”
“다 먹을 수 있어도 사과는 못 먹습니다.”
“사과요? 그 달고 맛있는 것을 어째서 먹지 못합니까?”
별 관심 없던 대화를 이어 가던 중 나은이 사과를 먹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청아의 궁금증이 피었다.
“사과를 먹으면 목이 붓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납니다.”
“저런…….”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사과를 먹었다가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사과를 봐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큰일을 겪었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나은에게 주전부리를 내밀었다. 그것을 덥석 받아 든 나은이 입에 한 아름 넣었다.
‘사과를 먹고 죽을 뻔했다고?’
입에서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나은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먹는 것에 열중했다.
* * *
입의 방정으로 마음을 돌아볼 새도 없이 도아를 다른 사내에게 보내고 시현은 그날부터 방황을 시작했다.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 공허함에 견디지 못하고 기방에 틀어박혀 지낸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허나, 구멍 난 헛헛함은 술을 아무리 마시고, 기생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별짓을 해도 사라지질 않았다.
이 마음이 이다지도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마지막으로 본 도아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떤 발버둥을 쳐도 더 이상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견고하고 화사하게 꾸민 모습은 멀게만 느껴졌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만나면 되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십니까?”
“너무 멀고, 높아서 닿을지 자신이 없구나.”
연거푸 술만 마시던 시현이 꼬인 발음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자 기생이 웃었다.
“이보세요, 도련님.”
“보고 있다.”
“영의정 대감의 자제가 높아서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답니까?”
“…….”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달콤하게 말하면서 기생은 다시 잔을 채웠다.
“높은 곳에 있으면 끌어내려 보면 되고…….”
“…….”
“끌어내릴 수 없다면 도련님이 올라가면 됩니다.”
제3자의 관점이라 쉽게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게 찾고 있는 답일 수도 있었다.
“뭐, 도련님께서 쉬이 놓을 수 있는 거라면 그리하면 됩니다만.”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럼 결단은 도련님 몫입니다.”
기생이 남긴 말을 되새기던 시현은 술기운에 정신이 점차 흐릿해졌다.
“도아야…….”
취기에 벌어진 입에서 잊지 못하는 여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 * *
오늘은 은하와 도아가 나란히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이런 날을 기다려 왔던 도아의 얼굴에 연신 웃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커다란 호수 앞에 다다랐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아주 커다란 호수였다.
“와…….”
탄성을 지른 도아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호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빠지고 싶다.’
깊고 넓은 호수를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그러다 빠지겠네. 조심하게, 귀인.”
물론 그러고 싶었다. 발을 헛디뎌 실수로라도 호수에 빠져 물놀이를 즐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체가 발각될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가?”
“어릴 적 몸이 아파서 요양을 하러 갔던 곳이 바다 근처라 좋아하옵니다.”
“그렇다면 호수를 좋아할 법도 하지.”
“예, 물을 보면 이끌리듯 다가가옵니다.”
언제나 모든 대화에 있어서 도아는 솔직했다. 그리고 은하는 그런 도아가 왠지 모르게 좋게 보였다.
“아무리 좋아도 호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예, 마마.”
“그건 그렇고, 대궐 생활은 어떠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갑갑하고, 덜 옥죄는 것 같사옵니다.”
“음?”
아직은 도아를 향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저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겪어 보기도 전에 소첩이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던 것 같사옵니다.”
“대궐이란 본래 그렇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겁먹게 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설레게 하는 그런 곳이네.”
“예, 어쩌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지금의 귀인이라면 그럴 것이네.”
쾌활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김 상궁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네, 궁도를 즐겨 한다 하였지?”
“예, 마마.”
“시간이 날 때 내게도 알려 주지 않겠나?”
“소첩이 중전마마를요?”
“무료한 궁중 생활에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네.”
안 될 것 없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면 은하와 친해지게 될 것이다.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좋사옵니다.”
“고맙네, 그럼 시간을 만들어 보세.”
“예, 시간을 주시면 준비는 소첩이 하겠사옵니다.”
“그래 주겠는가.”
대궐에 들어오면 궁도를 접할 길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만 처소로 돌아가세.”
“예, 중전마마.”
도아는 마치 어린 병아리처럼 은하를 졸졸 따랐다.
* * *
도아가 목욕을 하고 나오자 무이는 머리를 빗질해 주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앞에 앉아 있자 시원한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잘 말랐다.
빗과 장신구를 들고 무이가 처소로 들어와 도아의 머리를 땋아 말끔하게 올려 비녀로 고정시켜 주었다.
“전하께서는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응? 갑자기 왜?”
“그 후로 발길이 뜸하셔서요.”
“다른 후궁들도 있고, 나랏일 때문에 바쁘시니까.”
도아는 괜히 이상한 마음이 치밀어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밤마다 다른 후궁을 찾아다닐 강을 떠올리니 기분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아! 다른 궁녀들에게 들은 건데요. 전하께서 세자 시절에 바다에 빠지셔서 큰일을 겪으실 뻔했는데 그 후로 바다에 그렇게 집착하신대요.”
“바다에 집착을 해?”
“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차례 관군을 보내셔서 바다를 수색하셨답니다.”
왠지 그날의 일 때문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를 구해 주고, 정체를 드러낸 것 같아 걱정했으니까.
다행히 별일 없었지만, 그 뒤로 강은 바다를 여러 차례 수색한 모양이었다.
‘인어를 찾아서 뭐 하려고? 설마……. 죽이려고?’
그가 첫날밤에 짓던 싸늘한 얼굴을 떠올리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부드러운 살결 위로 소름이 돋았다.
* * *
별채로 건너온 영의정은 며칠째 기생집에 틀어박혀 귀가하지 않는 시현에게 화가 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마당으로 집어 던졌다.
“치우지 말고 이대로 둬라.”
“…….”
“그놈더러 치우라 할 것이니 누구도 손대지 마라!”
“예, 대감마님.”
마루에 올라선 영의정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망나니 같은 놈.
“가서 끌고서라도 내 눈앞에 데려다 놓아라!”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한 영의정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시현을 끌고 오란 명을 내렸다.
사랑채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으니 반 시진이 채 되지 않아 하인들의 손에 시현이 며칠만의 귀가를 하게 되었다.
그마저도 간밤에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기방에서 술만 퍼마셨느냐?”
“아닙니다.”
“근데 왜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인 게야!”
“송구합니다, 아버지.”
“송구? 네놈이 송구란 말의 뜻을 알고 쓰는 것이냐?”
잘못했음을 알기에 시현이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리 인생을 낭비하고 사느냐?”
“…….”
“이 꼴이 이게 다 뭐란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영의정은 그 길로 시현의 따귀를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시현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가 바뀔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되레 사람 구실을 포기한 놈처럼 굴지 않느냐.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뭐가 문제인 것이야!”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바닥에 나가떨어진 시현이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영의정도 그 앞에 씩씩거리며 앉았다.
“네놈이 한 해 쓰는 돈이 얼마인 줄은 아느냐?”
“…….”
“그저 흥청망청 써 보기만 했으니 얼마인 줄도 모르겠지.”
“죄송합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런 한심한 놈을 강이 기대하며 보여 달라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전하께서 네놈을 선보이라 하시니 어찌해야 좋겠느냐?”
“……예?”
“궐에 데려가 봤자 모두의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
“차라리 없는 자식 취급하는 게 났겠지.”
혼잣말을 하던 영의정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별채로 돌아가라.”
“예, 죄송합니다. 아버지.”
“두 번 죄송했다간 집안 말아먹겠구나.”
매서운 눈빛에 시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랑채를 빠져나왔다.
* * *
해가 높이 솟을 즘 대비 조 씨는 사람을 보내 도아를 불러오라 했다. 손수 차를 우리고 있을 때 도아가 당도했다.
“전각이 멀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예, 산만하지 않고 조용하여 지내기에 좋사옵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좋아하는군.”
“성품은 그러지 못하나 주변은 그런 것을 좋아하옵니다.”
여전히 간택장에서처럼 말주변에 있어서 조심하는 법이 없었다.
“들게.”
“망극하옵니다.”
대비 조 씨가 직접 내린 차를 엄 상궁이 전해 주었다. 도아는 향을 음미하면서 홀짝 들이켰다.
“맛이 어떤가?”
“향과 맛이 자극적이지 않아 좋사옵니다.”
“대청에서 건너온 귀한 찻잎이네.”
“아……. 예.”
그 말에도 도아는 그다지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비가 손수 차를 내려서 후궁에게 대접했음에도 묵묵부답이었으니.
“앞으로 자주 자경전에 들게.”
“…….”
“다른 뜻은 없네. 그저 대궐이 삭막하니 이 늙은이 말벗이나 되어 주란 뜻일세.”
오늘의 본론은 이것이었다. 앞으로 자주 자경전에 들어서 친분을 쌓아 도아를 손바닥에 놓고 뜻대로 부릴 요량이었다.
“예, 허면 중전마마와 함께 들겠사옵니다.”
도아의 말에 대비 조 씨는 삼키려던 차를 내뱉을 뻔했다. 하마터면 사레들려서 몹쓸 꼴을 보일 뻔했다.
“안 그래도 중전마마께서도 항시 적적해 보이셔서 걱정이었는데 잘되었사옵니다.”
“으흠, 중전이?”
“예, 중전마마와 함께 셋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사옵니다.”
“…….”
“차를 한 잔 더 주실 수 있으시옵니까?”
도아는 당황스러워하는 대비 조 씨를 향해 빈 잔을 살며시 내밀며 웃었다.
“그러게.”
“차 맛이 일품이옵니다, 대비마마.”
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엄 상궁이 다가와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제 뜻을 가볍게 제지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문득 대비 조 씨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