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14)화 (15/93)

제 14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길게 내리고 다녔던 댕기 머리를 고이 올려 쪽을 지고, 첩지를 달아 백색 비취 비녀를 꽂고, 양쪽으로 뒤꽂이를 꽂아 주니 머리 장식이 끝났다.

은박 장식이 박힌 치마를 두르고, 초록색 당의를 걸치니 내명부의 여인 같았다. 무이는 잊지 않고, 노리개도 정갈히 달아 주었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그래, 네가 궁중 예법을 배우느라 고생했겠구나.”

“귀인마마를 위한 일인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말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정답게 웃었다. 

“아참.”

“뭐 잊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중전마마께서 주신 가락지를 잊을 뻔했구나.”

그 말에 무이가 작은 함을 가져와 뚜껑을 열어 주자 붉은 실에 묶여 있는 백옥 쌍가락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아는 붉은 실을 풀고, 영롱한 빛을 띤 쌍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와, 대궐 물건은 하나같이 전부 귀한 것들인가 봐요.”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그러셔야죠. 이제 처소를 나서야 합니다.”

“벌써?”

“마마는 다른 분들과 다르게 처소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일찍 나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촤락, 치마가 펼쳐지면서 곧고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각각 핀 꽃들이 아름다웠다. 궁녀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곁을 지나갔다.

아직은 생소한 대궐의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교태전에 당도했다. 두 숙의도 늦지 않게 당도하여 함께 들었다.

아침 문안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 돼서야 후궁들끼리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하게 되었네. 김 숙의, 안 숙의.”

“예, 경황이 없던지라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귀인마마.”

“반갑네. 두 사람 모두.”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으니 화목하기만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인마마의 처소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하올까요?”

“음, 어려울 건 없네. 다만,”

“다만?”

“조금 많이 멀 것이네.”

후궁들은 대궐에서 가마를 탈 수 없었다. 오롯이 두 다리로 걸어야만 했으니 세 후궁은 나란히 걸었다.

청아와 나은은 멀면 얼마나 멀겠냐는 생각으로 동행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송구하오나, 마마의 처소가 너무 동떨어진 것 같사옵니다.”

“아무래도 전각이 모자랐던 모양이네.”

이 넓고 칸 많은 대궐에서 전각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다 왔네.”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숙의가 따라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생각지 못했던 허름함에 다시 놀랐다. 

‘중전께서 투기하셨나?’

청아의 생각이 이곳에 미쳤다. 그러지 않고선 부친이 좌의정이고, 품계는 귀인인데 이런 동떨어진 허름한 곳에 처소를 마련해 줄 리 없었다.

“처소에 다른 나인이 보이질 않았사옵니다.”

“맞네, 내게는 친정에서 함께 온 나인이 전부일세.”

“예? 중전마마께서 그리하신 것이옵니까?”

“오해들 말게. 내 어릴 적부터 병을 달고 산 탓에 예민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뜻을 올렸네.”

간택을 할 때도 병약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청아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은은 사실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난 우리 세 사람이 자매처럼 지내길 바라는 것은 아니네.”

“예?”

“내 워낙 성격이 유별나고, 남과 어울리는 것에 흥미를 갖지 못해서 말이네. 그저 서로 간의 분란 없이 지금처럼 조용히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어릴 적부터 사람을 사귀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도아는 아무 문제 없이 지내되 서로 지킬 거리는 두고 지내고 싶었다. 

“서로 간의 분란이 없다면 그것이 화목일 것이옵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낸다면 편해지면서 나올 수 있는 실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귀인마마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김 숙의가 부친이신 대제학을 닮아서 그런지 총명한 것 같네. 안 숙의는?”

“예? 아, 아…….”

나은은 이 안건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던지라 할 말이 없었다.

“두 분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내 뜻을 곡해하지 않고 잘 따라 주겠다니 모두 고맙네.”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내 처소는 너무 머니 앞으로는 두 숙의 처소에서 보도록 하세.”

“예, 그리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나은이 냉큼 대답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돌아갈 생각만으로도 앞이 캄캄했기 때문에.

그 모습에 도아와 청아는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 * *

정무만 살피려니 몸이 영 뻐근했던 강은 영의정에게 연통을 넣어 궁도장으로 나갔다.

붉은 철릭에 용보 흉배가 박힌 옷으로 갈아입은 강이 활과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영의정이 들었다.

“어서 오시오, 영상.”

“부르시었나이까.”

“오랜만에 영상과 활쏘기를 겨루려 불렀는데 괜찮겠소?” 

“소신의 솜씨가 볼품없는지라 괜찮으시겠사옵니까.”

강은 종종 활쏘기를 할 때면 영의정을 불렀다. 왕을 독대하는 일이 가장 많은 이, 모든 일의 중립에 서 있는 영의정이었다.

그 때문에 강은 그를 적대시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불러 의견을 묻고는 했다. 

“과인이 먼저 하겠소.”

“그러시옵소서, 전하.”

먼저 활을 집어 든 강이 거침없이 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렸다. 세자 시절 글공부보다 빛을 발한 것은 무예 실력이었다.

이를 알게 된 모후가 눈이 뒤집혀 활과 화살을 모조리 태워 버린 후 왕위에 오르고서야 활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어머니였다. 대비 조 씨는.

“참, 영상에게 외동아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기억해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과인의 기억이 맞았군. 그런데 어찌하여 과인은 본 적이 없는 것이오?”

다시 한번 강이 활을 당겨 놓았다. 매섭게 날아간 화살은 과녁을 부술 기세로 꽂혔다.

“송구하오나 나랏일에 나설 그릇이 아니옵니다.”

“영상의 아들인데 설마하니 그렇겠소.”

“소신의 밤을 설치게 만드는 원흉이 오직 거기에 있사옵니다.”

“허허, 원흉이라니.”

솔직한 영의정의 말에 강은 호탕하게 웃었다. 

“과인이 보기에는 영상이 겸손한 것 같소.”

“송구하옵니다.”

“언제 날을 잡아 함께 입궐하시오.”

“소신의 아들놈과 말이옵니까?”

자신의 차례에 활을 쏘려던 영의정이 강의 분부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맞게 들었소.”

“…….”

“영상도 아버지는 아버지요.”

“예?”

“평소에는 과인이 불벼락을 내려도 당황하지 않던 사람이 자식 얘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질 않았소?”

맞았다. 영의정은 지금 생각보다 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집에만 둬도 새는 바가지가 대궐에 데려오면 오죽이나 할까?

영의정은 시현과 함께 입궐하는 것은 상상만으로 아득하여 아찔해지고 말았다.

“내 고대하고 있겠소.”

할 줄 아는 거라곤 놀고, 술 먹고 기생을 끼고 춤추는 게 고작인 한량이었다. 

영의정은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고자 시위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 * *

한편, 날이 저물자 청아의 처소는 분주해졌다. 아마도 오늘은 강의 걸음이 이곳으로 오겠거니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꽃과 더불어 목욕을 마친 청아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곱게 머리를 빗어 땋아 올리고, 은은히 비칠 듯 말 듯 살랑이는 옷을 입었다.

“대전에서는 아직이더냐?”

“예, 숙의마마.”

청아는 연지를 칠하려던 나인의 손길을 괜히 뿌리쳤다.

“됐으니 물러가라.”

밀쳐진 나인은 지분단장 도구를 들고, 조용히 처소를 나갔다.

‘설마 오늘도 소박을 놓으시진 않겠지.’

대제학의 지위와 후궁 간택을 통해 뽑혔으니 그런 하대는 받지 않으리라 넘겨짚었다.

경대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살피던 청아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경대를 거칠게 닫아 버렸다.

“고정하시옵소서, 숙의마마.”

“연 상궁은 대전으로 가서 동태를 살피고 오너라.”

“예, 알겠사옵니다.”

명을 받아 든 연 상궁이 서둘러 처소를 벗어났다. 괜히 처소에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다간 동네북이 될 것 같았다.

“이러다 안 숙의 처소로 가시는 거 아니야?”

왕보다 먹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나은에게 첫날밤을 빼앗긴다면 높은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가 날 것이다.

“오시겠지. 오실 거야.”

스스로에게 위안의 마법을 걸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접을 수가 없었다.

* * *

영의정과 활쏘기를 한다고 땀을 흘리고 돌아온 강은 목욕을 마치고, 대전으로 나왔다.

목이 탈 것을 생각한 상선이 마실 것을 내오자 강은 단숨에 그것을 비워 냈다.

“송구하오나 전하.”

“무슨 일이냐.”

“두 분 숙의의 처소 중 어디로 전갈을 보내올까요?”

“전갈은 왜 보내느냐?”

상선은 정말 그걸 몰라서 묻냐는 표정이었다. 강은 그 얼굴에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얹었다.

“미리 전갈을 보내 놔야 전하를 모실 채비를 할 것이옵니다.”

“과인이 오늘 두 숙의 중 한 사람의 처소에 가야 한단 말이냐?”

“그, 그것이…….”

“첫날밤을 보내지 못했으니 하는 말이렷다?”

곤란함으로 울상이 되어 있던 상선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밝아졌다.

“김 숙의 처소로 가자.”

* * *

속이 훤히 비치는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벗어 던진 도아는 성숙해진 여인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차오른 가슴이 치마를 비집고 나오자 두 손으로 가린 채 목욕재계를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안개구름이 가득한 안으로 들어가자 무이와 목욕통이 보였다. 목욕통은 남들보다 크게 제작하라 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궐에서 쓰는 것의 곱절은 되는 크기였다. 그 안에 찰랑이며 물이 가득 차 있자 도아는 흡족한 얼굴이었다.

“물 받느라 고생했겠구나.”

“어서 들어오세요.”

“오냐,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느니라.”

신이 난 얼굴의 도아는 치마를 붙든 채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물에 들어가자 환한 빛이 일더니 두 다리는 이내 인어의 꼬리가 되었다. 영롱한 빛의 꼬리가 펄럭였다.

* * *

기다리던 소식을 받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청아는 잠시 방황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강의 자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윽고 입궐한 후 처음으로 강을 대면하게 되었다. 용포 차림의 덤덤한 표정을 한 강은 말없이 앉았다.

“대제학의 여식이라 했던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박학다식한 부친을 닮아 총명하리라 생각하겠소.”

“부덕하게도 소첩이 부친의 학문 깊이를 따라가지 못했나이다.”

강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얼굴을 숙이고 말하는 청아를 응시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해야겠지.”

“예? 아, 아…….”

예상치 못한 말에 청아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단한 미모는 아니었으나 우물 같은 얼굴이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관상이었다. 

“입궐해 보니 어떤 것 같소?”

“예? 무엇을…….”

“그대가 기대했던 것과 같은지 묻는 것이오.”

첫날밤에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딱딱하게 던지듯 묻는 말투에 청아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대궐에는 무수히 많은 법도가 있다고 배웠사옵니다. 그것들을 익혀 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걷는 자세를 두고도 법도를 운운하는 곳이지.”

“예, 허나 대궐에 얽힌 법도가 아무리 소첩을 옥죄인다 한들 전하의 총애가 있다면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사옵니다.”

본인 입으로 직접 총애를 운운했다. 대궐 생활이 아무리 각박해도 왕의 총애만 있다면 견딜 수 있다는 말이었다.

“김 숙의는 그럴 그릇이 되는 것 같소?”

“감당할 수 있기에 간택되어 후궁이 되었다고 생각하옵니다.”

“자신만만하군.”

그렇게 말하고 강은 목에 갈증을 느껴 술을 따라 들이켰다. 술에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 그리 생각하시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대 능력으로, 오로지 그대가 따낸 자리라 생각하느냐 묻는 것이오.”

“…….”

“과인이 알기로 그 자리는, 부친이 따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후궁 간택은 그저 보이기식이었고, 후궁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두 사람이 모르지 않기에 청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잊지 마시오. 그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모두 그대의 부친 덕이니.”

“예…….”

“그리고 하나 더,”

잔에 술을 채우던 강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과인은 그렇게 나대는 신하도 좋아하지 않소.”

“…….”

“그러니 숙의도 그 점을 기억해 두시오.”

첫날밤을 보내러 왔다기보다는 일종의 경고를 하러 온 것 같았다.

“과인은 대전으로 갈 것이니 편히 쉬시오.”

“예?”

“그대도 과인과 동침할 기분은 아닐 것 같은데.”

그대도, 그 말은 강도 동침할 기분이 나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오, 숙의.”

“예…….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얼떨결에 인사를 마친 청아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버티고 섰다. 강은 그 모습을 살피고 차갑게 식은 얼굴로 돌아섰다.

‘부친을 닮아 몸속에 뱀을 품고 있군.’

아마 한동안 강의 발길이 이곳에 머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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