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13)화 (14/93)

제 13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오지 않을 임을 기다리는 일은 도아에게 취미가 없었다. 머리에서 겨우 잡아 뺀 비녀가 허공을 날아갔다.

“주상 전하 납시오!”

“어?”

하필 타이밍이 이럴 때라니. 얌전히 기다리던 두 시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강이 처소로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그 앞으로 날아간 비녀가 내리꽂혔다.

날아든 비녀에 놀란 강이 서둘러 도아를 쳐다봤다. 

“얌전히 있을 수가 없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집어 든 강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나인에게 못 들었소?”

“무엇을요?”

“과인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아…….”

“얌전히 기다린 것이 이거요?”

그는 용포를 펄럭이며 자리에 앉아 비녀를 들이밀었다.

“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얌전히 있었더라면 가체에 달려 있던 떠구지가 온전했을 텐데 지금은 옆으로 비틀어져 모양새가 볼품없었다.

“밖에 제조상궁 있느냐.”

그의 부름에 밖에 있던 제조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강이 잔에 술을 채우며,

“귀인의 머리를 내려 주도록 해라.”

“예? 송구하오나 그것은 전하께서…….”

“두 번 말해야겠느냐.”

싸늘하게 말하자 제조상궁이 더 묻지 않고, 도아의 뒤로 가 머리를 짓누르던 장신구들을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으로 가체를 내리자 제조상궁의 임무가 끝났다. 강이 나가 보라 손짓하자 조용히 물러났다.

양옆으로 고개를 움직이며 잔뜩 눌려 있던 목을 풀던 도아는 주안상 앞으로 가 앉아 있는 강을 응시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이오.”

“음…….”

“내심 오지 않길 바란 것이오?”

“그게 아니오라, 3번 조항 때문에 당연히 다른 처소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3번 조항, 서로 합의 없이 합방하지 않는다. 

‘어딜 가든 어차피 똑같소.’

삼킨 말은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손끝 하나 털끝 하나 대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머리를 내려 주셨으니 다른 처소로 가셔도 됩니다.”

“과인이 설마 그대 머리 내려 주러 왔을까.”

“하오시면…….”

“말 나오는 것이 싫어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이오.”

그리 말하고, 강은 조용히 입을 닫고 술에 몰두했다. 이에 도아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 * *

나비 촛대를 밝히고, 주안상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청아가 보였다. 기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연 상궁이 들어왔다. 

“숙의마마.”

“말하시게.”

“송구하오나 소인이 머리를 내려 드리겠나이다.”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는가.”

상궁이 머리를 내려 주겠다는 건 기다리던 강이 이미 딴 처소에 들었다는 소리였다.

“귀인마마의 처소로 듭시었다는 전갈이옵니다.”

“첫날밤부터 소박이군.”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오늘은 그저 세 분 마마가 함께 입궐하시어 이리된 것일 뿐이니 상심하지 마옵소서.”

과연 그럴까? 청아는 눈을 매섭게 뜬 채로 홀로 자적원삼을 뻗쳐 입고, 도도하게 빛나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나 내려 주게.”

“예, 숙의마마.”

청아의 심기가 몹시도 불편해 보였다. 이에 연 상궁은 조용히 뒤편으로 걸어가 장신구를 하나씩 내려 주었다.

한편, 강을 기다리느라 꼼짝없이 앉아만 있어야 했던 나은도 이와 같은 소식을 접했다.

“이보게, 홍 상궁.”

“예, 마마.”

“그럼 이제 저기 상에 있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 것인가?”

“예?”

홍 상궁이 당황하여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나은이 수수하게 웃으며 주안상을 가리켰다.

“저기 음식들 말이네.”

“아! 아……. 드셔도 되시옵니다.”

“그래?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저! 마마, 머리부터 내리시고…….”

그러나 이미 주안상 앞으로 기어간 나은은 음식들을 입에 넣고 있었다. 먹성 좋은 사람을 반나절 동안 쫄쫄 굶겼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당황스러워하던 홍 상궁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먹느라 정신없는 나은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세상에! 대궐 음식이 맛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옵니다. 전을 더 내오라 하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네.”

“예, 음식은 넉넉히 준비되어 있으니 천천히 드셔도 되옵니다.”

그러다 체할 수도 있다는 소리에 나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참 동안 젓가락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 * *

이제는 주인 없이 빈방 처지가 된 별당은 벌써부터 처량해 보였다. 해가 넘어가자 조용히 별당을 찾은 도진은 한참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도아가 가장 좋아하던 공간인 화원으로 들어갔다. 수풀 사이로 꽃이 보이고, 맑은 물이 가득 담긴 호수가 드러났다.

물과 뭍에서 공존하며 살아야 하는 도아에게 없어선 안 될 공간이었다.

“잘 있으려나.”

걱정되는 마음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고 나가자 치열이 보였다.

“벌써 누이가 그리운 것이냐.”

“별당에 불이 꺼져 있으니 허전하여 와 봤습니다.”

“그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보이는 법이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서 별당의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도아가 나와 봤을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 잘 지낼 것이다.”

“예, 아버지가 자주 들러 잘 지내는지 봐 주십쇼.”

“오냐, 그리해야지.”

“어머니는 괜찮으십니까?”

“의원이 지어 주고 간 탕약을 먹고, 막 잠이 들었다.”

도아를 대궐로 보내고, 치열의 아내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네 어머니도, 도아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잘 이겨 낼 것이다.”

“예,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래, 네가 좀더 어머니를 챙겨 주도록 해라.”

말을 마친 치열은 도진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부자는 나란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속도 모르고 휘영청 밝은 달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집 안 어디를 가도 도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 *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신방을 차려 놓은 두 사람은 손 한 번을 마주 잡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는 처소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노 상궁이 해 준 교육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한 이불 덮고 자는 건 전하께 못 할 짓이야. 잠결에 살이라도 닿아 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혼자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도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저만치 앉아 있던 강을 쳐다봤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자리에 드세요, 전하.”

“그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강이 용포를 하나씩 벗자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던 도아도 눈치를 살피다가 원삼을 벗었다.

그런데 옷을 벗는 도아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벗어 놓은 원삼을 펼쳐서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뭐 하는 것이오?”

“소첩은 예서 잘 것입니다.”

“하?”

“전하께서는 금침에서 편히 주무시면 됩니다.”

“퍽도 편하겠소.”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그러나 도아는 정말 원삼을 깔고 그 위에서 잘 생각인지 자리를 척척 만들었다.

강은 하는 모양을 구경하겠다는 듯 턱을 괴고, 살폈다. 이번에는 입고 있던 저고리를 한쪽에 두고, 치마를 착! 펼쳐서 원삼 위에 깔았다.

소복 차림의 도아는 사뿐히 치마를 들치더니 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치마가 이불인 셈이었다.

“보아하니 좌상 고집 꽤나 꺾었겠소.”

“글쎄요.”

강의 정곡을 집는 말에 도아는 애써 웃으며 입꼬리를 양쪽으로 쓸어 올렸다.

어차피 이런 문제로 실랑이할 생각이 없던 강은 옆에 있던 도아의 베개를 집어서 전해 주었다.

“불을 끌까요?”

“그러시오.”

촛불 옆에 있던 도아가 입김으로 불을 끄려는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강을 쳐다봤다.

“잊은 것이 있습니다.”

“잊은 거?”

물음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심스레 강이 누워 있는 금침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도아가 누웠어야 할 자리의 이불을 치웠다.

그러자 흰 비단이 네모난 모양으로 적게 잘린 채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이것은 첫날밤에 여인의 순결을 확인하려 놓는 것이었다.

“낮에 노 상궁이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 천에 자국이 남아야 한다구요.”

도아의 말에 강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아는 품속에서 은장도를 빼 들었다.

날카로운 은장도를 집어 들고, 눈을 꼭 감은 도아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져갔다. 아마도 손을 베어 피를 내려는 것 같았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 위로 강의 손이 덮였다. 도아가 놀라 눈을 떴다.

“눈도 못 뜨고,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

“대책 없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강이 도아의 손에 들려 있던 은장도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거리낌 없이 손가락 안쪽을 벴다.

그리고 붉은 피가 맺히자 비단 천으로 가져가 뚝뚝 몇 방울을 떨어뜨려 흔적을 만들었다.

“손에 피…….”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누우시오.”

“저 때문에 다치셨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이겠습니까.”

도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저만치 가서는 손수건을 가져와 강의 손가락에 맺혀 있던 피를 닦고, 흐르지 않도록 묶어 주었다. 

“아프세요?”

“별로.”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그대 모습인 것이오?”

“예? 무엇이요?”

다시 묻는 도아를 향해 강은 정말 몰라서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말 한마디 곱게 안 하던 여인이, 지금은 사근사근 굴고 있으니 이상해서 묻는 것이오.”

“그때는 말씀드렸듯이 전하께서 선을 넘으셨습니다.”

“과인이 왕이라 달라진 것은 아니고?”

“소첩은 비굴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도아가 정색을 하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번에도 과인이 선을 넘은 것이오?”

“사람의 호의는 받는 것이지 비틀어 쳐 내는 것이 아닙니다.”

“…….”

“곤하여 돌아가 눕겠습니다.”

화가 난 듯 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원삼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도 자리에 누웠다.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워 있던 강은 원삼에 누워 잠이 든 도아를 쳐다봤다.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처지가 우스웠다. 아내와 후궁을 합하여 네 명의 여인을 거느렸으나 어디에도 정 붙일 곳이 없었다.

처음부터 오직 인어만을 고집하는 강의 고집도 한몫했다. 그는 아직도, 갖지 못한 존재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 * *

낯선 공간이라 잠을 설치겠거니 생각했다. 밖에서 한참 동안 도아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무이는 얼굴에 물음표가 한가득하였다.

“꿀잠 주무시네.”

생각보다 아주 오랫동안 소리 없이 꿀잠을 자고 있었다.

“으흐음…….”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싫지 않은지 도아는 이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들어 눈이 떠졌다.

이런 감촉은 원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힘 있게 떠진 눈에 들어온 것은 반대편에 보이는 옷가지였다.

“어?”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밖에 무이 있니?”

“예, 귀인마마.”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무이가 반가운 듯 신이 나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이불에 눕혀 준 것이냐?”

“소인은 처소에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 이상하구나.”

“어제 혹시 약주가 과하셨어요?”

무이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도아는 말을 아꼈다. 괜히 원삼을 깔고 잤느니 어쨌니, 했다간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참, 전하께서는?”

“조회가 있으시다며 일찍 나가셨습니다.”

강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니 괜히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내가 왜 이불에서 자고 있지?’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자던 원삼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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