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12)화 (13/93)

제 12 화 도아, 후궁이 되어 입궐하다

가마에 오른 도아는 한동안 터질 듯 뛰는 심장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심호흡을 내뱉어야 했다.

어려서 함께 나고 자란 무이가 함께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계약을 이행한 강이 있으니 아예 초면인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도아를 태운 가마는 이윽고 청아와 나은을 태운 가마와 나란히 만나서 함께 성문을 넘어 대궐로 들어갔다.

이제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왕의 여자가 되었다. 그 뜻인즉, 죽어서만이 대궐을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귀인마마, 여기서부터는 가마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옵니다.”

“알겠다.”

밖에서 영 어색한 말투로 무이가 말하며 문을 올려 주었다. 무거운 머리와 거추장스러운 원삼에 부산스럽게 가마에서 내렸다.

무이는 서둘러 구겨져 있던 자적원삼을 가지런히 펼쳐 주었다. 희고 고운 피부에 자적원삼이 유난히 돋보였다.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두 개의 가마에서 청아와 나은이 나란히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김 숙의와 안 숙의겠구나.”

“예, 귀인마마.”

입궐하기 전에 마중을 나온 상궁이 미리 언질을 해 줘 알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린 청아와 나은도 도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미 자신보다 높은 품계임을 알기에 가볍게 묵례하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엄 상궁이 세 사람을 자경전으로 안내해 주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세 사람이 줄줄이 자경전 처소로 들어갔다. 후궁들을 기다리고 있던 대비 조 씨는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발 너머로 보았던 도아를 보고는 몇 번이고 그 얼굴을 다시금 쳐다봤다. 

‘과연 미인도가 따로 없구나!’

청초하기만 한 얼굴에 지분단장을 얹어 놓으니 농염함이 더해져 누구든 발길을 돌릴 것만 같았다.

세 후궁이 나란히 큰절을 올리고, 이내 대비 조 씨의 말에 자리에 앉았다.

“대궐을 흔히 구중궁궐이라 부른다네. 말 그대로 아홉 겹의 담으로 둘러싸인 궁궐이라 하여 아주 깊숙한 곳이란 뜻이지. 그러니 이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과 말들은 어느 하나의 담도 넘어가선 안 될 것이네.”

“대비마마의 말씀 명심하여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사옵니다.”

가운데서 대비 조 씨의 말을 듣고 있던 도아가 그리 답하자 뒤이어 청아와 나은도 따르겠노라 맹세를 하였다.

“부디 주상의 총애를 받아 후사를 잇도록 하시게. 자네들의 가장 중요한 소임은 그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그럼 이제 그만 교태전으로 가서 중전께 예를 올리도록 하시게.”

말을 마친 대비 조 씨는 다시 도아를 응시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눈에 서린 기백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아버지 말대로 사내 못지않은 욕심을 가졌겠어.’

그러나 도아는 생각과 다르게 대비 조 씨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 * *

다시 걸음을 옮겨 당도한 곳은 내명부 수장의 전각, 교태전이었다. 모든 후궁이 우러러 섬겨야 할 중전의 처소였다.

이번에도 세 사람은 나란히 큰절을 올리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다과 앞에 앉았다. 

“먼 길 오느라 목이 탈 것이니 마시도록 하게.”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은하가 먼저 차를 들어서 입술을 축이자 기다리고 있던 도아는 얼른 소매를 올려 목을 축였다.

차가 넘어가는 소리가 잘도 들렸다. 아마 오는 내내 더위에 갈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가식 없는 모습에 은하는 되레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하게 웃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청아와 나은에게도 권하듯 시선을 돌렸다.

“김 상궁.”

“예, 중전마마.”

부름에 가까이 다가온 김 상궁에게 은하는 똑같이 생긴, 작지만 귀해 보이는 세 개의 상자를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정성이겠거니 받아 주게.”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열어 보시게.”

김 상궁에게 받아 든 작은 함을 열어 보자 안에는 백옥 쌍가락지가 붉은 실에 묶여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각각 청아의 함에는 옥가락지가, 나은에게는 영롱한 자태의 호박가락지가 붉은 실에 묶여 있었다. 

“한 지아비를 섬기게 되었으니 자네들과 내 인연이 보통은 아닐 것일세. 그 인연을 귀하고 소중히 하자는 의미로 준비한 것이네. 앞으로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나 모든 일을 마음에 크게 담아 두지 말고, 마음을 넉넉히 쓰는 법을 배우도록 하게.”

처음으로 도아는 같은 여인에게서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 흐르듯 잔잔히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강약이 존재했다. 

“비록 품계는 다르나 세 사람 모두 한날한시에 간택을 받아 입궐한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니 서로 우애 좋게 다독이며 지내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세 후궁은 나란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도아는 두 손으로 함을 꼭 붙든 채 반짝이는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과연 이 나라의 국모, 중전마마시다.’

* * *

두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학자들과 토론을 하느라 진이 빠진 강이 기지개를 크게 펴며 연에 올랐다. 

“각 후궁들이 입궐하여 자경전에 인사를 올리고, 교태전에 인사를 올리고 있다 하옵니다.”

“그래? 그럼 곧 각자 처소로 가겠구나.”

“그럴 것이옵니다.”

“음…….”

각자 처소 얘기를 하더니 강이 손으로 턱을 괴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너무 외진 곳인가.”

“예?”

“아예 산속에 보내 버리지 그랬냐고 도끼눈을 뜰 것도 같은데.”

“도끼눈이라니요?”

지금까지 봐 온 도아를 생각하면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강은 학자들과의 토론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한편, 왕명으로 뜻하지 않게 낙향하여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지내고 있는 부원군과 부부인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뒤늦게 접하게 되었다.

덥다며 연신 부채질을 펄럭이던 부원군은 소식을 가져온 이의 말에 부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네 지금 후궁이라고 했는가?”

“아무리 대궐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다지만 바깥소식을 너무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예, 두 분은 숙의로 한 분은 귀인으로 오늘 입궐했습니다.”

“하!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마마께서 궐에 들어가신 지 이제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후궁을 셋이나 들이다니!”

부원군은 자리에 앉아 방방거리며 날뛰었다. 곁에 앉아 있던 부부인도 말은 없었지만 꽤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대비마마께서 내게 이러실 수는 없네! 우리 마마를 원하실 때는 내게 세상을 다 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국혼이 잡히자마자 내게 안면몰수하시질 않았는가!”

“대감! 누가 듣겠습니다. 말씀을 가려서 하셔야지요.”

“부인은 지금 그게 대수요? 그리고 이 골짜기에 듣긴 누가 듣는단 말이오!”

결국 부부인은 대궐 소식을 가져온 지인을 급하게 보냈다. 이대로 뒀다간 부원군의 방정맞은 입이 무슨 소릴 할지 몰랐다.

“대체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내 틀린 말 했소? 버젓이 정혼자가 있는 은하를 중전으로 달라 먼저 손 내민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 제안에 손을 잡은 사람은 대감이셨습니다.”

“먼저 대비마마가…….”

“남 탓하지 마십쇼. 싫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아이더러 간택에 참가하라 등 떠민 사람은 대감이셨습니다!”

그날을 생각할 때면 부부인은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 그 일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하시오?”

“제가 얼마나 그 날일을 후회 중인지 아십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이오.”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과하게 탐하여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대비마마께서 대감께 등을 돌렸다고 서운해 마세요.”

“어허, 부인.”

더는 자리에 앉아 부원군의 한탄을 들어 줄 수 없었기에 부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다.

‘차라리 저더러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라고 하세요.’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누가 너더러 죽을 자리를 들어가라고 했느냐? 남들은 갖지 못해 안달인 자리거늘!’

‘평생의 약조를 저버리고 다른 사내를 섬기라는데 죽을 자리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미 깨져 버린 정혼이었다. 평생을 약조한 정혼을 무작정 깨 버린 부원군이 은하에게 중전 간택에 참가하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라리 굶어 죽겠습니다.’

‘이미 그 댁에 가서 정혼을 깨고 왔느니라.’

‘아버지!’

‘이미 대비마마께 너를 내어 드리겠다고 약조를 했다. 네가 계속 완강하게 버틴다면 이 아비가 허언을 했으니 죽는 수밖에.’

옆에서 지켜보는 부부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은하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비 조 씨와 부원군 사이에 이루어진 약조였다.

절망감에 절규하며 오열하던 은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틀을 꼬박 앓고 깨어나서도 울기만 했다.

그 후 국혼을 치르고 입궐한 은하는 부원군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날을 떠올리던 부부인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안채로 걸어갔다.

* * *

교태전을 나오자 전각을 안내해 주겠다며 후궁들에게 상궁이 붙었다. 상궁을 따라 도아와 무이는 대궐을 거닐었다. 

크게 둘러봐도 다 담기지 않을 만큼 크고, 넓었다. 걸을 때마다 담기는 전각들과 후원, 호수, 나무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마마.”

“응?”

“대궐 순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글쎄다.”

안 그래도 머리와 몸에 이고 있는 것들이 상당했다. 한계가 올쯤 한참을 돌고, 걷던 상궁의 걸음이 드디어 멈췄다. 

생각보다 작고, 낡고 허름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좀 전에 흔히 보이던 궁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귀인마마가 머무실 처소이옵니다.”

“고생했네.”

“중전마마께서 처소에 배정될 궁녀는 사가에서 데려온 나인만 두신다고 하셨사옵니다. 본래는 귀인마마를 모실 상궁이 배정되는 것이 맞사오나 사가에서 데려온 아이를 곧장 상궁에 봉할 수 없다 하시며 나인으로 두겠다고 하셨사옵니다. 또한, 빨래와 음식 등 일거리는 육처소에서 주관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나이다.”

“중전마마의 하례와도 같으신 은혜를 입었네. 고맙네. 수고했네.”

“망극하옵니다, 귀인마마.”

장황한 설명을 끝내고, 안내 상궁이 물러나고, 이 처소의 주인 도아가 첫발을 들여놓았다.

“생각보다 너무.”

“…….”

“좋구나.”

“예? 진심이세요?”

“너 오는 길에 궁녀들 보았느냐?”

“음……. 아니요.”

“다른 전각들 보았느냐?”

“아니요.”

주변을 빙글 둘러보더니 도아는 몹시도 좋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도…….”

“북적북적 사람만 많으면 피곤하기만 할 게다.”

“뭐, 귀인마마가 좋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생각보다 더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처소가 배정됐다. 바닥을 청소하고 다니는 치마를 부여잡은 도아는 처소로 들었다.

* * *

처소에 들어와 이제 좀 쉬겠구나 했지만 다른 여정이 남아 있었다. 밤이 되면 오늘 입궐한 세 후궁 중 한 명은 강과 합방을 해야 했다. 

즉, 첫날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쪽으로는 밤톨만큼의 지식도 갖고 있지 않으니 교육이 필요했다.

각 후궁들에게 성교육을 담당하는 노 상궁이 찾아왔다. 낡고 손이 많이 탄 그림 서책을 들고 말이다.

“그런데 이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라도 내리고 들으면 안 되겠는가?”

“송구하오나 그것은 오직 전하만이 하실 수 있으시옵니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에 도아는 짜증이 솟구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융통성 없는. 누구 하나 목이 부러져야 법도를 바꿀 생각인가?’

무거운 머리로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성교육은 한 시진이나 이어졌다. 어차피 치르지 않을 일이라 남의 일이었다.

간혹 얼굴이 붉어지도록 민망한 내용이 섞여 있었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합궁은 이렇게 치르시면 되옵니다, 귀인마마.”

“고생했네.”

성교육을 마친 노 상궁이 책자를 들고 처소를 나갔다. 

어느새 하늘 위로 노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합방 준비로 처소 안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명의 나인이 들어오더니 금침을 착착 각을 맞춰서 깔고 나가자 이번에는 상궁들이 원앙이 놓인 주안상을 들여놓았다.

나비 촛대를 들여와 불을 밝히고, 무이가 들어와 지워져 가는 입술 위에 붉은 연지를 덕지덕지 발라 주었다. 

“이제 전하를 기다리시면 되옵니다.”

“전하는 어차피 안 오실 테니 머리나 풀어다오.”

“안 되옵니다. 아까 오셨던 상궁마마님이 전하께서 다른 마마의 처소로 듭셨다는 전갈을 받기 전에는 머리를 내리지 말라고 했사옵니다.”

“안 오신다니까?”

그러자 무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머리를 내려 달라는 도아의 등 뒤로 가더니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궁중의 법도를 따르셔야지요, 귀인마마.”

“대궐 사람 다 됐구나?”

기다리라는 무이의 설득에 넘어간 도아는 그 뒤로 인고의 두 시진을 더 기다렸다. 

“난 못 참겠다.”

어차피 오늘 밤 강이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3번 조항 때문에 절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아는 펄럭이며 소매에서 손을 꺼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장신구를 잡았다.

“이건 도대체 왜 안 빠지는 거야?”

이리저리 잡아 늘어뜨려도 가체에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날 새겠네, 정말.”

그러다 떠구지머리 밑으로 두 개의 비녀가 길게 꽂아져 있는 게 만져졌다. 옳거니!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비녀를 잡아 뺐다.

“하나, 둘, 셋!”

너무 힘을 줬나? 가체에서 겨우 빠진 비녀가 그만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주상 전하 납시오!”

“어?”

타이밍이 가히 예술이었다.

문이 열리고, 강이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그 앞으로 날아간 비녀가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