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10)화 (11/93)

제 10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대가댁 자제가 훤한 대낮에 여인의 뒤를 쫓아와 행패를 부렸다. 게다가 도아를 지켜 주려던 무이를 사내는 우악스럽게 밀쳤다.

“이 무슨 무례십니까!”

도아는 헛소리하는 사내를 매섭게 쏘아 주고, 옆에 넘어진 무이를 잡아 주었다.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덥석! 도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에구머니! 아기씨!”

“어느 댁 여식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거참, 이리 어여쁜 낭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도아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손, 놓아라.”

사내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있던 도아의 손목 위로 다른 손이 다가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를 바득 갈고 있는 강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에서 매서운 불꽃이 일어 당장이라도 일을 치를 것만 같았다.

“감히 쳐다보지 마라.” 

이자가 도아를 쳐다보는 것조차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침 바른 계집이다.”

“뭐라? 침?”

“늦게 와 놓고 어디서 누굴 채 가려고!”

“이런 망할 종자를 보았나.”

거침없이 망언을 일삼는 사내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강은 우악스럽게 잡혀 있던 도아의 손목을 풀고, 그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오늘 네놈의 삼족을 멸하게 해 주마.”

“그만, 그만하십쇼.”

화들짝 놀란 도아가 흥분한 강의 팔을 부여잡았다. 강의 시선이 제 팔을 붙든 도아에게 향했다. 

놀란 눈을 따라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연분홍 연지를 칠한 입술에 머물렀다.

“술 취한 주정뱅이일 뿐입니다.”

“저 입을 찢어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십쇼.”

도아가 고개를 저어 가며 만류를 청했다. 결국 강은 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저만치 동동걸음으로 눈치를 살피던 상선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갖다 버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상선에게는 특별히 뛰어난 재주가 하나 있었다. 단박에 혈을 짚어서 사람을 기절시키는, 재주라면 재주였다. 

상선은 작은 키로 날렵하게 움직이더니 사내를 기절시킨 후 짐승을 짊어지듯 어깨에 메고 말을 묶어 둔 곳으로 사라졌다.

“겁도 없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혼자 기다리겠다고 한 것이오?”

“그야…….”

“그대만 아니었으면 저자 입을 찢어 놨을 것이오.”

“저런 사내를 상대해 봤자 오히려 전하께서 손해를 보시는 겁니다.”

잘 참았다고 말을 하려는 건데 갑자기 강이 또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그대.”

“예?”

“그 입술…….”

“예?”

“안 어울려.”

그러고는 휙 돌아서 혼자 누각으로 가 버렸다. 

“기가 막혀.” 

도아는 2층으로 올라가 먼저 앉아 있던 강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그는 저만치 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올라온 도아가 삐뚜름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자 강은 ‘후궁 조건서’를 내려놓았다.

“보시오.”

말이 끝나자 도아는 봉투를 집어 와 서신을 펼쳐 보았다. 눈으로 읽어 내려가자 맨 마지막 도아가 지장을 찍은 밑에 강의 이름과 지장이 있었다.

‘이강, 이름도 별로네.’

괜히 트집을 잡고 싶었다. 

“그대의 가문은 오래전 인어 사냥으로 막대한 자금을 얻어 부를 축적했다고 알고 있소.”

인어 사냥이라 콕 집어서 말하자 이유 없이 도아의 심장이 종잇장에 베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과인이 필요로 할 때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오.”

“예, 옳은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가문을 원한 사람은 과인이 아니라, 대비전이오.”

이 얘기는 치열에게 흘러가는 식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이야기인즉, 대비 조 씨도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대의 가문을 이용해도 좋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해 두는 말이오. 과인은 대비전과 같은 길을 가지 않소.”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조건서에 대한 비밀은 서로 알아서 지키도록 합시다.”

“예, 이것은 소녀가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아는 조건서를 두 손에 꼭 쥔 채 안도의 숨을 뱉었다.

“좌상은 여식이 왕을 궐 밖으로 불러낸 것을 알고 있소?”

“소녀가 부탁하여 서신만 전해 주셨을 뿐 자세한 내막은 모르십니다.”

“여식을 꽤 믿는가 보군.”

“자식이고, 부모니까요.”

망설이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도아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믿음은 무조건적이라 생각했다.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예?”

“알게 되겠지만 대궐에선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서로 믿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오.”

“대궐에는 야망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무언가 크게 이루겠다는 희망, 궐에 발을 들인 자들은 모두 부푼 꿈을 안고 왔을 것이다. 

“그대는 없나?”

“그런 것이 있었다면 조건서를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후궁이 되었으니 혹시 모르지.”

“전하의 곁에 이미 중전마마가 계시니 당치 않습니다.”

애초에 총애를 두고 다툼을 벌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마음도, 생각도 없습니다.”

이미 혼인하여 아내가 있는 유부남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만 일어납시다.”

얘기를 더 길게 해 봤자 감정만 상하고, 또 버럭 화만 낼 것 같아서 강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대궐에서 뵙겠습니다, 전하.”

가볍게 묵례하며 대궐에서 보자고 말하는 도아를 바라보던 강은 얕은 한숨을 뱉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왜일 것 같소?”

“모르니 물은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도아를 통해 인어를 떠올린다고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만 궐로 돌아가야 하니 갑시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각 아래로 내려왔다. 상선이 무이와 함께 말 두 필을 묶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잘 가시오.”

“조심히 가십시오, 전하.”

다음 만남은 대궐일 것이다. 왕과 후궁, 분명한 관계로 만날 것이다. 

* * *

간택 소식이 들리고, 청아는 외모를 가꾸느라 어느 때보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집착이라도 하듯 경대를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시종일관 경대를 보며 얼굴을 관찰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발꿈치도 따라가질 못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더냐?”

“좌의정 댁 장녀 말입니다.”

“이번 간택에 함께 오르질 않았느냐.”

청아는 그날 도아를 보고 온 후부터 치장에 집착하듯 공을 들였다. 

“예쁜데 예쁘기만 한 게 아닙니다.”

“허면?”

“그 묘하게 이상하게 풍기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리 예쁘더냐?”

“예, 아무리 말씀드려도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외모가 평범하기에 청아의 눈에 더욱 박힌 것일 수도 있었다. 

“분명 전하께서 깊이 총애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것이 외모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외모입니다.”

“네가 뭐가 어때서? 너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청아는 깊은 한숨이 나왔다. 대궐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고, 자신보다 예쁘고 재주 많은 여인들이 숱할 것이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한쪽에 밀어 둔 패물함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아끼는 장신구를 챙겨 넣었습니다. 이것을 이번에 함께 입궐할 도총관 여식에게 보내 주세요, 어머니.”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니에게 부탁을 해 놓고, 옆에 펼쳐 놓은 경대로 시선을 돌린 청아는 특색 없이 무난한 얼굴에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 * *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귀가한 도아는 치열이 사랑채에 있다는 말에 곧장 그리로 향했다.

“어딜 다녀오느냐?”

“바깥바람 좀 쐬고 오는 길입니다.”

“날도 더운데 더위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출타하고 돌아온 도아의 양 볼이 빨갛게 익어 있으니 치열이 걱정하며 무이에게 시원하게 마실 것을 내오라 명했다.

“하, 시원하다.”

도아는 무이가 내온 수정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입을 닦았다. 

“참, 아버지.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냐?”

“음, 입궐하게 되면 눈치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요. 혹시 전하와 대비마마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이것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선 치열의 정보가 가장 빠르고, 정확할 것이다.

“네가 대궐 생활을 해야 하니 알아 둬서 나쁠 건 없겠구나.”

“예, 그러니 자세히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너 정말 입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미 결정 난 일입니다. 다른 말씀 말고, 제가 물은 것을 말씀해 주세요.”

이에 치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했다.

“대비는 성정이 워낙 포악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 분이다. 그런 분이 전하를 세자 시절부터 꼭두각시처럼 세워 놓고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셨지. 처음에는 대비의 뜻대로 되는 듯 보였지만, 전하께서도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셨다.”

누각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자 강이 했던 말을 이해하게 됐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대비는 전하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그러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대비마마가 우리 가문을 이용하려고 저를 후궁으로 뽑으신 거군요.”

“얘기하자면 그렇지.”

“아버지는 어느 편에 서 계십니까?”

사실 무엇보다 이것이 중요했다. 도아가 꽤나 진지한 얼굴로 치열을 쳐다보며 답을 기다렸다.

“아비는 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신하일 뿐이다.”

“이 나라의 주인은 전하이십니다.”

“그렇지.”

“생각해 봤는데 제가 입궐해서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건 돈 많은 가문이었습니다. 전하께 이 점을 강력히 내세워 볼 것입니다.”

후궁 조건서에 대해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도아는 빙빙 돌려 말했다.

“아버지가 대비마마에게 잡힌 약점은 저 하나지요?”

“지금으로선 그렇지.”

“그럼 됐습니다. 소녀는, 전하의 편에 설 것이니 저로 인해 대비마마에게 휘둘리실 것 없습니다. 아버지.”

“대궐 생활이 네 생각만큼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음은 굳어졌다. 후궁 조건서에 강이 지장을 찍어 주고, 세 가지 조항을 들어주기로 한 이상 두 사람은 한 배에 탄 동지였다.

“대비에게 한번 여지를 주시면 번번이 끌려다니실 겁니다. 이건 아버지가 더 잘 아실 테니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비에게 미움을 사면 힘들어질 것이다.”

“이미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네가 그렇다면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돕도록 하마.”

앞으로 대궐에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도아가 믿을 건 오직 가문이었다. 

* * *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길을 말을 타고 달리는 건 생각보다 흥분되는 일이었다. 

입궐을 앞둔 도아는 다시 바다에 나오기 힘들 것을 알고, 혼날 것을 감안하고 몰래 집을 나섰다. 

말을 인적이 드문 나무에 묶어 놓고, 늘 몸을 숨겼던 바위로 향했다. 익숙하고 그리웠던 바다의 향기, 도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

바다를 몇 번이나 마시던 도아는 머리를 풀고, 옷가지를 훌훌 벗어 한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내 거침없이 파도가 치는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다는 화원에 있는 작은 호수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깊고 넓고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세상이었다. 두 다리는 이미 꼬리가 되어 밝은 빛을 내며 유연하게 움직였다.

도아는 깊이,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그리웠던 바다, 몸과 마음이 비로소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바다를 느끼며 헤엄치고 있을 때 무언가 두 귀를 자극했다.

‘뭐지?’

난생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도아는 움직임을 멈추고, 바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청량한 푸른색의 바다에 붉은 피가 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피?’

화들짝 놀라 핏물이 흘러온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바다 안으로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활과 창을 목격하게 됐다.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려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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