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봤다.
정월 대보름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억이 도아를 덮쳤다. 아주 오래전 바다에 빠져 죽어 가던 사내, 그것이 강이었다.
“호색한과 혼인이라니.”
“…….”
“유감이겠군.”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거리에서 오가다 만났으니 인연이라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호색한, 기억해 두겠소.’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 잊는 게 좋을 것이오.’
‘다시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겠소.’
‘악연은 한 번으로 충분하오.’
최악의 말만 골라서 한 것 같았다. 도아는 벌게지는 얼굴을 감추려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엮이는 걸 보면 악연이 맞는 건가.”
“…….”
“남장을 할 때부터 평범한 규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후궁에 간택되고 이런 조건을 내걸 줄이야. 상상 그 이상이오.”
“그날은……. 전하께서도 소녀에게 결례를 하셨으니 그 일을 문제 삼진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이것 봐라? 먼저 선수를 쳤다. 강은 히죽 웃으면서 조건서를 다시 반듯하게 접어 봉투 속에 넣었다.
“내가 보다시피 호색한에 옹졸하기까지 해서.”
“…….”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소.”
“전하께서 그 조건을 모두 수락해 주신다면 소녀의 가문을 필요로 하실 때 힘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이도 저도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힘 있는 가문을 들먹이는 일이었다.
“정략혼인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리 말씀하시면 그리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조건을 수락할 수 없다면?”
“입궐할 수 없습니다.”
당당했다. 이미 후궁 간택을 치르고, 입궐을 앞둔 후궁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왕명을 거스를 것이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민심을 살펴야 하거늘 쓰러져 다 죽어 가는 여인을 후궁으로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꾀병이라도 부리겠다는 것이오?”
“병약하여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다는 걸 많은 이가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꾀병이라 생각진 않을 것입니다.”
말로 앞의 여인을 이길 수는 있는 걸까? 강은 이런 식의 대화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걸 깨달았다.
“고려는 해 볼 것이나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예, 돌아가 기다리겠습니다.”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아도 따라 일어났다.
“이틀 후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
“뜻대로 하시오.”
“예, 전하.”
말끝마다 전하라는 호칭은 붙였으나 도통 진심으로 강을 왕으로 대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말끝마다 전하는, 도대체 좌상이 뭘 먹여 키운 거지?’
말에 오르는 순간까지 강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은하에게는 후궁 간택을 치를 때보다 그 후의 일이 산더미였다. 후궁을 뽑을 때는 뒷짐을 지고 구경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모든 일을 대비와 상의하려던 은하는 강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고심하여 모든 결정을 내린 은하가 자경전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은하의 당의 색상이 강렬해 보였다. 자경전 처소 앞에서 김 상궁이 들고 있던 것을 은하가 건네받았다.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어마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들었사옵니다.”
“그래요?”
“예, 우선은 이것을 보시옵소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자 곁에 있던 엄 상궁이 다가와 대비에게 전했다.
“어디 보자.”
“후궁 간택을 따로 치른 것이라 미리 품계를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세 후궁의 품계를 넣어 놓은 것이옵니다.”
종이를 펼쳐 든 대비 조 씨는 상의하여 품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정해 놓은 것을 통보하러 왔다는 말에 얼굴색이 변했다.
“대제학과 도총관 여식은 각각 종2품 숙의를 내렸사옵니다.”
“음…….”
“그리고 좌의정 여식은 종1품 귀인의 품계이옵니다.”
“어찌하여 품계를 이리 내린 겁니까?”
언짢게 들리는 말에도 은하는 물러서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처했다.
“알아보기를 후궁 간택으로 들어온 후궁에게는 숙의의 품계를 내린다고 했사옵니다.”
“이 사람과 상의하여 결정했더라면 굳이 다른 곳에서 알아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을. 쯔쯧……. 하면 어찌하여 좌상의 여식에게는 귀인을 내린 겁니까?”
“내명부의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수장인 신첩이 할 일이옵니다. 하여 후궁들 사이에 질서를 확립해 놓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그리 품계를 내린 것이옵니다.”
듣고 있으면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대비 조 씨는 트집을 잡지 못하고,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전의 눈에 좌상의 여식이 든 모양입니다.”
“때로는 남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고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세 명의 후궁들은 분명 주상의 총애를 두고 다툼을 벌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명부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후궁들 사이에 기강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은하의 눈에 도아가 가장 적합했기에 귀인을 준 것이다.
“또한 후궁들의 입궐은 한날한시를 잡아 조용히 치르려 하옵니다.”
“그런 것도 생각한 것입니까?”
“예, 어마마마께서 후궁 간택을 치르시느라 고단하실 듯하여 신첩이 나섰사옵니다.”
“흠…….”
이번에는 대비 조 씨가 누가 봐도 언짢다는 기색을 역력히 표출했다.
“어마마마의 생각은 어떠시옵니까?”
“뭐, 중전께서 이토록 세심하게 생각해 왔는데 이 늙은이가 할 말이 있겠습니까?”
“아직은 신첩이 부족한 터로 어마마마의 가르침이 필요하옵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예?”
“됐습니다. 그럼 중전 뜻대로 합시다.”
어차피 본인이 원하는 후궁을 들였으니 이번에는 대비 조 씨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예, 후궁들 입궐은 길일을 잡아 다시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그럽시다.”
이로써 후궁 간택에 관한 전권이 본래의 주인이었던 은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 * *
평소 도화군은 사랑채에서 조용히 서책을 읽으면서 일과를 보냈다. 적막하기만 했던 그의 일상이 아들 선이가 태어나면서 달라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벌써 저만치 아이의 옹알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군부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도화군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으며 부인과 아이를 맞이할 채비를 했다.
“우리 선이 왔느냐.”
“소첩도 왔습니다.”
“부인도 왔구려.”
세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앉았다. 도화군은 자신을 쏙 빼닮은 선이를 다정스레 안았다.
“전하께서 후궁을 들이시니 곧 후사를 보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잘됐습니다.”
“예, 이제 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좋은 소식이 있으셔야 할 텐데…….”
그리 말하며 도화군은 연신 선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후궁 간택은 허울이고, 후궁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
“이 일로 대비마마를 향한 말들이 많습니다.”
“어허, 그래도.”
군부인에게 절대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도화군이었지만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소문은 들려도 듣지 마세요. 입에도 담지 말고,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탈 없이 살길입니다.”
“…….”
“이젠 우리가 지켜 줘야 할 아이도 생기질 않았습니까.”
“소첩이 경솔했습니다.”
언제 어디에 대비 조 씨의 사람이 숨겨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젠 이런 생활이 익숙해진 도화군은 말을 하고 미안해져 군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군부인도 덩달아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화군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 * *
대궐로 돌아온 강은 시원하게 냉수를 비우고, 품속에 넣어 둔 ‘후궁 조건서’를 경상 위에 꺼내 놓았다.
“서로 합의 없이 동침할 수 없다, 라.”
이 조항이 발칙하면서 재밌었다. 후사를 위해 입궐하는 후궁이, 제 허락 없이 몸에 손대지 말라 조건을 거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홍도아.”
붉은 비단을 치우고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왜 자꾸 겹쳐 보이는 걸까.”
언제나 강의 머리를 지배하는 건 망상으로 가득 찬 인어의 존재였다. 강은 그림 족자를 펼쳤다.
푸른 바다를 누비고 있을 인어, 그 존재를 떠올리자 강의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
* * *
약속했던 이틀의 기한이 모두 흘렀다. 약속한 날이 되자 도아는 경대 앞에 앉아 머리에 꽂이며 입술연지며 손대지 않던 것에 손을 댔다.
잔뜩 꾸미고 집을 나서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기씨.”
“응, 왜?”
“저 뒤에 나리 한 분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뒤를 보면서 주춤거리던 무이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이에 도아가 뒤를 힐끔거리자 낯선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따라오고 있었던 거야?”
“북적거리던 장터를 지나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너는 진작 말하지 않고!”
“같은 길로 가는 줄 알았죠.”
그러는 사이 누각에 당도했다. 그때, 뒤에서 쫓아오던 사내가 걸음을 빠르게 하여 도아에게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무이가 앞을 가로막자 사내는 손쉽게 옆으로 밀쳐 내 버렸다.
“이 무슨 무례십니까?”
“놀라시었소? 감히 종년 주제에 내 앞을 막길래 화가 나서 그만.”
도아는 헛소리하는 사내를 매섭게 쏘아 주고, 옆에 넘어진 무이를 잡아 주었다.
그런데 구경하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덥석! 도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에구머니! 아기씨!”
“어느 댁 여식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거참, 이리 어여쁜 낭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도아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손, 놓아라.”
사내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있던 도아의 손목 위로 다른 손이 다가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를 바득 갈고 있는 강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