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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8)화 (9/93)

제 8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언제나 술은 술을 부르는 법이었다. 대낮부터 기방을 찾은 시현은 연거푸 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탁!

빈 잔을 엄청난 기세로 상에 내려놓았다. 갓은 이미 저만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현이 기방을 찾아 기생을 부르지 않고, 혼자 술을 마시며 자작을 하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지.”

괴로움에 젖어 술을 들이켜고 있을 때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곧 문이 열리면서 사치스럽게 꾸민 기생이 들어왔다.

“도련님.”

“오늘은 아무도 필요 없다고 하질 않았느냐?”

“그게 아니라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그리 말하면서 기생이 몸을 옆으로 치우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네가 어찌 이곳에?”

“집으로 갔더니 이곳으로 가 보라더구나.”

“그렇다고 천하의 홍도진이 기방을 출입했느냐?”

“안 될 것도 없지.”

난생처음으로 도진이 기방에 출입을 한 것이었다. 시현이 그렇게 가자고 꼬셔도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았었다.

기생이 자리를 비켜 주며 문을 닫고 나갔다. 도진은 한껏 차려진 술상 앞에 시현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는 너는 기생도 없이 어찌 혼자 이러고 있느냐?”

“나란 놈도 때론 혼자가 편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 그럼 내가 불청객이겠구나.”

“기생을 두고 한 말이지. 너는 예외다.”

그리 말하며 시현은 남아 있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오늘은 도진도 술의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소식 들었다.”

“그랬느냐.”

“그 성정에 궐에 들어가서 어찌 지내려고.”

그 말에 도진은 대꾸 없이 따라 준 술을 비워 냈다.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켠 도진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말한 적 있었나.”

“뭐를.”

“우리 도아 말이다.”

“네 누이 얘기라면 입에 달고 살았지.”

이번에는 도진이 각자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잔을 부딪친 뒤 입 안으로 훌훌 털어 넣었다. 

“참 많이도 아팠다. 태어나 줄곧 너무 아파서 걷는 것보다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던 아이다. 온 가족이 눈물로 지새운 밤이 숱하고, 죽을 고비란 말을 습관처럼 들어야만 했지.”

눈시울이 붉어진 도진은 쓴 술을 버겁게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프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 좀 건강해져서 온 가족이 한숨을 돌렸지. 그러니 이제라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 지내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묵묵히 말을 들어 주던 시현은 잔을 채워 주었다. 몰아치듯 술을 마시던 도진은 얼마 가지 않아 술에 지고 말았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무식하게 마신다고 했다.”

“내가…… 오라비로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너처럼 누이 생각하는 오라비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상에 엎어져 누운 도진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인가.”

잔에 흘러넘친 술이 상을 적셨다. 시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흘러넘치는 술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그도 아니면…….”

처음 도아를 만났던 날을 회상했다. 한여름 뙤약볕에 연두색으로 물들인 모시 치마에 희고 흰 모시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스치듯 지나갔으나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게 했다.

“연정인가…….”

결국 시현도 술을 이기지 못하고 상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 * *

나른한 날. 강은 교태전을 찾아와 은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처럼 강이 시간이 될 때마다 교태전을 찾기에 부부 사이의 뜬소문이 없던 것이기도 했다. 

“참, 부원군과 부부인은 잘 지내신답니까?”

“전하께서 산세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기에 잘 계신다고 하옵니다.”

“그렇소? 흠, 이제 슬슬 부원군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가 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신첩도 그것이 염려스러워 어머니에게 서신을 넣을 때마다 경계하시라 주의를 드리고 있사옵니다.”

이에 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시기 좋게 식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참, 후궁들이 선별되었으니 입궐 시기를 잡아야 하옵니다.”

“세 명이랬던가.”

“그러하옵니다. 하여 세 사람의 입궐을 함께 시킬지, 각각 날을 잡아 따로 입궐시키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의 뜻은 어떠시옵니까?”

아마 세 사람이 같은 날 입궐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게 될 것이었다. 

“중전이 좋을 대로 하시오.”

“허면 어마마마와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하겠나이다.”

“부러 그럴 필요 있겠소?”

대비 조 씨와 상의를 하겠다는 말에 강은 반대의 뜻을 표했다.

“후궁을 입맛대로 골라 놓으셨으니 그것이면 됐소.”

“…….”

“중전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하시오.”

“아…….”

“중전이 현명한 것을 아시니 독단적으로 나간다 한들 대비께서도 어쩌질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친 강은 남아 있던 차를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이에 은하도 따라서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만 돌아가 봐야겠소.”

“예,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차 잘 마셨소, 중전.”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강은 교태전을 등지고 나갔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다정다감하시옵니다.”

“응?”

“정무로 바쁘신 와중에도 교태전을 자주 찾질 않으시옵니까.”

다구함을 정리하던 김 상궁이 그리 말하며 은하의 얼굴을 살폈다. 은하는 아리송한 얼굴로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 깊은 분이시지.”

그 말에 김 상궁이 웃었다. 사랑이 없어도, 부부는 지기가 나누는 정은 얼마든지 나눌 수 있었다. 

* * *

교태전을 나선 강이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제조상궁이 다가와 아뢰었다.

“좌의정이 전하를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돌아갔사옵니다.”

“좌상이?”

이미 돌아갔다니 별수 없지. 그리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오는데 상 위에 흰 서신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좌상이 놓고 갔나 보군.”

자리에 앉자마자 봉투를 집어서 서신을 끄집어냈다. 서신을 펼쳐 읽자마자 첫 줄에서 강의 눈이 커지더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후궁 간택된 홍도아라 하옵니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서신이었다. 서신을 모두 읽은 강은 연신 웃다가 황당한 듯 재차 서신을 읽어 보았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과인더러 만나자고 하는구나.”

“예?”

“자기가 갈 수 없으니 과인더러 궐 밖으로 나오란다.”

두 귀로 들은 얘기였지만 상선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강도 같은 마음이었다. 

“재미있구나.”

간택장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한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신을 펼친 강은 이번에는 서체에 눈을 뒀다. 마치 사내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강렬한 서체를 갖고 있었다. 

‘정체가 뭘까?’

결국 남은 의문은 이것뿐이었다. 

* * *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지어진 2층짜리 누각이 있었다. 낮에는 경치를 보고, 밤에는 별을 보는 곳이었다.

강은 용포를 벗어 던지고 도포 차림으로 말을 달렸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로질러 신선놀음을 하기에 좋아 보이는 누각 앞에 멈췄다. 

말에서 내리자 뒤따르려던 상선을 손으로 저지시켰다. 그리고 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저만치 붉은색 비단을 내려 발을 쳐 놓고 앉아 있는 도아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무이가 보였다.

왕을 대면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무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다가 강을 보고는 조용히 속닥거렸다.

“오, 오…… 오셨어요.”

이에 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온 강은 붉은 비단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여인을 보고, 맞은편에 앉았다.

“좌상댁 장녀의 미모에 대궐 꽃이 시들었다 하여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실망시켜 드리진 않을 것입니다.”

강의 말에 도아는 겸손하지 않았다. 되돌아온 대답에 강은 아니나 다를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듣던 대로 당돌하군.”

“거짓 없이 아뢰어 그렇습니다.”

붉은 비단을 사이에 두고, 강과 도아의 세 번째 재회가 그려졌다. 

들꽃을 뒤흔들며 부는 바람에 붉은 비단이 올라갈 듯 말 듯 바람을 따라 일렁였다. 

들꽃을 뒤흔든 바람이 어느새 강과 도아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강은 팔짱을 낀 채로 붉은 비단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서로 앞을 막고 있는 비단은 치우지 않을 것이오?”

“전하께서 소녀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비단을 치우겠습니다.”

“얼굴 한번 보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쉬이 얻은 것은 마음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강이 기막혀하자 어느새 무이가 다가와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또 무엇이오?”

“소녀의 청이옵니다.”

아마 오늘 만나자고 한 연유가 모두 이 서신에 들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강은 팔짱을 풀고, 서신을 받아서 들어 꺼냈다.

그런데 이번에도 첫 줄을 읽자마자 반응이 왔다. 웃음이 터졌던 것과 반대로 미간이 확 찌푸려지는 짜증이었다.

첫 줄은 이러했다. ‘후궁이 되는 조건’이라고 정확히 힘 있게 쓰여 있었다. 

「첫째, 소녀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모든 것에 예민합니다. 소녀의 전담 궁녀는 집안사람으로 데려가게 허락해 주세요.

둘째, 전각은 허름해도 좋으니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곳을 원합니다. 

셋째, 서로 간의 합의 없이는 동침할 수 없습니다.」

조항을 하나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강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세 번째 조항에서는 황당하여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단에는 도아의 이름 석 자를 적어 놓고, 붉은 지장을 찍어 놓았다. 밑에 칸을 남겨 놓은 것을 보아 강의 자리인 듯했다.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을요?”

“후궁 간택은 이미 끝났고, 그대는 이미 후궁으로 발탁되었소. 이런 조건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종이를 펄럭이면서 당장이라도 찢어 버릴 기세로 말했으나 당돌하게도 도아는 슬며시 소리까지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아직 입궐하지 않았사옵니다. 또한 어떤 품계도 하사받지 않았으니 시기적절하다 생각되옵니다.”

빠직,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제 아비가 좌의정이라 그것을 믿고 까부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도아의 말을 참지 못한 강이 벌떡 일어났다.

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놀란 무이가 외마디 소리를 내었으나 강의 행동은 이미 취해진 후였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붉은 비단이 강의 손에 의해 뜯겨 나갔다.

“감히 과인 머리 꼭대기에!”

화를 버럭 내면서 고함을 치려는데 도아를 알아보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 이 사내…….’

놀라기는 도아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아주 오래전 기억이 덩달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다에서 구해 준 사내가, 정월 대보름 그 사내고, 임금이란 말인가?’

인어의 모습으로 바다에 빠졌던 강을 구해 준 기억이 버젓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이어졌다. 

“호색한과 혼인이라니.”

“…….”

“유감이겠군.”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도아는 그의 후궁이 되어 앞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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