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후궁 간택이 선포되었으니 모두의 이목이 중전인 은하에게 쏠릴 것이 분명했다. 중전에 오른 지 얼마나 지났는지와는 상관없이 아직 회임하지 못했다는 낙인이 선명했다.
무성한 말을 자르기 위해 강은 은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된 장소에서 말이다.
“전하와 신첩이 맺은 동맹은 당사자들의 원만한 합의에 이루어진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외적으로 중전의 입지를 다질 필요도 있소.”
“신첩이 허점만 보이지 않는다면 그러할 것이옵니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강단 있는 모습만 보여 주었다. 은하는 중전의 입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하나만 묻겠소.”
“예, 전하.”
“중전은 초야 때 마음 그대로시오?”
서로 동맹을 맺기로 했을 때 마음 그대로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한적하게 발맞춰 걷던 걸음이 은하로 인해 어긋나고 말았다.
“편하게 말해 주시오. 사람 마음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그 말에 은하는 얼마 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인겸을 생각하던 날을 떠올렸다.
“이 동맹은 유효하옵니다.”
“그렇군.”
“설마 아쉬운 것은 아니시지요?”
“중전도 농을 할 줄 알았소?”
두 사람은 나란히 서로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부인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과는 다른, 지기들이 나누는 어떤 감정이 샘솟았다.
“허면 이번에는 신첩이 묻겠사옵니다.”
“말하시오.”
“앞으로 입궐할 후궁들에게도 후사의 뜻을 두지 않으실 것이옵니까?”
그 물음에 강은 전보다 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은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후궁에게 후사를 볼 바에 중전에게 합방을 권하겠소.”
“아…….”
“어차피 후궁 간택은 형식적인 것이오. 어느 가문을 택하든, 그건 대비마마의 뜻에 달린 것이오. 이미 몇 차례 대비전에 사람이 다녀간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사옵니까.”
활짝 웃던 얼굴은 사라지고, 이내 찬물을 부은 듯 차갑게 식은 용안만이 남았다.
“과인을 기망하려는 술수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소.”
“어마마마는 좌상의 여식을 꽤나 총애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오. 오래전부터 어마마마가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 인물이니 이번 간택으로 소원 성취를 하시려 들겠지.”
다시 후원의 호수를 따라서 나란히 걸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평화로운 때에 대화는 풍경과 들어맞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은하의 머리에 꽂힌 진주 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산호 끝에 달린 진주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진주를 보자 궐 밖에서 만났던 도아가 생각났다. 첫 만남이 꽤나 강렬했던 탓에 도아의 모습이 쉬이 잊히질 않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신첩, 물러나기 전에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그러시오.”
강의 맞은편에 선 은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사 문제를 언제까지 등진 채 외면하실 수만은 없으시옵니다.”
“…….”
“언젠가 용단을 내리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충언 귀담아 두겠소.”
누구보다 은하의 성품을 곁에서 보아 잘 알기에 강은 말에 담긴 뜻을 곡해하지 않았다.
할 말을 마친 은하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다리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말해 주겠소.”
이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강도 등을 지고 돌아섰다.
* * *
집에 틀어박혀서 매일 서책만 읽는 도진을 끌고 밖으로 나온 시현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날도 더운데 기방에 가서 시원하게 있으면 좀 좋으냐.”
“그러니 나는 두고, 혼자 가라질 않았냐.”
“과거에 뜻도 없는 지기가 매일같이 틀어박혀 서책이랑 사는데 내 어찌 두고 보겠느냐?”
그리 말하면서 도진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걸쳤다.
“네 누이 말이다.”
“응, 도아가 왜?”
“뭐 나에 대해 별말 없었느냐?”
“아무 말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별당 앞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도진이 이상한 눈빛을 보내자 시현은 실없이 웃었다.
“워낙에 네 누이가 날 싫어하니 물은 거다.”
“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도아는 네 얘기를 하지 않으니.”
“그래?”
“아마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말간 얼굴로 사람을 패는구나.”
그때, 저만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기에 다들 모여 있나. 어디 보자.”
인파를 비집고 시현이 안으로 들어가자 벽보가 보였다.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려 가는데 얼굴에 있던 잔웃음이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후궁…… 간택?”
뒤이어 다가온 도진도 함께 벽보를 읽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두 사람을 뜻밖의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나라가 또 한 번 떠들썩해지겠네.”
“지체 높은 분들 자식은 다 입궐하는 건가?”
“그렇겠지. 나라에서 떡하니 벽보까지 붙였는데.”
“가마 행렬이 장관을 이루겠구먼.”
옆에서 떠드는 사람들 소리가 유난히 귓전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시현은 아버지에게 혼인 얘기를 꺼냈던 날이 떠올랐다.
도아를 좋아하느냐는 부친의 물음에 시현은 콧방귀를 뀌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했다.
‘그럼 됐다.’
‘뭐가요?’
‘그저 그런 생각뿐인 거라면 단념해라.’
시현의 잔잔하던 심장이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지 후궁 간택을 치른다는 벽보만 보았을 뿐인데 시현의 머리는 굳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돌로 머리를 세게 친 듯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 봐야겠다.”
“어? 그, 그래.”
시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도진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가 버렸다.
“설마…….”
지금 시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당장이라도 도아가 자취를 감추고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언제나 도진을 보러 그 댁을 찾아가면 도아가 보이지 않아도 작은 별당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웃고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알 수 없이 가졌던 안도와 평안이 깨진 것만 같았다.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천천히 빨라지던 걸음은 이내 달리기에 이르렀다. 꽉꽉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며 급히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애써 채신없이 굴지 않아도 된다.”
“커헉…….”
마침 퇴궐해서 마당에 들어섰던 영의정은 숨을 헐떡이는 시현에게 혀를 찼다.
“혹시 후궁 간택 때문이셨습니까?”
“벽보라도 본 모양이구나.”
“예, 그날 그리 말씀하신 건 그 때문이셨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는 것이냐?”
달라진다. 그 뜻은, 어쩌면 도아가 이미 후궁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도진이 누이가 내정된 것입니까?”
“나랏밥도 안 먹는 놈이 그런 건 왜 궁금해하느냐?”
“…….”
“흰소리하려거든 건너가서 글자 하나라도 더 보도록 해라.”
그리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다급해진 시현이 그 앞을 막아섰다.
“아버님은 높은 위치에 계시니 아시질 않으십니까?”
“그게 왜 그렇게 알고 싶으냐?”
“예?”
“마음을 준 것도 아니라질 않았느냐.”
앞뒤 없이 구는 시현의 태도에 영의정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관심 둘 일이 아니다.”
“…….”
“아서라.”
말을 마친 영의정은 앞을 막고 있던 시현을 지나쳐 갔다. 달려오느라 맺혀 있던 땀방울이 정처 없이 떨어졌다.
‘그래, 내가 나서서 이럴 일이 아니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마른 나뭇잎에 누군가 불씨라도 던지고 간 듯 시현의 마음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 * *
벽보를 보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도진은 치열이 퇴궐하여 안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곧장 그리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걱정으로 그을린 부부가 보였다. 도진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밖에서 보고 온 것을 끄집어냈다.
“밖에서 벽보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도진아, 그 얘기는…….”
“도아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벽보에 관해 얘기하려 하자 부인이 나서려 했다. 허나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도진이 그마저도 듣지 않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치열의 얼굴을 보자니 도진의 입이 다물어졌다. 치열도 꽤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
“진작 사직 상소를 내고, 낙향을 해야 했는데 모든 것이 아비의 과욕이었다.”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 것을 욕심낸 것이었다. 남들에게 주목받아선 안 되는 사람이었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결국 사달을 냈다.
“도아를 궐에 들일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이대로 손 놓고, 도아를 궐에 들이진 않으마.”
“그래, 네 아버지를 믿고 기다리도록 하자.”
홍씨 일가가 알다시피 도아는 절대 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난 인어가 왕의 후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도아가 있다는 궁도 연습장으로 건너가자 옷고름을 휘날리며 연신 과녁의 정중앙을 맞히고 있는 도아가 보였다.
활시위를 한껏 당기는 모습에서는 도도한 기품마저 보였다. 그렇게 뒤에 서서 지켜봤다.
‘부모님과 오라비가 널 지켜 주마. 그러니 걱정 마라, 도아야.’
어릴 적에는 늘 이 생각을 기도문처럼 외우곤 했다. 도아는 늘 병을 달고 살았고, 하루하루가 그저 고비의 연속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원의 모진 말에 도진은 어린 누이의 손을 잡고 매일같이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금 그 기도를 되뇌었다. 모두가 생각하는 파국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향기와 수증기가 하나 되어 날가슴의 강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성스레 준비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강은 나인을 물리고, 눈을 감은 채 사심에 잠겼다.
눈을 뜨자 희미한 수증기 너머로 인어의 모습을 한 도아의 얼굴이 그려졌다.
몸과 마음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있었다. 인어를 본 후로 강은 환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집착에 미쳐 버린 광기 혹은 소유욕이라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뭐라 불려도 좋았다.
생명을 불어넣어 주듯 인어가 입술을 맞추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구부려 그득하게 받아진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한참 동안 호흡을 참고, 감았던 눈을 뜨자 세찬 파도가 일렁였다. 이 광경을 아주 오래전에 본 적이 있었다.
점차 호흡이 가빠지고, 입에서 공기를 갈구하는 물방울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빛을 따라서 그날처럼 무언가가 강을 향해 다가왔다. 흩날리는 무언가가, 머리카락인 듯 꼬리인 듯 유유자적 바다를 헤엄쳤다.
이윽고 다가온 그것은 강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보았다.
인어의 형상을 한 그것은 도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뜨자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깬 강은 꿈속에서 참았던 숨을 뱉으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모든 감각이 너무도 선명하여 깨어난 지금이 마치 꿈인 것 같았다.
그 후로 강은 꿈에서 본 도아의 모습에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