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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4)화 (5/93)

제 4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어둠 속을 벗어나 빛으로 물든 도아의 얼굴에는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다짜고짜 본 적 있냐며 들이대는 강을 향해 도아는 비웃음을 흘렸다. 흔하디흔한 바람둥이 수법이었다. 

“호색한.”

“뭐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도아가 강의 손에 들려 있던 복면을 빼앗으려다 그의 손에 잡혀 가까이 끌려가고 말았다. 

“뭘 믿고 이렇게 까불지?”

“소리를 지를 것이오.”

“반반한 얼굴?”

“이러니 호색한이라 한 것이오.”

외간 사내의 품에 끌려왔지만 도아는 주눅이 들지 않고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강은 실소를 터뜨리며 잡고 있던 도아의 손을 놓아주고, 복면을 건네주었다. 도아는 낚아채듯 복면을 가져갔다. 

“호색한, 기억해 두겠소.”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 잊는 게 좋을 것이오.”

“다시 만날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을 것이오.”

도아는 호언장담하며 복면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다시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겠소.”

“악연은 한 번으로 충분하오.”

그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오늘의 인연을 두고, 악연이라 말하는 여인이었다.

너무 당차게 말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뭐 저런 여인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 *

오랫동안 내리던 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은하는 비가 그치고도 한참 동안 마음을 접지 못하고 과거로 흘러가 있었다. 

‘비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아직도 비가 오면 손을 내밀어 맞으실까?’

비가 오는 날이면 늘 손을 뻗어서 내리는 비를 맞고는 했던 사람, 궂은 날씨를 환한 미소로 밝혀 놓던 사람이었다.

그와 추억을 쌓고, 마음을 더불어 쌓으며 백년해로를 그렸다. 수줍게 스치던 손과 이마에 닿던 인겸의 입술 감촉,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렇듯 은하는 여전히 정혼자를 잊지 못하고, 대궐에 갇혀 그리움에 젖어 살고 있었다. 

‘아직도 팔도를 떠돌고 계십니까? 저 때문이겠지요. 행여나 무례한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그리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일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 드릴 것이 없으니 송구합니다. 그럼에도 염치없이, 보고 싶습니다. 도련님.’

시간이 흘렀어도 은하는 아직 인겸을 연모했던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정처 없이 팔도를 떠도는 인겸의 마음도, 은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그 바람에 은하의 안부를 묻고 그리움을 묻혔다. 혼인을 앞두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이의 심정은 인겸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낡은 갓에 묻은 빗방울이 조용히 인겸의 어깨를 적시며 떨어졌다.

“나는 아직도 비가 오면 네가 날 생각해 주진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는다.”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그리움의 눈물이 절절하게 흘렀다.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여인, 하여 그리움은 쉬이 식지 않았다. 

“은하야…….”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던 인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새벽같이 내린 비가 개자 하늘은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다. 그 아래 조회를 연 강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모든 대신이 할 말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후궁 간택을 선포할 것이오.”

바람을 따라 퍼져 나간 소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술렁이는 대신들 사이로 치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간택이 끝날 때까지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질 것이오.”

그 후로 강이 예법에 맞게 간택이 치러질 것이니 각 가문에선 처녀 단자를 내라는 말을 했다.

치열은 아득해진 정신으로 강이 하는 말을 귀에 담지 못했다. 

‘도아를 숨겨야 해.’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일이 흘러가게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안일했던 스스로를 탓하고 자학하며 퇴청을 서둘렀다. 

* * *

물이 넘실거리는 맑은 소리가 화원으로 울려 퍼졌다. 숲처럼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화원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도아의 꼬리였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 꼬리를 유유히 흔들다가 호수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곡선을 그리며 파고들었다.

“후아!”

다시 호수를 박차고 나오자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뒤로 쓸려 넘어갔다. 

“무이 있느냐?”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디 갔나? 생각하며 익숙하게 두 팔로 호수의 바위를 짚으면서물 밖으로 몸을 끌어 올렸다.

한쪽에 놓은 마른 천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몸에 물기가 말라 가자 신기하게도 영롱한 빛을 뿜던 꼬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얗고 긴 다리에 묻은 물기를 닦고, 걸쳐 놓았던 옷가지를 입었다. 긴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 내고, 밖으로 나갔다.

“앞에 있으랬더니 그새 어디를 간 거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무이는 보이지 않았다. 삐걱, 밖에서 문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아는 무이라고 생각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 가지 말고…….”

별당 문을 열어젖히며 싫은 소리를 하려는데 말끝이 흐려졌다. 

‘당신이 왜?’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무이가 아니라 시현이었다. 그는 날 듯 말 듯 몸에 밴 술 냄새와 짙은 방향을 풍겼다.

놀라기는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도진을 보러 건너가던 길에 도아의 목소리가 들려 문 앞을 서성이다가 마주친 것이었다.

지금 도아의 모습은 사내를 벙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길게 내린 머리카락에 마르지 않은 물기가 서려 있었고, 얼굴은 물놀이 직후라 청초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매료되어 버린 시현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휘감겼다.

이런 식의 마주침이 불쾌했던 도아가 서둘러 문을 닫으려 했으나 다급한 손이 날아들어 문을 저지시켰다.

“놓으십쇼.”

“너는 내가 그리도 싫으냐?”

“손부터 놔주시지요.”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도아는 처음부터 시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모든 것이 눈에 차지 않아 싫어하게 됐다.

‘그 누이를 좋아하느냔 말이다.’

‘그럴 리가요.’

그때였다. 어디선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 시현의 것이었다.

얼마 전 치열의 손을 잡던 순간에 그가 나누었던 대화 일부분이 들리는 기이한 경험을 했었다. 그저 우연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인에게 마음 줄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이윽고 시현의 진심이 들켜 버린 순간 도아는 한쪽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시현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으로 인해 도아는 사라진 줄 알았던 희귀한 능력을 대면하게 됐다.

그러고는 제대로 힘을 주어 시현을 밀치듯 손을 빼냈다.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십쇼.”

싸늘한 눈빛과 더불어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말에도 시현은 상황을 즐기듯 웃었다.

“처음부터 그랬지. 내게 유난히 적대적이었어.”

“…….”

“내가 널 해칠 것 같아서 그런 것이냐?”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허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똑똑히 일러주고 싶었다. 도아는 시현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꽉 잡았다.

“아끼는 지기의 누이를 희롱하는 한심한 한량과 마주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아무리 너라지만 말이 심하구나.”

“술 냄새와 방향이 짙어 마주하기 힘든데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물론 술이라면 어제 진탕 마셨지만 전날의 향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시현은 처음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술 냄새는 그렇다 쳐도 방향, 그것은 기생들의 몸에서 나던 향일 것이다.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또다시 제게 경솔하게 구신다면 그땐, 참지 않을 것입니다.”

“…….”

“살펴 가십쇼.”

서릿발 같은 말을 내던진 도아는 그길로 돌아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오라버니의 유일한 흠이야.”

문을 흘겨보던 도아는 이내 휘적휘적 별당으로 들어가려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이번에도 손이 잡혔을 때 소리가 들렸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건가.’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인어에게 잠재된 능력이 무엇인지 알려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어로 태어났던 가문의 여식은 모두 열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먹으로 맞은 듯 도아에게 말로 맞은 시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말만큼 충격적이었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물을 머금은 얼굴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 * *

대궐 곳곳에 처녀 단자를 들이겠다는 벽보가 붙고, 한발 더 나아가 대비 조 씨는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기 위해 궐 밖에도 벽보를 붙이라 명했다.

양반가 중에는 가난하여 행색이 추레한 이들도 존재하니 모두에게 규제를 두지 않고, 처녀 단자를 받겠다는 의중이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민심을 떠보는 수작일 뿐 후궁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대비마마, 좌의정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이르면 오늘 치열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던 대비 조 씨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면 그렇지. 제아무리 콧대 높은 좌상이라도 여식이 걸린 일 아닌가?’

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 바로 앉자 치열이 들었다. 한껏 굳은 얼굴의 치열이 먼저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고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좌상.”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대비마마.”

“덕분에.”

“망극하옵니다.”

짧게 주고받은 안부 인사였다. 대비 조 씨는 몇 년 전 그 일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 사람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소신의 주군은 전하뿐이시옵니다.’ 

‘주상에게 바칠 충성을 이 사람에게도 달란 겁니다.’

‘소신은 그럴 만한 주제가 못 되옵니다. 베풀어 주신 성은을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함께 손을 잡자는 대비의 뜻에 곧 죽어도 수락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던 대비도 그 후로 더는 치열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기세가 역전이 된 셈이었다. 

“좌상을 다시 독대하기까지 이리 오래 걸릴 줄 몰랐습니다.”

“그간 소신이 대비마마께 격조하였사옵니다. 자리가 이러한지라 쉬이 찾아뵐 수 없었사옵니다.”

“오죽이나 하시겠습니까?”

이내 대비 조 씨의 입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신이 감히 그럴 주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미력이나마 대비마마께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나설 것이옵니다.”

“저런……. 좌상이 그리 말해 주니 오히려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옵니다, 소신이 미욱하여 그간 대비마마의 은혜를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꼿꼿하던 치열이 저렇게 숙이고 들어오는 까닭은 후궁 간택일 것이다.

“그리하여 좌상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신의 여식이 후궁 간택에 낙제하는 것이옵니다.”

“흠…….”

“여식이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심하여 몸이 유독 허약했사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겨우 살아남아 무슨 일이든 오냐오냐 그저 귀하게만 키워 놨는지라 성품이 고뿔 장군이옵니다.”

그는 애써 둘러대며 도아에게 흠집을 냈다. 이렇게 해서라도 모두의 눈에서 도아를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대비마마께서 이번 후궁 간택을 치르심은 왕실을 굳건히 할 후사를 보시기 위함이 아니시옵니까? 헌데 소신의 여식은 어려서부터 허약하여 회임하지 못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훌륭한 규수를 온실 속 화초로 가두는 것은 안타까운 처사입니다.”

“훌륭하다는 말씀이 망극할 정도로 소신의 여식은 부족한 아이옵니다. 아프다는 이유로 그저 응석받이로 자라 이미 모두에게 폐만 끼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치열이 저렇게 말할수록 대비 조 씨는 그의 여식, 도아에 대해 구미가 당겼다. 

무엇보다 도아가 있어야 꼿꼿한 치열을 확실하게 손에 움켜쥘 수 있었다. 치열은 강의 신임과 총애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재물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겸손할 것 없습니다. 일단 궁중에 들어오면 잘 다듬은 원석이 될 것입니다.”

“하오나, 대비마마.”

“아직 간택에 올라 후궁이 된 것이 아니니 미리 염려할 것 없습니다.”

치열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흘렀다. 간지러운 기운을 타고, 대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그런 걱정하지 말고, 처녀 단자를 올리도록 하세요.”

“…….”

“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든 일이 수포가 되었다. 처음부터 대비 조 씨는 치열의 청을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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