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2)화 (3/93)

제 2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잘록한 허리를 지나 풍성하게 펴진 치맛자락을 요염하게 붙든 기생들이 줄지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악공이 가야금을 타자 곡조에 맞춰 춤을 췄다. 

기방에 들어 이들의 춤사위를 구경하는 대제학과 도총관의 얼굴에 적당한 취기가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연신 잔을 채워서 건배하고 입에 털어 넣었다.

“술맛 좋구나!”

“이 기방이 유명한 것은 알고 있겠지?”

“암! 알다마다.”

“기방 행수를 잘 알기에 내가 자리를 어렵게 마련한 것이네.”

“이 기방 행수를 잘 아는가?”

“여기 기생들에게 준 전두를 듣는다면 아마 믿지 못할 것일세.”

두 사람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도총관은 병을 집어서 먼저 술을 따르고, 나머지 잔도 받았다.

“나는 대비마마와 연이 없는지라 먼저 물꼬를 틀기가 어려웠네.”

“어허, 이 사람! 그러니 나만 믿으라지 않았는가.”

한창 물이 오른 기생들은 악공들의 연주에 따라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헌데 두 분 사이가 워낙에 좋으신지라 그것이 걸리네.”

“그런 걱정 할 시간에 간택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여식을 단속해 두시게.”

“그것은 걱정 마시게. 내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다 차려 놓은 밥상인데 떠먹지도 못하면 큰일이지.”

탐욕이 물오른 도총관이 가슴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척하니 내밀었다. 꽤 값이 나가는 땅문서로 대제학의 마음을 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모두 자네 덕일세.”

“우리 사이에 무슨 이런 것을 주는가?”

“우리 사이니 주는 것일세. 손이 민망하니 받아 주게.”

“어허, 이것 참! 주니 받긴 받겠네만.”

땅문서를 받아서 소매에 집어넣은 대제학이 서둘러 채운 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 누가 우위에 있는지 한번 겨뤄 보세!”

“어허, 네발로 귀가하고 싶으신가?”

신명 난 두 사람은 춤을 추고 있던 기생들을 술자리로 불러들여 흥을 돋웠다. 

* * *

내일 조회에서 후궁 간택을 발표해야 했다. 이미 내정된 후보가 명확했지만, 법도에 따라 보여 주기식의 간택 절차를 치러야 했다.

“찾아 계시옵나이까, 전하.”

“대제학과 독대는 참으로 오래간만인 것 같소.”

“소신을 찾아 주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망극할 것까진 없을 텐데.”

“예?”

바닥에 엎드려 있던 대제학이 고개를 들어 강을 쳐다보았다. 저 얼굴, 저 표정은 조회에서 신료들을 향해 면박을 줄 때 보이던 것이었다.

“경이 보기에 대궐의 여인들이 평안한 것 같소?”

“소신이 감히 아뢸 수 없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겹겹이 친 담장 안에 갇혀 한번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철옹성, 총애는 젊어서 꽃다울 때뿐이지.”

그제야 대제학은 강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를 챘다. 후궁 간택으로 자경전에 다녀온 일을 알고 있었다.

“하오나 이는 사사로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천자이신 주상 전하를 모시는 일을 어찌 한쪽 면만 볼 수 있겠나이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소?”

“그, 그것은…….”

“경의 여식을 과인에게 제물로 바쳐 놓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물었소.”

그는 혼인이라 하지 않았다. 후궁을 ‘제물’이라 칭하여 대제학의 마음을 짓밟고 헤집어 놓았다.

“대궐에 들어와 승은 한 번 입고, 시들어 죽고 마는 인생이 허다하오.”

“뉘를 탓하겠나이까.”

“대제학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이오.”

왕의 여자, 후사를 잇기만 한다면 가문의 명예는 탄탄대로였다. 대제학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과인보다 모후의 입김이 더 세다는 것을 알고, 감히 자경전에 대고 후궁 간택을 논한 영악함을 기억할 것이오. 물론 후궁 간택에서 경의 여식 또한 기대할 것이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임해야 할 것이오.”

뭐라 할 말을 잃은 대제학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강은 혀를 찼다. 

“그만 나가시오.”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제학은 구겨진 채로 뒷걸음질을 치며 처소를 나갔다. 

“초야도 치르지 못했는데 후궁은 얼어 죽을.”

혼잣말을 내뱉은 강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국혼을 치르고 첫날밤에 부부끼리 부모에게 반항하기로 협력을 맺었으니 강의 속은 총각이었다.

* * *

날은 좋고, 할 일은 없는 한량 시현은 대궐 같은 사저에 마련된 누각에 앉아 경치를 눈에 담고 있었다.

산들바람을 만들어 주는 부채질을 멈추자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기던 도아의 모습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양반집 규수가 활쏘기를 즐겨 한다니, 흘려들어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 솜씨가 어지간한 사내 못지않았다. 

“되레 당돌하니 귀엽질 않은가.”

다시 부채를 펄럭이며 제게 눈을 흘기던 도아를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도아는 좀처럼 시현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미색은 양귀비가 살아 돌아와도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야. 성품도 고분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사내를 끌어당기질 않는가.”

시간이 지나 점점 성숙한 여인이 돼 갈수록 도아의 미색은 끝없이 피어났다. 피부는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할 만큼 희고, 투명했다. 

게다가 입술은 연지를 바르지 않아도 매화 꽃망울이 툭 터진 듯 붉었으며 콧대는 오뚝하여 그림자로 비춰 봐도 선명할 지경이었다. 

이에 화룡점정은 눈이었다. 깊고 그윽하여 머리카락만큼 새까맣고 진하니 바라볼수록 눈빛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제법 혼기가 찼으니…….”

“도련님! 대감마님께서 퇴궐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영의정이 퇴궐하여 집에 이르렀다는 하인의 말에 시현은 부채를 접으며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쯧쯧……. 허구한 날 집구석에서.”

“돌아다니면 집안 망신이라며 사저에만 머물라고 하신 건 아버지십니다.”

“그저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지.”

이런 구박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영의정의 핀잔에 주눅들 것 같으면 시현이 한량으로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는 총명하여 박학하다는 소문을 듣던 놈이 왜 이렇게 사느냐?”

“안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 뜻밖의 말을 하는구나.”

“정말입니다. 꽤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매사에 장난인 시현에게 진지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영의정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안채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디 말해 봐라.”

“음, 책임감이 생기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책임감? 돌밭에 풍작을 기대하는 게 낫겠다.”

“그러니 책임감이 생기도록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눈빛으로 시현을 쏘아보던 영의정은 잠시 뒤 이해를 했다는 듯 눈빛을 달리했다.

“장가가 들고 싶은 것이냐?”

“안달이 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어디서 기생을 데려와 망신을 주려고!”

“아이, 아버지도 참. 아들이 아무리 생각이 없기로 아내 될 사람으로 기생을 데려오기야 하겠습니까?”

집안에 이런 능청스러운 사람은 없었는데 영의정은 시현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뭐, 생판 모르는 사람보단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도진이 누이를 말하는 것이냐?”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혼인 상대로 은근슬쩍 도아를 얘기하자 영의정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왜지? 눈치를 살피던 시현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그 집에 오랫동안 들락거리더니 마음이라도 준 것이냐?”

“예?”

“그 누이를 좋아하느냔 말이다.”

마음, 그것은 연정을 품었느냐 묻는 것이었다. 이에 시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인에게 마음 줄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래? 연정은 아니란 말이지?”

“예, 말 그대로 생판 모르는 것보단 왕래가 있는 곳이 낫겠지 싶어 드린 말입니다.”

그런데 시현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왜일까? 어떤 의미로 그의 심장이 이토록 불안하게 뛰는 것일까?

“그럼 됐다.”

“됐다니 무엇이…….”

“그저 그런 생각뿐인 거라면 단념하도록 해라.”

“연유를 물어도 됩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만 나가 봐라.”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입을 다물기에 시현도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안채에서 나와 마루에 선 시현은 신을 신으려다가 멈칫했다. 

“왜 이렇게 찝찝하지.”

여인에게 마음 주는 사내를 어리석다고 표현할 만큼 시현은 진지한 구석을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나? 그 어리석은 사내가 정작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 *

해가 뉘엿거리며 넘어가려 하자 궐 안으로 붉은 노을이 엎질러졌다. 대전에 앉아 있던 강이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붉은빛을 보고,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라 했지.”

“예, 전하.”

“아우에게 가 봐야겠다.”

“예?”

“간 김에 궐 밖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어찌 지내는지도 보고.”

도화군은 배다른 형제로, 강이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첫 조카가 태어났는데 여태 얼굴 한번 못 봤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망극하옵나이다.”

“떠들썩하게 갈 것 없이 단출하게 갈 것이니 차비해라.”

도화군의 아들인 선이 태어나자, 강은 몇 번이나 대궐에 들여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비 조 씨가 눈을 부릅뜨고 버티는 까닭에 그리할 수가 없었다.

‘형님보다 먼저 자식을 가진 것도 경을 칠 일이거늘! 뭐라? 아들을 낳아?’

이렇게 말하면서 펄쩍 뛰는 바람에 차마 불러들일 수 없었다. 아마도 오늘이 강이 생각한 적당한 기회인 듯싶었다.

* * *

벗은 치마와 저고리가 무이의 손에 넘어갔다. 차례로 안에 입은 소복들까지 다 벗은 도아는 바닥에 잘 정리해 놓은 옷가지를 집어 들어 입었다.

이것들은 전부 사내들이 입는 옷으로 마지막에 도포를 걸쳐서 허리춤에 끈을 묶자 그 태가 드러났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으로 야시장이 떠들썩하게 열리는 날이었다. 도진과 함께 야시장 구경을 나가기로 했으니 편한 차림으로 변복을 한 것이다. 

“이제 머리 올려 줘.”

“매번 번거롭지도 않으세요?”

“오히려 밖에서는 이 차림이 편하고 좋아.”

도아가 자리에 앉자 뒤에 따라 앉은 무이는 능숙하게 긴 머리카락을 잡아 위로 올려서 묶어 주었다. 풀리지 않도록 몇 번이고 매듭을 확인했다.

마무리로 갓을 쓰고 턱 아래로 끈을 묶자 나갈 준비가 끝났다. 

“복면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차, 그랬지.”

“여기요.”

비칠 듯 말 듯 얇은 비단을 받아 든 도아는 그것을 얼굴로 가져와 눈 아래를 가렸다. 

밤 외출을 하는 날마다 남장을 하고는 했지만 갓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얼굴이 모두의 눈길을 모아 종종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미리 준비해 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것이다. 신난 듯 무이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도진이 별당 문 앞에 서 있었다. 

“복면 때문에 답답하지 않겠느냐?”

“비단이 얇아서 별로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 오늘은 야시장이 평소보다 곱절로 크게 열린다고 낮에서부터 장터가 떠들썩했다더구나.”

“그래요? 안 그래도 매해 보던 것이 같아서 질리려던 참인데.”

야시장이 크게 들어선다는 말에 도아의 복면 속 입가가 환하게 올라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나가는데 누군가 등지고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이에 바로 알아차린 도아가 원망의 눈초리로 도진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는 봐달라는 듯 넉살 좋게 미소를 지었다.

기척에 뒤를 돌아본 이는 시현이었다. 도아가 그리 불청객이라 싫은 내색을 비춰도 넉살 좋은 시현은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났다.

“왜 이리 늦장을 피웠는가?”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자네 누이가 남장을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군.”

그는 매일 들고 다니는 부채를 손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도아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랑 저만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나는 또 불청객인 건가?”

“명석하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매섭군.”

진심을 담아 냉랭한 눈길을 보낸 도아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앞장을 섰다. 그 뒤를 무이가 졸졸 따라가려는데 시현이 곁에 다가왔다.

“남장에 복면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군.”

그 말에도 도아는 눈길을 주지 않고, 앞을 보며 걷는가 싶더니 이내 휑하니 가 버렸다.

“자네 누이는 내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네.”

“낯을 가려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게.”

“낯이라? 하하, 그걸 위로라고 하는가?”

“내 딴에는 그런 것인데.”

싱거운 녀석. 시현은 부채로 도진의 가슴을 툭 치며 나란히 걸었다. 그 앞을 걸어가는 도아의 걸음이 유난히도 가벼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