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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1)화 (2/93)

제 1 화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어

비극의 서막이 열리고, 3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사뿐히 움직이는 상궁의 움직임에 나비 촛대를 밝히던 불이 팔랑거렸다. 주안상 앞에는 낮에 국혼을 치르고 비로소 부부가 된 강과 은하가 앉아 있었다. 

합방을 앞둔 부부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싸늘하여 주변에 앉아 있는 상궁들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합환주를 나눠 마시고, 상궁이 합방 일시를 일러 주는 것으로 모든 의식을 끝마쳤다.

이제 처소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나무토막처럼 앉아 있던 강이 술을 가져와 잔을 채웠다. 

고요한 적막 속에 술 따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강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붉은 비단으로 휘감고 앉아 있는 은하를 차갑게 응시했다. 

“한잔하시겠소?”

첫날밤 신부에게, 신랑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신첩은, 괜찮사옵니다.”

겨우 오간 대화란 이것이었다. 건넨 말이 무색하게 잘라내는 은하, 그러고는 내내 눈길 한 번 내어 주질 않았다.

“이제 교태전의 주인은 그대니 숨김없이 말하겠소.”

“…….”

“나는 왕위에 미련이 없소. 하여 언제든 선위하여 밑으로 내려가길 바라오.”

“그러신 분이 어찌하여 왕좌에 계시옵니까?”

남이 봐도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손톱만큼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문하는 은하의 얼굴은 그저 목석이었다.

“그대도 겪어 본바 과인의 모후이신 대비마마의 성정을 파악했을 것이오. 허나 그분이 손목을 긋고 자결하려 한 것은 모를 것이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한결같던 은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서렸다. 강은 다시 잔을 채우고 입에 털어 넣었다.

“측근들이 아니면 모르는 일이지. 워낙 쉬쉬했던 일이라.”

“연유를 물어도 되옵니까?”

“과인 때문에.”

“…….”

“왕위에 뜻이 없다며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거든.”

비워진 잔이 무색하게 다시 술이 넘쳤다. 은하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왕비가 되라 말하던 대비 조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

“모후가 죽겠다는데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지.”

“송구하옵니다.”

강이 용포를 입고 앉아 있는 것은 온전히 대비 조 씨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런 모후께서 중전 자리로 그대의 가문을 택하셨소. 명실상부, 모두가 인정하는 명문 가문, 그래서 그랬소. 그대의 부모에게 낙향하라고.”

“감히, 그 뜻을 알겠나이다.”

“역시 명석하시오.”

어찌 모를까? 제 목숨으로 협박하여 자식을 원치 않는 자리에 앉혀 놓은 어미. 그런 어미가 원하는 최고의 며느리, 가문이었다. 

국혼도 보지 못하고, 쫓겨나듯 지방으로 낙향한 부모를 생각하면 측은지심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중전에게 정혼자가 있었다고 들었소.”

“……!”

“중전이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조부모들 간에 이루어진 정혼이라 들었는데 맞소?”

“예…….”

의연함을 유지하던 은하는 정혼자란 말이 나오자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이내 붉게 칠한 입술로 가련한 눈물이 떨어졌다.

“그 정혼을 부원군과 모후께서 나란히 손잡고 깼다고 들었소.”

“소상히 알고 계시니 신첩이 더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태어나 말을 배우기도 전에 맺은 인연이었다. 순수하게 서로 연모하며 혼인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날벼락은 맞은 것이었다. 

“국혼 내내 얼어붙은 중전의 눈을 보며 어쩌면 우리 두 사람, 서로 원하는 것을 취할 수도 있겠다 싶었소.”

“말씀, 하옵소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가 된 은하의 눈빛에 강은 기분이 좋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나란히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중 반대편의 잔을 집어서 은하에게 내밀었다.

“우리 두 사람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이 부원군과 모후께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오.”

“어마마마께는 후사를, 신첩의 부친에게는 허울뿐인 지위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 좋소.”

비로소 서로가 원하는 바를 밝혀 낸 순간이었다. 

“이 잔은 화합의 의미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그렇게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강이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허공으로 가져와 부딪쳤다.

“위하여.”

처음 맛보는 술이었지만 은하는 두려움 없이 잔에 담겨 있던 술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국혼 첫날밤, 이강과 은하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화합을 다졌다. 

* * *

교태전에 전담 어의가 들어 발을 내리고, 난처한 얼굴로 가느다란 실을 통해 은하의 맥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맥을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고 있는 까닭은 독불장군 대비 조 씨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가?”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

“이번에도 회임이 아니란 말이냐!”

보료에 앉아서 손목을 보이고 앉아 있던 은하는 익숙한 듯 의연한 표정이었다. 김 상궁이 다가와 손목에 묶어 놓았던 실을 풀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 어째서 혼인을 한 지 1년이 되도록 아이 소식이 없단 말인가!”

“송구하옵나이다.”

“허구한 날 그놈에 송구하다는 말은! 말만 하지 말고, 침이든 약이든 무엇이든 써서 중전이 회임을 할 수 있게 하란 말이다!”

“예!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그만 나가 보시게!”

대비의 우렁찬 호통에 쭈그려 앉아 있던 어의가 기다렸다는 듯 도망쳤다. 김 상궁이 발을 정리하는 사이 대비의 시선이 은하에게 향했다.

“중전.”

“예, 어마마마.”

“주상께서 다른 후궁이 있어서 중전을 소박 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하여 합방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1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는 겁니까?”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대비 조 씨는 매일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어의와 은하를 뒤집어 흔들어 놓았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늘 대비 조 씨의 욕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주상께서 후사를 든든히 대비하셔야 만사가 불여튼튼입니다.”

“어마마마를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대비 조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눈매로 은하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일 조회에서 후궁 간택이 발표될 겁니다.”

“…….”

“서운하십니까?”

“신첩이 무능하여 후사를 두지 못했사옵니다. 마땅히 후궁을 두심이 옳으시옵니다.”

“말이라도 그리해 주니 고맙습니다, 중전.”

그 말에 은하가 망극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자 대비 조 씨는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볼 것이니 일어날 것 없습니다.”

“살펴 가시옵소서, 어마마마.”

이 상황에 은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꼬박꼬박 죄인을 행세하며 납작 엎드리는 것뿐이었다.

“중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전하께서 후궁을 두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나가 보게.”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봄의 생기 가득한 향기가 새어 들어왔다.

‘부부간에 몸을 섞질 않으니 애가 생길 턱이 없지.’

국혼 첫날밤에 두 사람이 화합의 잔을 나눠 마시며 한 약조는 아직도 유효했다. 대비 조 씨의 등쌀에도 은하는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모두 대쪽 같은 중전이라 별칭을 붙여 놓았으나 그는 은하의 속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아버지 몰래 알려 드립니다. 마마께서 입궐하시고 그 사람도 그길로 팔도를 유랑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부디 잘 지내시옵소서.」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 뻔했다. 은하는 부부인에게 서신을 받고, 한 시진을 가슴에 서신을 품은 채 숨죽여 울었다. 

‘내 걱정은 말고, 그대가 갈 길을 가면 됩니다. 정혼이 사내에게 흠이 되겠습니까? 나는 그저 대궐에 소문이 나 그대가 난처해질까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이 지경에도 제 걱정이십니까?’

‘내 몸과 마음, 영혼이 모두 그대 것인데 내가 누굴 걱정해야겠습니까?’

정혼이 깨지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인겸은 결국 은하의 두 손을 잡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스산한 바람 한 점이 불어와 은하를 흔들어 놓았다. 

* * *

대전에 앉아 있는 강의 눈이 한 곳을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서책 크기의 그림 족자가 걸려 있었다. 

족자에는 300년 전 멸종했다던 인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인어는 두 팔을 뻗은 채 머리를 너울거리며 꼬리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 손에는 붉은 주머니에서 나온 알이 큰 진주가 들려 있었다. 

“어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한데 볼 수가 없네.”

오래전 강이 세자이던 시절에 바다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가 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잔잔하던 바다는 순식간에 강이 탄 배를 삼켰다.

국본을 집어삼킨 바다, 그 안에 가라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강의 앞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존재가 나타났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따라 다가온 것은, 멸종되었다던 인어였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다가온 인어는 숨결을 밀어 넣어 주듯 강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인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강의 곁에 진주 한 알이 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찾지 못했다더냐?’

‘예, 벌써 보름을 바다에 매달려 샅샅이 뒤졌으나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다고 하옵니다.’

‘너도 내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하느냐?’

‘…….’

‘뭐라고 생각해도 좋다. 찾을 수만 있다면 미치광이 세자라 생각해도 좋다.’

그는 그렇게 몇 달을 미친 듯이 인어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끝내 돌아온 것은 허탈함이었다. 

족자 속 그림은 그날의 기억을 살려 강이 직접 그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오늘처럼 수시로 꺼내 들여다봤다. 

그는 그림을 바라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인어는 강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 * *

이 댁은 좌의정을 지내고 있는 홍치열의 사저로 과거 인어 사냥으로 신분 상승하여 엄청난 재력을 손에 쉰 가문이기도 했다.

이 댁 사저에는 금단의 구역이 있었다. 가족 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곳, 기웃거리기만 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여 언젠가부터 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 치열의 막내딸 도아의 별당이었다. 

별당 안은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안쪽에 하늘을 막아 만든 작은 화원이 있다는 것이다.

겉모습과 다르게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꽃과 나무가 가득해 산속 같았다.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끝에는 호수가 있었다.

촤락,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한밤중에도 불 하나 밝히지 않고도 화원은 환했다. 

이 빛은 맑은 호수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던 도아는 깊은 곳에서 꼬리의 힘으로 헤엄을 쳐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

숨을 내뱉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었다. 도아의 꼬리는 감히 어떤 색이라 말할 수 없게 영롱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 댁 별당에는 ‘인어’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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