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2 꽃이 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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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눈을 깜빡거리며 에이든을 보았다.
“왜그래?”
비올렛의 물음에 에이든은 뭐라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비올렛은 깨끗한 옷을 입은채, 머리를 깔끔히 정돈해 묶어내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기사들 말로는 분명히 가여운 성녀님이 울다 지쳐 쓰러져 죽을 것 같다고 했었는데 왜 멀쩡한 모습일까?
“어, 아니.”
그에 비올렛은 얼굴을 살풋 찡그렸다. 비올렛이 진실을 어렴풋이 깨달아 후작가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그 괴로운 꼴을 보지 못해 며칠간 방황하다 공작이 여러 소식을 듣고 돌아갔더니 생각 외로 그들은 멀쩡한 꼴을 하고 있었다.
“형은?”
“책 읽고 있어.”
그 말에 에이든이 ‘어 그래….’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의 방황이 무색하게도 이들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어디있냐는 모습에 대수롭지 않게 책 읽고 있다고 말하는걸 보면 꼭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이든은 한참동안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차라리 신혼부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형은 괜찮고?”
에이든이 조심스레 물어보자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진 괜찮아. 스승님께서 저주의 독기를 약하게 해주셨거든.”
비올렛의 말에 에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티게르난 공작이 성력을 건네서 에셀먼드에게 이별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어딘가 입맛이 썼다. 그렇게 재수없다 생각했던 티게르난이 결국 자신의 형에게 시간을 주고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그라도 충격이었다.
“공작이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비올렛에게 물었다.
“아, 그러면 네가 티게르난 공작처럼 성력을 형에게 주면 되는 거 아니야?”
비올렛이 눈을 크게 뜨며 에이든을 보았다. 무심결에 나온 희망찬 말이었으나 비올렛의 얼굴이 슬픔으로 흐려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에이든.”
그 무슨 짓을 해도 에셀먼드에게 걸린 저주는 절대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같은 ‘신’이 내린 저주이다. 오히려 체자레가 악기를 내보낸 것이 기적적인 일이다. 에셀먼드에게 걸린 악기를 늦추기 위해 체자레는 성력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생명을 다 쓰고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생명의 값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에셀먼드의 몸에 머문 악기역시 체자레에게 한번 약화되자 발버둥을 치는 듯 비올렛이 불어넣어주려는 성력에 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만약 혈액을 통해서 억지로 주입하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몰랐다.
비올렛의 어두운 얼굴에 에이든이 나지막하게 미안, 이라고 속삭였다. 지금 누구보다 이 저주를 풀고 싶은 것은 비올렛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한참의 침묵후에 비올렛이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두워졌던 분위기가 그나마 풀렸다.
“앤은 끝까지 같이 있을거야?”
“응. 집사와 같이 남을 건가봐. 잭도 남아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해.”
비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든은 그 미소를 멍하게 보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모습. 때가 다가오면 그녀의 손으로 직접 에셀먼드를 죽이게 됨에도 그녀는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비올렛.”
에이든은 너는 괜찮아?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저 억지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둔한 에이든마저 알 수 있었다. 망설이는 그 얼굴을 본 비올렛이 말했다.
“에이든.”
“……응.”
“미안해.”
비올렛이 조용히 사과했다. 그 말에 에이든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미안하다는 말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에셀먼드가 그녀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형과 너는…….”
그렇게 닮을 수가 있는 거지? 에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비올렛은 이곳에 온 것을, 그리고 자신들을 불행에 빠트린 것을 미안하다 사과하고 있었다. 에이든이라고 비올렛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만약 비올렛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니엘도, 에셀먼드도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었을까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언젠가는 그 성격을 드러내 에셀먼드와 부딪혔을 것이고, 그 싸움의 결말이 끔찍했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에셀먼드는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패트리샤와 만나 표면상의 결혼을 지속해서 또 아이를 낳을 것이다. ‘자식’이 아닌, 아버지와 에셀먼드처럼, 무뚝뚝한 인형 같은 '후계자'를.
말룸을 없애고, 비올렛이 후작가에 방문할때마다, 에이든은 에셀먼드가 행복해 하는 얼굴을 보았다. 그녀 자체가 슬픔을 가져왔더라도, 에셀먼드에게 행복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비올렛은 에셀먼드에게 모든 감정을 경험하게 했다.
어차피 이 어그러진 후작가에서는 비올렛이 없어도 참혹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할 필요도, 사과 받을 이유도, 미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인과로 벌어진 일이다. 비올렛을 탓하기엔 그들도 너무나 많은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평소대로 뻔뻔하게 행동해.”
“…….”
“언제나, 사과를 하는 건 나고, 언제나처럼 그걸 무시하란 말이야.”
에이든이 팔짱을 끼며 숨을 들이마쉬더니 말했다.
“오빠는 다 받아줘야 하는 법, 여동생이 오빠한테 사과한다니 그건 좀 이상한거 아냐?”
그 장난스러운 말에 비올렛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런 일이 있어도, 나라가 파괴되더라도 에이든은 비올렛을 여동생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손을 달달 떨며 입을 막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 울지마라.”
에이든이 말하려 했지만 이미 비올렛의 눈가에 눈물이 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든이 한숨을 쉬며 비올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우는 비올렛을 달래고 있으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났다. 언제였더라? 그래, 그때 그 이상한 하녀를 쫓아냈을 때 이 바보같은 계집애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내, 내가 아버지께 말해 볼게.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흑, 흑흑. 진짜예요?
어쩌다보니 방에 단둘이 남게 된 에이든은 당황해서 비올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울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줄 몰랐기에 그런 것이었으나, 그 손길에 비올렛은 울음을 멎었다. 어쩌면 그래,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아이를 형제로 받아들였던게. 에이든은 울고 있는 비올렛을 보았다. 모습만 컸지 이 여자애는 아직도 여리디 여린 그날의 여자아이었다. 어떻게 이 여자아이를 달래줘야 할까 하던 에이든이 겨우 입을 열었다.
“비올렛, 나는 형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
“마지막까지 널 선택한 형이잖아.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거라면, 이젠 됐어. 사실 예전에는 화가 많이 나서 형과 처음으로 다퉜는데. 역시 이상하더라고.”
“…….”
“형이 우릴, 우리 가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거였어. 우린 형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거지.”
이쯤되면 조금은 위로가 된걸까, 그래도 조금은 위로 하는 능력은 상승했는지도. 혼자서 생각하던 에이든은 자신이 또다시 비올렛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든, 미안해.”
“아 진짜,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에이든이 버럭, 소리쳤다. 비올렛은 에이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으며 다시 흐느꼈다. 에이든은 비올렛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무겁게 내리앉았다.
*
“어제 스승님이 왕궁에 오셨습니다.”
샤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린도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심지어 샤를이 오고나서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성하.”
샤를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린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거의 없어 창 너머는 살풍경했지만,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리고 황금색 햇살만은 아름다웠다. 마치 신이라도 강림할 것처럼, 구름 사이의 빛줄기를 바라보던 린도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샤를은 한참동안 린도를 바라보았다. 린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샤를이 왕위에 오르기 훨씬 전, 비올렛의 제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언제나 위축되었다. 어른들은 완성된 존재이며, 그들만의 절대적 기준이 있기에, 미숙한 자신은 그것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는 어른들의 모습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저나름의 고뇌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체자레 티게르난 공작 까지도.
그는 열 네 살이 되었다. 어린 샤를은 이 나이가 되면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샤를은 지금 자신이 성장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열 네 살이면 마법처럼 완벽하게 바뀔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어른들 역시 이렇게 나이만 먹어가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을까. 그저 고민거리가 더욱 더 현실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아이의 고민에서 목숨을 내걸지, 아니면 그대로 방관할지를 결정하는 어른의 고민. 샤를은 그제야 어른들의 본질을 본 것 같았다. 그들 역시 고민을 하는 것은 똑같다. 그들도 답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하고 그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성하, 스승님과, 후작을 보셨습니까?”
린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비올렛이 자신이 하겠다고 선언하고 후작가를 떠난 린도는 비올렛과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왔던 어전회의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아마 비올렛의 성력을 감지해서 그런 것일 터였다.
“서른 해를 넘게 살았음에도, 나는 아직도 겁쟁이인가 봅니다.”
린도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다 큰 청년이었으나 린도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무서워하는 것인가. 비올렛과 에셀먼드가 자신을 미워할까봐? 아니면 목숨을 내걸고 죽는 게?샤를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질문은 린도를 상처입힐 것 같아서였다.
만약 샤를이 린도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일을 하지 않도록 목숨을 내거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직도 샤를은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의 아버지가 준 독을 먹고, 체자레가 이끄는 군대가 왕성을 온다는 소리를 듣기 전에, 목숨을 내걸고자 했건만 사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다. 어른들이 그저 몸만 큰 아이들이라면, 린도는 절대로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린도는 분명 용기있는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성하, 스승님을 뵈러 갑시다.”
“…….”
“그리고, 후작, 아니, 에드 경을 보러 가요.”
샤를이 손을 뻗어 린도의 손을 잡았다. 린도의 물기어린 눈이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은 힘주어 말했다.
“가서 직접 보고, 확인합시다.”
비올렛에게 소임을 떠넘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샤를은 뒷말을 생략했다. 샤를의 호박색 눈을 바라보던 린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큰 어른을 열네 살 먹은 소년이 이끄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모양새였으나,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샤를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황폐해 보이는 후작가에 린도와 샤를이 도착하자, 후작가 주변에 포진해있던 로디온을 포함한 성기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성기사들은 모든 진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비밀을 맹세한자들로서 철저하게 후작가를 지키고 있었다. 후작가에 들어가는 철문 앞에 린도가 망설였다.
“성하.”
샤를이 말했다. 린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문이 열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후작가 안으로 발걸음 했다. 어쩐지 불안해서 옆을 보니 샤를이 안심하라는 듯 따라오고 있었다. 서른이나 먹어서 이렇게 겁쟁이 같아서야. 린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이면 후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시간이네요.”
“…….”
샤를이 그렇게 말하며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후작가에 있는 후원으로 향했다. 린도는 샤를을 조용히 따라갔다. 후작가의 관리되지 않은 정원을 지나친 그들은 저택의 뒤를 돌았다. 린도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잠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후원은 이미 꽃이 져버려 황폐해져 있었다. 그 황량한 정원 너머, 예배당으로 향하는 계단위에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흙바닥 위에 앉아있는 책을 펼치며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의 말에 남자가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남자가 무엇이라 말을 하자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 자체로도 완벽해서 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잔혹한 최후에 다가서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다.
“…….”
린도의 두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이것이 샤를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저들이 내린 답이었다. 체자레가 말한 아름다운 이별. 그것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에셀먼드가 인기척을 눈치 챈 것인지 무어라 속삭이며 비올렛의 어깨를 감쌌다. 비올렛이 고개를 들다, 린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햇살은 부드럽게 비올렛을 내리쬐었으며, 그녀의 미소를 황금색으로 빛나게 했다. 린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 사이에, 이제 슬픔은 존재하지 않았단다. 모든 것을 끝맺는 잔혹한 저주따윈 사라진 것처럼 보였어. 언제나 슬픔으로 흐려져 있던 성녀의 얼굴은 맑게 개였고, 얼음같이 냉혹한 기사역시 따스한 미소를 지었단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어. 황폐한 제비꽃밭에 있음에도, 마치 그들 사이에는 봄이 온 것 같았지. 1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말이야. 그들은 마지막까지……그래,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단다.]
*
“에드! 일어나봐요!”
그가 있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비올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지않은 큰 목소리에 눈을 뜬 에셀먼드가 몸을 긴장시켰다. 몸을 일으킨 에셀먼드를 바라보던 비올렛은 멈칫 했다. 그의 눈동자가 더없이 붉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를 감싸는 악기역시도 더욱 짙어져 있었다. 비올렛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놀란 기색을 지우며 애써 미소를 보냈다. 에셀먼드가 비올렛의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 챘다.
“무슨 일입니까?”
그 물음에 비올렛은 대답대신 창으로 걸어가 커튼을 열었다. 시린 달빛이 눈에 비쳤다. 그에 에셀먼드가 눈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반짝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빛가루들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고 있어요.”
창가에 선 비올렛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난것인가, 에셀먼드가 조용히 생각했다.
“구경 나가요.”
“감기 걸릴겁니다.”
“첫눈인데요?”
비올렛이 간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에셀먼드가 마지못해 한숨을 쉬며 가자고 말했다. 그에 비올렛은 에셀먼드의 팔에 팔짱을 꼈다.
“첫눈치고는 많이 내리네요.”
굵은 눈발을 보며 비올렛이 말했다. 그녀가 하늘로 손을 뻗자 하늘하늘 거리는 눈송이가 비올렛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비올렛이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불었다. 에셀먼드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쌓일까요? 그럼 집사가 고생할텐데.”
눈이 내리면 당연하겠지만 마차가 길을 다니기 힘들어진다. 언제나 식료품을 보급받은 마차가 오지 못할수도 있었다. 집사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는게 아니니까. 비올렛이 어둡게 생각했다.
“이상하네요, 눈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아, 생각해보니 작년 첫눈은 감옥에서 봤었죠.”
비올렛이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말하자 에셀먼드가 비올렛의 손을 꽉 잡았다. 그에 에셀먼드의 마음이 느껴져 비올렛은 미소를 지었다. 거친 손의 감촉이 비올렛의 작은 손을 따스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역시도.
“참 이상해요, 손을 잡으면 언제나 안심이 돼.”
“…….”
“에드의 이 손만 잡으면 언제나 안심이 돼요.”
그 말에 하얀 눈을 바라보던 에셀먼드가 말했다.
“그거야, 어렸을때도 언제나 제 손을 잡고 귀가하지 않으셨습니까.”
“…….”
비올렛은 그제야 떠올렸다. 예전 체자레의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에셀먼드를 보면 안심이 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래, 그때도 겨울이었다. 언제나 손을 잡고, 정원에서 이곳 현관까지 걸어왔다. 그때 비올렛은 그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난 그때 이후로 자라지 않았네요.”
비올렛의 말에 에셀먼드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냐고 묻고 있었다.
“지금도 당신의 손이 제일 좋거든요.”
그 말에 에셀먼드가 피식 웃었다. 에셀먼드는 요새 자주 미소를 지었지만 소리내어 웃는 것은 매우 드문일이라 비올렛의 얼굴이 덩달아 밝아졌다. 기분이 들뜬 비올렛이 재잘거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같이 눈을 보네요. 생각해 보니 이렇게 편하게 눈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에셀먼드를 앞질러 걸어간 비올렛은 두 팔을 벌려 눈을 맞고 있었다. 아름다운 은빛의 가루를 뿌림에도, 달빛은 잿빛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도 눈꺼풀에도 눈이 내렸다. 얼굴에 내린 눈꽃송이가 녹아서 흘러내렸다. 그때 비올렛은 등에 따스한 감촉을 느꼈다. 에셀먼드가 두 팔로 비올렛의 어깨와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귀가에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생일.”
“네?”
“당신의 생일이 다가옵니다.”
“아아.”
비올렛의 생일은 겨울이었다. 그녀의 생일까진 한달이 남았다. 이제 그녀도 열 아홉이구나. 비올렛은 멍하게 생각했다.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에셀먼드의 말에 비올렛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 얼굴을 찡그렸다. 에셀먼드는 비올렛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올렛은 애써 미소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글쎄요, 책을 읽겠죠? 지난번에 읽어줬던 동화처럼.”
“또.”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거예요, 잭이 온 힘을 다해 만들어줄거거든요.”
“또.”
“스승님의 무덤에 찾아가볼까 해요.”
“또.”
에셀먼드의 집요한 물음에 비올렛의 입가에 낮은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것을 눈치챈 에셀먼드가 비올렛을 돌려 세웠다.
“혼자서 눈을 맞으며 당신을 추억할 거예요.”
그녀의 흐느낌은 하얗게 내리는 눈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올렛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에셀먼드는 그녀의 생일에 자신이 없을 것을 알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도저히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드, 정말 이상하죠. 정말 이상해. 왜 ‘고난을 견디면 행복해 진다’고 말하는 걸까요.”
“…….”
“그렇다면 왜 ‘과거가 더 좋았다.’라는 말이 생기는 거죠?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면, 그리고 그 고난을 보상받았다면 그런 말이 존재할리가 없잖아.”
“…….”
“에드, 난 말이에요. 그 어렸을 때도 내가 제일 불행하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말룸을 없애면 분명 행복한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죠? 지금은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
울컥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비올렛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로, 아무것도 걱정 없었던 그때로. 당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을 잃을거란 사실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냥 내 불행만 걱정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할 거야. 그런 이상한 맹세 따윈 하지 않게, 또 전쟁터 따윈 가지 않게 할 거야. 아니, 아니, 그냥 신전으로 들어간다고 선택했을 거야…….”
비올렛이 울음을 참느라 횡설수설하게 말하자 에셀먼드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겨울바람을 쐰 그의 품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싸늘하게 식어 내린 품에 안기면서도 비올렛은 울음을 참느라 몸을 들썩였다.
“나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거짓말. 삶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이 가장 비참한 죽음을 택할 사람이 그럴 리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비올렛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다. 비올렛은 그의 품에 안겨 또 울음을 터트렸다. 절대 울지 않기로 해놓고서, 정작 에셀먼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한심하게 울고 있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았다. 끅, 끅 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결국 울음을 삼키는데 성공한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그를 보며 말했다.
“아니야, 이젠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요. 에드.”
“…….”
“열아홉 번째 생일도, 즐겁게 보낼 거예요. 그 생일이 지나면 모든 게 끝나있을 테니까. 폐하도, 린도도, 앤도, 모두 다 함께 불러서. 정말로 즐거운 식사를 할 거예요. 당신이 안어울린다는 예쁜 옷도 입을거고 살이 찐다 해도 달콤한 것들은 다 먹을거야, 지금껏 못 웃었던 만큼 크게 웃을 거예요.”
“다시 바다도 보러 갈거예요. 바다가 얼마나 예쁜데. 이자카에게도 고맙다고 말하러 갈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사귄 내 친구들에게도 나는 잘 지낸다고 말해야지.”
“…….”
“그리고 봄이, 봄이 다시 오면 이 황량한 후원에 다시 제비꽃을 피울 거야. 그래서 영원히 지지 않게 할 거예요. 아니, 제비꽃 따윈, 이제 내가 심고 싶은 곳 어디든 다 심어버릴 거야. 당신이 없어도……당신이 없어도, 이젠 내 나름의 행복을 찾을 거예요.”
에셀먼드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비올렛은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의 핏빛의 붉은 눈동자는 시간의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에셀먼드가 비올렛의 눈물을 엄지손으로 닦으며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 부드러운 혀가 밀려들어오며 비올렛은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의 입맞춤은 애욕의 뜨거움보다는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비올렛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비올렛을 대해왔다. 비올렛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에셀먼드는 언제나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를 ‘욕심을 부리게 될까봐.’ 라고 말했다.
눈물이 섞인 축축하고 찝찔한 입맞춤이 끝이 나고, 에셀먼드가 조용하게 말했다.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돼.”
그 말에 분명 이상해보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비올렛은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체자레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이별의 시간을 지키려, 결국 비올렛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지 못해, 그녀 외면하려 했던 그의 마음을 위해서 비올렛은 오늘도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단다. 어쩌면 성녀는 또다시 신을 저주했을수도 있고, 기사는 마지막으로 애타는 사랑을 노래했을 수도 있어. 또 어쩌면, 서로의 원망했을지도 모르고, 신이 죽고 없어진 예배당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지도 모르지. 그 누구도 그걸 알지 못해.
-그리고, 시간이 되었어.]
============================ 작품 후기 ============================
새벽 3시까지 추천수 2000코멘트 200개넘으면 연참할게요
왜 이렇게 조건이 높냐구요? 왜냐면 다담편이 마지막이니까. 4월 10일이 아니라 4월 9일 완결을 내구 싶어서.. 머...완결 하루 늦게보시고 싶으시면 안하셔도 돼여! 비꼬는거아냐! 그냥 내가 추천많이받구 싶어서 구래요 ㅠㅠ
그게 오늘 완결까지 썼눈데.. 인간적으로 저 칭찬해주셔야하는거아녀요? 흑흑 내일은 에필로그 쓸거라구..
2. 다음곡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리베라 합창단의 곡이에요. 이곡을 들으면 완결 전 bgm이라고하죠.. 머 트위터에 미리 공개하고 잘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다른 말은 완결, 에필로그후 작품후기에서 말할래요.
3. 손세희작가님 맞아.. 후원쿠폰 감사합니다(엎드려 절해드리기) 다만 후원쿠폰은 그냥 기프티콘으로 보내주세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