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9 꽃이 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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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렛이 떠났대.”
에이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입술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에셀먼드의 표정은 언제나와 똑같았다.
“형, 뭐라고 말좀 해봐!”
에이든은 이 순간마저 조각상처럼 굳은 얼굴을 한 자신의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듯 드디어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는 자신의 형이었다. 지금은 한여름인데 더욱더 단단한 얼음 속에 얼어붙은 듯,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에셀먼드는 마치 겨울과도 같았다.
“에이든.”
에셀먼드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든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를 원망하지 마라.”
“…….”
에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원망 같은걸 한다고……! 내가 지금 원망하는 건 형이란 말이야!”
“…….”
그 말에 에셀먼드의 딱딱한 얼굴에 미미한 곡선이 덧그려졌다. 그것은 아주 희미해서, 둔감한 에이든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에이든은 분노할 뿐이었다. 비올렛을 원망하는게 걱정인가! 지금 걱정할 건 형 자신이 아닌가.
“무책임한 것도 정도가 있지, 비올렛을 쫓아서 후계자 자리도 나한테 내던지고, 이젠 목숨까지 내버리겠다고?”
“에이든.”
에이든은 에셀먼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에이든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이든은 그 결정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 에이든이 에셀먼드의 마음을 눈치챘을때도 에셀먼드는 똑같은 소리를 하며 비올렛을 원망하지 말라 했다.
“형, 이건 달라. 다르단 말이야. 형이 나를 버리는 것과, 형이 세상을 떠나는게 어떻게 같아.”
“…….”
“우린 기사니까, 언젠가 이런식으로 이별할 수도 있다 생각했어, 나라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게 아니야! 하지만! 형…….”
에이든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보였다. 에셀먼드는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국과 같은 푸른색에 가깝던 그의 눈동자 색은, 어느샌가 제비꽃 색처럼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낯선 눈동자를 보며 에이든이 말했다.
“죽을걸 안다고 마지막까지 형의 감정을 숨겨서는 안 돼 제발……”
비올렛이 떠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함께하려 했던 비올렛이. 에이든은 에셀먼드가 비올렛에게 가지는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올렛을 흠모하던 구자르트의 카칸에게 그녀를 건네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보지 않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 결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왜 그는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인가. 에이든은 그제야 에셀먼드의 결핍이 보였다. 에이든은 자신만의 인생에 골몰하느라 맏형인 에셀먼드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몰랐다. 그저 조용하고 무뚝뚝한 성격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까지 감정을 절제할 줄은 몰랐다. 울고있는 에이든을 향해 에셀먼드가 말했다.
“만약 내가 다니엘을 질투하여 증오했다는 말을 한다면 만족할거냐, 에이드리언?”
그 말에 에이든의 흐느낌이 멎었다. 다니엘은 그들 사이의 금기어였다. 비올렛마저도 한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없는 사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의 둘째. 미워하는, 그러나 또 미워할 수 없는 자신들의 형제였다.
에이든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질투라는 단어가 존재 했었나. 같은 형제인 다니엘에게? 에셀먼드는 설명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내 감정의 맨얼굴은 추할뿐이다.”
*
“성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답니까?”
라이셀 백작이 샤를의 말을 전해 듣고 한 대답이었다. 비올렛을 보내고, 에셀먼드가 말룸화가 되기 전 그는 린도와 함께 후작령의 외딴 지방에 최후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송을 떠맡기로 한 린도는 별안간 에셀먼드가 이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당연하겠지만, 수도에 말룸이 나타나게 된다면…….”
“백성들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샤를이 정석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라이셀 백작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수도를 일시적으로 옮겨야 하는 것인가? 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니, 이곳의 거주민들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업적 활동은 어찌 되는 것인가? 나라의 손해가 막심했다. 아그레시아의 경제가 마비되고, 국왕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릴 것이다.
“당연히 안 될 일입니다.”
라이셀 백작이 말했다.
“에셀먼드 경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간단할 일입니다. 계획했던 대로 인구가 없는 마을로 그를 내려 보내면 됩니다. 혹여나 수도에 누군가가 남아있으면 어찌하시려 그럽니까? 그때 성하와 후작의 싸움에 누군가 끼어들게 된다면?”
백작의 말은 타당했다. 수도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말룸이 된 에셀먼드와 린도의 싸움에 누군가가 끼어들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었다.
“어차피 싸움은 소규모로 일어날 예정입니다.”
샤를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린도에게서 온 서한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니 뗄 수 없었다는게 맞았다.
“폐하.”
“수도의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대신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논의해 봅시다.”
“폐하!”
라이셀 백작은 샤를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샤를이 서한에서 고개를 떼어, 라이셀 백작을 보았다. 샤를의 두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샤를은 계속해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 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호박색 눈은 충혈되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못합니다, 도저히 못합니다……제가, 어떻게 이 부탁을 거절합니까.”
샤를이 고개를 숙이자 두 눈이 떨어졌다. 샤를이 내민 서한을 받아든 라이셀 백작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린도가 쓴 내용은 아주 짧은 내용이었다.
에셀먼드가 후작가에서 떠나려 하자, 마치 결계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룸화가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말룸이 될 것처럼 에셀먼드 안에서 악기가 피어올라 퍼지기 시작했다. 그에 당황한 린도가 그를 후작가 안으로 보내자 악기가 진정되었으며, 말룸화 역시 다시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린도는 성력이 없던 에셀먼드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버텼는지에 대해 내린 답을 편지에 서술하고 있었다.
-폐하. 이곳은, 비올렛이 이곳에서 6년동안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삶을 보냈든 후작가는 그녀의 삶이 깃든 곳입니다. 비올렛이 은연중에 흘린 성력이 이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후작가는 그녀가 모든 감정을 느꼈던 장소였다. 그녀가 어렸을 적, 그 어떤 증오도 지니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을 때, 기쁨으로 꽃을 피우기도 했고, 슬픔과 배신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증오와 사랑에 애탄 나머지 스스로 삶을 포기했기에 흘렸던 피가 후작가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 후작가는 비올렛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특히 에르멘가르트 후작가, 후원에 핀 제비꽃에 담긴 성력이 그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사랑과 행복까지도.
-후작이 처음으로 요청했습니다. 이곳에서, 그 제비꽃 밭속에서 모든 걸 끝내고 싶다고. 폐하. 그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마침내 침묵하던 기사는 처음으로 왕과 교황에게 간청했단다. 그가 최후를 맞을 장소를 그곳, 자신의 가문 후원으로 해달라고. 그리고 왕과 교황은, 결국 그 부탁을 받아들였단다. 그것이 기사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 그들은 처음으로 개인을 위해 그들을 ‘희생’하기로 선택했단다. 용렬한 지도자가 되더라도, 성력을 잃고 목숨마저 잃게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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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인 에셀먼드가 하던 일은 에이든이 거의 전담하기 시작했으며. 저택안에 있는 사용인들은 대부분 내보내졌다. 에셀먼드는 집사와 앤을 비롯한 몇몇 오래된 사용인들만이 남겼고, 후작가 주변에는 성기사들이 기거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기운이 후작가를 감돌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길 때면, 에셀먼드는 자신 안에 있는 폭력적인 본능이 나타난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러한 충동이 들 때마다 눈이 조금씩 붉게 변이해 간다는 것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있었다. 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에셀먼드는 자신이 말룸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저녁이 되면 끔찍한 신을 저주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셀먼드는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허무신 역시 이것을 예상했기에 에셀먼드에게 ‘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이다. 에셀먼드가 저주를 대신 받음으로써 저주의 비밀이 풀렸고. 인간들은 그 내기에 ‘이길 수는’없지만, 내기 자체를 무효화 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허무신은 그 앙갚음으로 에셀먼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미 허무신이 원했던 신을 저주하고 아니고는 상관이 없었다. 저주가 무효화 되더라도 그가 목숨을 잃을 것을 알기에. 심혈을 기울여 짠 내기의 판이 결국 인간에 의해 변형되더니 인간에 의해 끝나려고 한다. 허무신은 그것에 분노해 날뛰고 있었다. 차라리 에셀먼드가 신을 저주하게 만들어 바로 말룸이 되게 만들어 버릴 모양이었지만, 에셀먼드는 의외로 무덤하게 잘 버텨내고 있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교황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리가 들렸다. 린도는 말룸의 재림을 주장하며 수도에서 벗어나 일시적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귀족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그들 역시 이따금 수도에 밤이 찾아오면 스산한 악기의 존재를 느끼고 점점 린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린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나날들은 계속해서 지났다. 차라리 신을 저주하여 빠른 안식을 지니는게 좋다 생각할 정도로 모든 상황들이 에셀먼드를 몰아갔다.
여름의 하늘은 맑았으며, 구름이 유유자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떠올리던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카는 분명히 비올렛을 극진하게 대우할 것이다. 그렇게나 욕망하고 탐하던 여자였으니, 자신에게 보란 듯이 행복하게 만들 것이 뻔했다. 그곳에서 비올렛은 더욱 행복해 질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몰랐다. 이곳은, 그리고 이곳에 태어난 자신은, 언제나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비올렛의 의무를 강요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구자르트가 그녀에게도 행복할 것이었다.
말간 하늘색 눈동자에 서리던 미소를 떠올린다. 듣기로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나라를 떠났다 했다. 일부러 기사들을 보내고, 사막에 두라 지시했으니, 그녀는 에셀먼드를 원망할 것이었다. 분명 그 두 눈에 눈물이 서렸으리라. 어쩌면 또다시 그를 원망하여 열두살의 그녀처럼 마음을 닫아버렸을지도 몰랐다.
-에드.
비올렛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에셀먼드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발걸음으로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후작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는 복도를 걷고, 계단을 걸어, 현관을 열어 정원으로 걸어갔다.
정원에는 나비들에게 겁을 집어먹은 어린 비올렛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에셀먼드와 눈이마주치자 비올렛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에셀먼드는 다시 저택 안으로 발걸음하려 현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발걸음이 멎었다.
어느 겨울날 비올렛은 언제나 이곳에서 서 있었다. 에셀먼드는 그녀가 겨울에 산책이라도 즐기는 줄 알고 몇 번 그것을 무시했다. 그날은 추운 날씨인지라 에셀먼드는 드물게 그녀를 불렀다. 에셀먼드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다 보니 어린 비올렛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체자레의 공작령에서 충격을 받은 비올렛은 에셀먼드의 손을 잡고 언제나 집에 들어왔다 정원에서 현관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비올렛은 그의 손이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듯 꼬옥 잡고 의지하며 안심한 듯 웃음 지었다. 에셀먼드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걸려 하자, 소녀는 사라져버렸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그는 그녀의 인영을 찾아 헤매다 후원에 도착했다. 후원안에는 비올렛의 여러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비올렛은 언제나 울때면 후원의 한구석에 숨어 울고는 했다. 그는 울고 있는 비올렛의 인영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시선을 준 곳은 단 한 곳, 후원에 핀 제비꽃위에 맨발로 서서 하얗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에셀먼드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그 여인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에셀먼드는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그녀의 이름을 가진 꽃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꽃들이 오래 피었으면 좋겠다던 염원을 들어준 것인지 제비꽃들은 꽤나 오래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다한것인지 꽃들이 점점 저물어가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그 꽃잎들을 그러모아 그의 코와 잎에 대었다. 짙은 풀향과 함께 너무나 가녀린 향기가 코 끝에 스쳤다. 그는 그 꽃향기를 맡으려 했지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가 심었던 제비꽃은 처참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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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들어서고, 후작가의 후원에는 제비꽃이 져 가고 있었다. 린도는 후원에 있는 제비꽃을 보다, 한숨을 쉬며 후작가 안으로 들어갔다. 생생하게 피어있던 제비꽃이 져가고 있는 것은, 이제 그에게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에셀먼드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포도주색 벨벳 휘장이 쳐진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아. 린도는 남자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넌 언제나와 똑같군.”
그 말에 에셀먼드가 줄곧 바라보던 벽에서 고개를 돌려 린도를 바라보았다.
“제게 무엇을 바랍니까?”
“…….”
“이미 떠난 사람입니다.”
남자의 어투는 서늘하고 냉정했다. 그에 린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떠난 사람이라고? 떠나 보낸 게 에셀먼드다. 린도는 정말로 그가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심지어 자신도, 그 결심을 내리고 하겠다 해놓고서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눈물을 보였었다. 린도가 그러했는데, 에셀먼드는 지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정이 있는건가? 비올렛에 대한 그리움은 없나? 애정이 있었던 것인가? 그가 맞이할 파멸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그의 냉정한 태도는 그것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정말, 너는 때론 나보다 더 인간이 아닌 것 같아.”
“…….”
“가끔 가다 소름끼칠 정도야.”
그 말에도 에셀먼드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눈색을 본 린도는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의 눈색은 이제 거의 붉은색에 다가가 있었다. 이제 앞으로 얼마나 남은 것인가.
린도는 주먹을 쥐었다.
“잘 지내고 있대.”
“…….”
“카칸의 여자들이 잘 대해주나봐. 바다도 보고, 활짝 웃었대.”
“그렇습니까.”
그 말에 에셀먼드가 고저없는 어투로 말했다. 그가 이자카에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사지에 내몰고 혼자 웃고있는 비올렛에게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는데, 잘 적응한 모양이야. 그 나라 사람들도 비올렛을 환영하고 있어. 그 코끼리란 거대 생물로부터 나라를 구했대.”
“…….”
“그앤 사랑받을만한 아이잖아. 이곳이 이상했던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린도는 문득 화가 났다. 같은 죽음의 동반자임에도, 그는 의연했고, 린도는 너무나 괴로웠다. 벽을 바라보고 있는 에셀먼드를 보고 그는 ‘칫’하고 혀를 차며 화가 난 듯 자리를 떠났다.
다시 방에 에셀먼드가 나갔다. 그는 계속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휘장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휘장을 걷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활짝 웃었대.
언젠가, 바다를 보겠노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셀먼드는 그때 비올렛이 자신을 곁에 두지 않을거라 예상했고, 더욱더 그녀에게 매달렸다. 활짝 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줄을 당겨 휘장을 올렸다. 포도주색 휘장이 올라가며, 초상화가 서서히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 선홍색 입술, 아름다운 어깨를 뒤덮는 금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제비꽃색 눈동자. 여자는 눈에 별을 담은 듯 총총한 눈을 빛내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 액자에 담긴 초상화 속의 여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초상화속의 그녀는 더이상 성녀가 아니었다. 이마에 성흔도 없고 머리는 신성으로 물든 은색이 아니었다. 눈 색 역시도 마찬가지. 저 후원에 핀 제비꽃과 같은 색이었다.
에셀먼드는 이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후원의 제비꽃 속에서 순간 보였던, 성녀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여자로서의 모습을 한 채, 여자는 비밀스럽고 수줍은 미소를 짓고 에셀먼드에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덧그리고 또 덧그리는 휘장속 초상화의 이 모습을 왜 모르겠는가. 손가락 모양, 입술의 곡선, 그 머리의 은은한 광택마저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초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은.
-활짝 웃었대.
아무리 그라도 얻지 못한 것을 자꾸 상상해서 갈망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 역시 갈망하는 것이 있었다. 너무나 가지고 싶지만 가지고 싶지 않은 갈망에 고통스럽고 싶지 않았다. 목이 불에 타듯 뜨거웠다. 그는 자신의 여인의 사랑스러운 뺨을 손으로 쓸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 대신 서늘한 벽의 온기만이 닿았다. 그러나 계속 쓰다듬으면 그것이 따스한 감촉이 될까봐, 그는 초상화속 비올렛의 뺨을 쓸고 또 쓸었다.
이렇게 원하고 원한다. 그럼에도 닿을 수 없다. 지극히 희생적인 결정이며, 그녀를 위한 결정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의 이기심이 닿아 있었다. 마지막 순간마저 고통에 겨워하는 의무를 쥐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에 고통에 겨워하는 비올렛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너져갈 비올렛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에셀먼드는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그녀의 모습이, 저 초상화 속 모습처럼 활짝 웃는 모습이길 바랐다. 가지지 못해 애타하는 그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그의 마음을 앗아갔던 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길 바랐다.
초상화에 닿았던 손이 떨어졌다. 그는 피처럼 붉게 물든 눈으로 초상화 속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현명하니 마지막 진실을 알아차릴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생명은 이미 다한 뒤일 것이다. 자신이 죽은 것을 알면 그녀는 웃을 것인가 울 것인가. 분명 눈물짓고 괴로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올렛이 행복을 찾아갈 것을 믿었다. 언제나 다시 피어나는 가냘픈 제비꽃처럼, 그녀는 다시 피어날 것이다. 죽어 멈춰진 그의 시간속이 아니라, 흘러가는 그녀만의 시간 속에서 반짝거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바다를 보며 미소를 짓듯이,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며 또 미소를 지으리.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시간 속에, 영원히 아름다우라.
그는 초상화속 비올렛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 그러나 초상화 속에 느껴진 것은 따스한 숨결이 아닌 차가운 감촉이었다.
============================ 작품 후기 ============================
1. 이번편 까지 회상편 끝입니다. 사실 아름답다 라는 형용사는 명령어로 쓰일 수 없는데.. 머랄까 이건 소설적 허용으로 봐주십쇼.
2. 내일은.. 어 마지막 교정이므로 휴재! 그담부터 일일연재 전환하겟습니다. 완결일은 4월 10일까지입니다. 14일 1,2부 습작이옵니다.
3. 회상편 계산해보니 거의 60키바네요..핳. 봐 내가 쓰는 속도가 느린게 아니엿어!!
4.이제 곧완결~~~ 이네요 다음편 브금은.. 미리 알려주면 분위기 짐작될것같아 하지 않을거여요.. 아 브금은 BGM입니다..그냥 브금이라고도 읽어요 ㅋㅋㅋ
5. 에드의 반전까지 본 솔라레메게톤 유안나 작가님이 했던 한줄 평.
"작가님 소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거꾸로 말한건가요?"
1부 비올렛 멘탈 박살
2부 후작가 박살
3부 아그레시아 박살
4부 세상 박살
그러네요(...)
아 후원쿠폰 보내주신 분들, ㉧ㅣ㉣ㅏ㉦ㅑ님,페르샨괭이님,뽕둥이님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