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7 꽃이 지다 =========================================================================
-네게 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괜찮아. 너와 나 사이에 시간은 아주 많이 남아있으니, 아니, 아니, 아주 짧은 시간이겠구나. 넌 정말 운이 없군.
꿈속에서 그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것이 '목소리'인가 하면, 또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또 그것을 '소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목소리였다.
-신의 아이가 아니니,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네게 매일 매일 속삭였지. 그래도 지금은 어때, 네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하고 있단다.
기분나쁜 목소리였다. 그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바로 그의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더욱 커졌다. 마치 벗어날 수 없다는 듯.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보여준 영상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너는 서른 두명의 죽은 아이에 대해 찾아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은 찾지 못했잖아?
그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잘 들어, 이게 네가 ‘들어야 할’ 말이야.
눈을 뜨려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게 선택 받은건 네가 되어 버렸거든, 어리석고 불행한 아이야.
허무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분하지만, 이 내기도 이제 슬슬 막바지를 향해 다가가잖아?
큭큭,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자신을 허무의 의지, 즉, 허무신이라 표현한 존재는 계속해서 속살거렸다.
-자아, 이제 마지막이니 마음껏 발버둥 쳐봐라, 어리석은 피조물들아.
그날은, 비올렛이 공작령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허무신이 내린 꿈을, 비올렛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잠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끊겨버렸으나, 에셀먼드는 그녀를 보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에셀먼드는 꿈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정확했다. 모든 일은 그녀를 배웅하고 난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비올렛을 보았다. 여자는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곁에 남겠노라고 말했다. 에셀먼드는 그래서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떠난 그녀를 기다리는 것 마저도, 미래의 행복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니 견딜만 했다.
-너,너! 참 독한놈이구나?
다시 한번 귓가에 강력한 의지가 들었다. 이번에는 분노마저 깃든 의지였다. 에셀먼드는 갑자기 밀려오는 수마에 저항하려 했다.
-의지 하나만으로 내 꿈에서 벗어난 점은 인정해 주마.
“에드 경!”
“형!”
저항할 수 없는 수마에 붙들려,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이번에 허무신의 손아귀에 들어간 에셀먼드는 실컷 그 진실을 들어야 했다.
*
“괜찮아 형?”
에이든은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은 에셀먼드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에 이어, 형마저 같은 병에 걸렸나 걱정까지 들었다. 의원이 단순히 수면을 취하는 거라 말하자, 그는 너무나 허탈했다.
“형, 요새 잠을 못자면, 잠은 후작가에서 좀 자주라. 왕실기사단 단장이 폐하의 어전앞에서 쓰러져 잠들다니, 이건 우리 가문의 수치 아니야? 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겠다.”
“........”
“형?”
에셀먼드는 말 없이 자신의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서늘한 어투로 에이든에게 물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반나절 정도? 벌써 저녁이라고.”
그 말에 에셀먼드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뭐? 이시간에?”
에이든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무나 뜬금없는 그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지금 잠이 덜깬거지? 기사단의 단장이 지금 쓰러진 것도 모자라 폐하께서 너그러이 봐주시고 방까지 내어주셨는데, 따로 약속 없이 폐하를 알현해야겠다고?”
에셀먼드는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하고 급하게 뛰쳐 나갔다. 그런 형을 본 에이든은 완전히 미쳤다며 중얼거렸다. 에이든은 더 미친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에셀먼드가 그 길로 바로 수도를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
“........”
샤를루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재상인 라이셀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샤를은 자신의 앞에 있는 에셀먼드와 린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셀먼드는 불과 하루 전 그에게 티게르난 공작령의 방문 허가를 요청했다가 교황과 함께 돌아온 상황이었다. 왕좌 아래에 서 있는 린도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그는 숨을 내쉴수가 없었다. 그가 들은 진실이 진정 맞단 말인가?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마치 동화를 들은것 처럼 비현실적인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그들을 못믿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들은 진실이 너무나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걸 믿으라고.......”
“폐하께서도 167대 아스토르가 국왕 폐하와 류스프리드 교황이 나눈 밀서가 진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다니엘이 찾아내 선대 국왕, 트라이덴에게 바친'성녀가 있기 에 말룸이 존재한다, 성녀를 죽여라' 라고 적혀진 문서는 타인들 에게 조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 날인은 진실된 것이었다. 성녀라는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위험 때문에 샤를은 그것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에셀먼드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던 것은 비올렛이 ‘성녀가 있기에 말룸이 존재한다’ 라는 문구를 알고 있다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비올렛이 결코 그를 싫어하지 않음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샤를이 보기에도 그 둘의 관계가 너무 애틋했으니. 왕으로서 그것을 숨겨야 했음에도 자신의 스승도, 이 기사도 행복해지길 바랐던 작은 마음에서 보여준 사실이었다. 에셀먼드는 그것을 알고 말룸을 퇴치하러 떠난 비올렛을 쫓아갔었다.
그러나 그 문서가 잔혹한 진실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아니, 아닐겁니다.”
어떻게 성녀가 다음대 말룸이 된단 말인가.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아닐겁니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샤를은 비올렛과 린도가 처음으로 진실을 들었던 것처럼 거부하고 있었다.
“성녀가 말룸이 되는 저주를 받고 있다니.”
그렇다면 저들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힘든 세월을 견뎌낸 것인가. 믿을 수 없었다. 샤를은 진실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을 믿기에 그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왜! 뭐가 부족하다고!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또!”
이상하다. 분명히 저들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 노력이 행복으로 보상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왜 성녀는 말룸이 되는 것인가! 그가 신경질적으로 린도와 에셀먼드에게 소리쳤다. 그들 역시 그 진실 앞에 피해자일 뿐인데 샤를은 억울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신은 자애로 이루어 졌다지 않았나! 이게 무슨 자애인가! 어떻게 피조물을 가지고 내기를 할 수가 있는가! 그게 무슨 신인가, 피조물의 마음을 모르는 신이 어떻게 전지(全知)한가! 허무신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전능(全能)한가! 전지전능한 것이 신이 아니라면, 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샤를은 이 잔혹한 법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샤를이 읽는 ‘동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냉엄한 법칙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살아가는 거란 말인가. 샤를의 두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폐하.”
린도가 덤덤한 얼굴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은 린도의 눈주변이 붉게 부어올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주의 비밀은 풀렸습니다.”
“..........”
그에 샤를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어둡게 가라앉은 마음에 환한 빛이 켜졌다. 린도가 말했다.
“군나르 족, 아니, 구자르트 사람들이 말했지요. ‘저주’라는 것은 ‘매개’가 필요하다고.”
매개라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린도를 보았다. 그것이 저주의 비밀을 풀 열쇠가 되는 것일까.
“초대 왕이 내린 금계, 그게 마지막 실마리였던 겁니다. 아그레시아의 초대 국왕은 저주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겁니다.”
초대 왕이 내린 절대적 금계는, 성녀와 말룸과의 성전에 그 누구도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법령이었다. 이에 참여한 자는 누구든지 죽음으로 다스린다는 그 명령.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만든 초대왕의 법령이 아닌가. 그것이 무슨 실마리란 말인가?
“........그것이 왜요?”
린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가 말룸이 되는 저주는 바로 상처를 통해서 전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샤를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스승님이 상처를 입었나? 아니, 별다른 상처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돌았다.
“상처가 매개였던 겁니다.”
============================ 작품 후기 ============================
후원쿠폰 보내주신 버선코,김끄앙,호빵우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추천 주시는 분들 코멘트 주시는 분들! 이맛에 제가!! 조아라 연재를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크으으으으오오오옷(그리고 독자들에게 맞아죽는다)
1. 용서해주세요. 분명 오늘 분량 다쓰고, 사실 회상파트를 전부 다 써서 올릴 생각이었으나, 제 트윗을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노망난 컴퓨터가 절반을 날려버렸어요. 그래서 급하게나마 남아있는 부분만 올립니다. 너무 울고싶네요 ㅠㅠ
2.사실 연재하면서 제일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면, 후제꽃에 영감을 받은 부분을 '라스트오브어스'라는 좀비게임라고 명시해버린겁니다. 그래서 성녀와 말룸에 대해 진상을 추리한 독자님들이 꽤나 많으셨죠. 이부분까지 추리하신 독자들은 에드가 말룸이 되는 것은 바로 추리해 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제한 거예요...머 상처를 통해서 저주바이러스가 감염된것..
여튼 이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완결 내고 후기에 언급할게요.
3. 다음편엔 회상편 다 끝내는거 약속 드릴게요. 진짜 죄송해요. ㅠㅠ 진짜 다할생각으로 연참하겠다 한건데, 10키바 이거 너무 내 인생의 굴욕적인 키바수이다.. 로콘 참여할때도 안이랫는데 쒸익 쒸익.
4. 완결까지 약 5편에서 8편 남았네요. 완결 전편, 완결편 브금을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되도록이면 이때는 컴퓨터로 들어와 들어주시면서 글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완결 브금은 구하기 귀한거라서 유투브로만 영접이 가능해여 ㅠㅠ ㅠㅠㅠ 뭔지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꼭, ㄲ오오옥 부탁드려요 .
5. 다음에는 3월 30일에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또 마감이 있어서리 ㅠ_ㅠ 여러분 출판사 분들이 정말 열일해주세요 ㅠㅠ
6. 그리고 여러분, 제 말을 안들어주시는것같은데. 저 세번째 말합니다. 후제꽃은 해피냐 새드냐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꽈앙아ㅏㅇ아아아아아아가가각 닫힌 닫힌결말입니다. 열린결말을 선호하는 작가님들도 계시고, 때로는 아름다운 결말이 될수 있다는거 저도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열린결말이 나면 갑자기 분노해서 패러디를 쓰고싶어지는 사람이라(패러디 작가 출신;; 글쓰게 된 계기가 그거였음)
열린결말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이부분은 재차 말씀드립니다. 아마 제 다음작들도 열린결말은 안날것같네요.
7. 제 지역근처사는 사람들 중에서 보라색 머리 만나면 날잡고 이야기하겠다는 사람들 보고 짱돌맞을까봐 모자를 쓰고 다니기로 결심했읍니다 흑 흐으윽. 죄송해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