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꽃이 지다 =========================================================================
저렇게 어린 소녀가? 비올렛은 이자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린 아이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는 귀한 분, 당신과 같은 나이에요……”
기껏해야 열네 살 살이 되어보이는 듯한 저 외모가, 자신과 같다고? 비올렛은 자신이 나이가 많아 보이는가 생각했다. 아니, 일단 어려보이는 외모라 해도 상관없다. 어린 나이의 소녀를 취하는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어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키아라는 아직 어렸다. 비올렛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본 키아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오, 오해하지마세요. 카칸이 저를 틴으로 삼은 건, 무녀인 저를 타르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어요. 카칸과 제가 동침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답니다.”
“…….”
그 말에 비올렛의 얼굴이 누그러지자 키아라가 미소를 지었다.
“줄곧 보고 싶었어요,”
“나를 보고 싶었다니요?”
비올렛은 키아라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선 힘은 작지만 비올렛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린도에게 들었던 동질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서른 네 번째, 정령의 딸이자, 정령의 의지가 처음으로 가리키는 존재니까요.”
위대한 정령이라는 것은 바로 창조신을 말하는 것이다. 비올렛의 등이 긴장했다. 무녀인 키아라는 비올렛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키아라가 작은 손을 들어 비올렛의 손을 잡았다.
“정령의 의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리키는 존재라뇨?”
비올렛이 의아함에 물었다. 키아라는 잠시동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눈썹을 살풋 찡그리며 고민하는 듯 했다.
“카칸께서 아직까지 이야기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이자카가요?”
이자카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있단말인가? 비올렛이 고개를 갸웃 하자, 키아라가 말했다.
“정령의 따님이시여, 위대한 정령이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다 한다면, 그 말을 들으시겠어요?”
키아라가 비올렛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올렛은 잠시동안 고민에 빠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택의 기로였다. 갑자기 불쑥 등장한 무녀가, 신이 전할 말이 있다고 하다니, 혹시나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체자레가 말해준 또다른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비올렛의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무서운 말인가요?”
비올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키아라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따.
“아그레시아에는 무서운 예언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좋은 징조라 생각해요. 카칸께서도 그리 생각하셨고요.”
그 말에 비올렛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비올렛은 호기심이 들었다. 자신에 관해서 창조신이 한 말이 있다고?
“저에 관한 건가요?”
“네, 당신에 관한 거예요.”
비올렛은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자카가 그녀를 배려해 주어서 이곳의‘위대한 정령’을 믿는 종교 의식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무녀인 키아라를 보자 궁금해졌다.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아라가 생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키아라는 카칸의 궁에서 나와 자그마한 건물로 들어갔다. 아그레시아에도 예배당이 있듯, 이곳 구자르트에서도 사원이라는 형식으로, 신에게 제를 올리는 장소가 존재했다.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서 어두웠으나, 벽마다 걸려있는 횃불과, 벽에 구자르트 식으로 화려하게 양각된 황금은, 이곳을 더욱 밝아보이게 했다.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른 비올렛은 에메랄드색 주렴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검보라색 커튼이 펼쳐진 그 조용한 장소는 사람이 없어 고요했다. 오로지 들리는 소리란 대리석 바닥을 걷는 그녀들의 서늘한 발걸음 소리였다. 비올렛은 그것에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키아라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비올렛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키아라의 얼굴에 비올렛은 서서히 안심했다.
제단이 방 끝에 놓여져 있었고, 단 가운데에는 황금색의 거대한 화로가 놓여 있었다. 화로 안에는 붉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불꽃이 상당히 거대함에도, 이상하게도 방안에는 열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올렛이 그곳에 간 순간, 붉은 불꽃이 하얀 빛을 내며 타올랐다. 키아라가 그것을 보며 말했다.
“위대한 의지는, 유사이래 단 한 번도 그 의지를 내 비친적이 없답니다.”
“…….”
“그 의지는 3년전, 처음으로 의사를 내비쳤어요.”
키아라가 잡은 손을 화로로 잡아 이끌었다.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것이라 반사적으로 그것을 떼려 했지만, 뜨거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올렛의 의아한 표정에 키아라가 잔웃음을 터트렸다. 비올렛은 이 불꽃이 어떠한 원리로 하얗게 타오르는지, 어떻게 열기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불꽃은, 창세부터 존재하던 불꽃이라고 해요. 우리 군나르 족이 믿고있는 정령의 모태가 바로 이것이랍니다. 우리 무녀들은 이것을 보며 정령의 의지를 느끼며, 자신을 단련해왔어요.”
창조신이 세상을 창조할때부터 존재하던 불꽃이라니 이것이 만약 진짜라면, 저 불꽃은 그 어느것보다 그 신에게 가까운 것이다. 비올렛이 용기를 내서, 다시 하얀 불꽃에 손을 대었다. 비올렛의 성흔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방금 그건……”
비올렛이 눈을 크게 뜨며 키아라를 보자, 키아라가 당황했다.
“아, 아팠나요? 저, 저는 아프지 않았는데.”
고통은 중요치 않았다. 비올렛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온 말이 중요했다.
“서른 네 번 째, 마지막.”
비올렛이 중얼거렸다. 서른 네 번째와 마지막 이라는 거대한 단어가,불꽃에 손을 댄 짧은 순간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비올렛이 익히 알던 ‘신어’였다. 신이 말한다는 언어를, 정령의 의지가 말한다? 그렇다면 저 불꽃이 진짜라는 것일까?
“역시 같은 것을 들으실 줄 알았어요! 3년 전, 이 불꽃이 하얗게 타올랐어요. 당시 구자르트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었기에 의견이 분분했었어요.”
“........”
키아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지를 만나서 신이 난 것 같았다. 3년 전이라면 비올렛이 열 여섯 살 성년이 되었을 때였다.
“모든 무녀들이 그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대어 의지를 알아내려 노력했지만 알아 낼 수 없었어요. 저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죠. 서른 네 번째, 마지막. 사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것 뿐이었어요. 그것이 정령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강력한 의지니까요.”
“........”
“그리고 서른 네 번째가 무엇이냐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찾았죠. 해답은 구자르트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답니다. 현 카칸 이자카께서 발견한거죠.”
“....무엇을요?”
“빛의 여인이 절대 신이 보낸 서른 세 번째 여인이라면, 서른 네 번째는, 바로 당신, 당신을 말하는 것이었죠.”
키아라가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의견 충돌이 발생했어요. 전대 카칸 브라함은 병중이셨고, 현 카칸 이자카님과 케스투니스의 칸 타르크가 대립했어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자카와 타르크가 대립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립의 주제가 비올렛을 살리냐, 죽이느냐도. 그 대립에는 이 말이 있었던 것이다. 저것이 창조신의 의지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제야 비올렛은 왜 구자르트가 갑자기 아그레시아에게 관심을 돌렸는지 깨달았다. 이자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기에 그런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구자르트는 비올렛에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르크는, 아니 정확히 타르크 측 무녀는, 서른 네 번째 여인을 세상에 ‘마지막’을 가져오는 악이라 규정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카칸께서는 모든 악을 종결시키는 ‘마지막’으로 나타난 여인이라 말했었죠.”
“......”
“저 역시 카칸의 생각에 동의해요, 저는 당신이 디아볼로스를 없앨 마지막 성녀라고 생각해요.”
키아라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비올렛은, 키아라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아볼로스란 허무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허무신을 어떻게 없애겠는가.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불길이 더 환하게 타올랐다. 천장까지 치솟은 불이 빛기둥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키아라와 비올렛이 반사적으로 화로로부터 물러났다. 새하얀 불꽃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저, 정령께서 말하고 싶어해요.”
키아라가 겁에 질린 얼굴로 비올렛을 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 하고 있어요.”
무엇을?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비올렛은 그 불꽃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울리던 음성은 분명 신어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무슨 진실이 있기에 두려움을 느낀 비올렛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불꽃은 더욱 맹렬히 타올랐다. 순간, 불꽃이 터지며 새하얀 섬광이 비올렛의 시야를 앗아갔다. 그리고, 그 새하얀 빛속에서 어떤 ‘의지’가 비올렛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
왜 창조신은 아나스타샤에게 가장 많은 힘을 주었을까?
아나스타샤가 백년 이상 버텼음에도, 왜 아나스타샤를 죽일 다음 성녀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단순히 아나스타샤가 버텼기 때문에, 다음 성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왜 하필 천민인 비올렛을 선택했을까?
생각 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괴로운 의문이었기에, 비올렛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창조신의 의지가 머릿속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 신은 비올렛이 품었던 의문에 천천히 답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창조신이 최후로 내건 도박이었던 것이다.
창조신은 내기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판단했다. 모든 것은 유한하다. 창조신 역시 그 법칙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창조신은 서른두 명의 신의 힘을 가진 여자들을 만들었고, 이내 힘이 바닥을 드러냈다. 힘을 회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힘이 소진되며 성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순간, 성녀는 말룸이 되어 세상은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내건 것이 아나스타샤였다. 그는 영생을 살 정도의 엄청난 힘을 아나스타샤에게 부여했다.
아나스타샤는 백 년 동안 잘 견뎌주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마지막 수단이 실패하고 나서, 세상은 허무신의 손아귀에 멸망하게 되었다. 창조신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유지시킬만한 힘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힘을 쓰기로 했다. 그는 창조의 의지, 애초에 파멸을 막지 않으면 그 ‘의지’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의 아이를 태에 품을 인간들을 찾던 창조신은 그제야 낡은 옷을 입은 비천한 존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의 아이를 성녀라 추앙하니, 낡은 옷에서 화려한 비단 옷을 입게 된다면, 어쩌면 가장 비천한 신의 아이는 신을 추앙하지 않을까? 신에게 선택 받은 것을 최고의 행운이라 여기며, 어떤 불행이 있더라도 그것을 견디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창조신은 비올렛을, 가장 천한 천민의 뱃속에 집어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만든 성녀였다. 그리고 창조신은 현계할 힘을 잃은채로 실체가 없는 정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그가 만든 세상을 보는 눈마저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창조신은 이미 몰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최초로 만든 창조의 불꽃을 얻은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서른 네 번째 아이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리고 서른 네 번째 아이가 죽었으므로, 이 세상 역시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비올렛은 '서른 네 번째' 성녀였다.
“네가 마지막이란다, 아이야.”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성녀였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린 전언이었다. 멸망해가는 세계의, 마지막 아이에게.
빛이 사그라 들며 키아라가 방금 일어난 일에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무슨.......”
키아라는 눈을 깜빡이며 비올렛을 보았다. 그녀는 비올렛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을 보았다. 키아라가 화로를 바라보니, 하얗게 타오르던 불꽃이 다시 붉게 변했다. 비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괜찮으신가요?”
키아라는 분명히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정령의 의지가 가리키는 사람에게 정령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는, 무녀로서는 당연한 행동. 이자카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그 의지를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키아라가 틀렸던 것을 이자카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잔혹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성녀라는 말은, 다음 성녀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죽일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녀가…….
그녀가 세상을 멸망시킬 성녀란 말이었다.
비올렛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겨우겨우 잊어버리고 있던 끔찍한 사실들이 다시 머릿속에 되풀이 되었다. 이것보다 더 커다란 절망은 없었다. 그녀는 죽지 못한다. 그녀를 죽여줄 다음 성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올렛이 말룸이 되는 순간은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어디까지 그녀를 절망으로 몰아가는가.
비올렛은 카칸궁에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을 찾아 해맸다. 그가 정무를 본다는 것을 알았으나, 비올렛은 이자카의 사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궁을 걸어가던 시녀들에게 이자카가 알현실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 알현실을 찾아 헤맸다.
*
“결국 크레츄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집무관들의 보고를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이자카가 비올렛이 알현실로 뛰어 오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앉아있던 이자카의 옆에 서 있던 라히라도 비올렛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놀란 듯 했다.
“피아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찾아온 비올렛을 보며, 이자카는 옥좌에서 일어나려다 이내 집무관들의 눈치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라히라에게 눈짓했다. 라히라는 단 아래로 걸어가 비올렛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조금 있다 찾아가겠다, 기다려라.”
이자카가 비올렛을 보며 말했다. 비올렛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자카에게 무언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자카의 얼굴은 심각해보였다.
“이리와요, 비올렛.”
라히라의 손에 이끌려 비올렛은 그녀의 방으로 끌려들어갔다. 이자카는 거의 억지로 끌려나가는 비올렛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으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비올렛에게 시선을 뗀채로 보좌관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
“비올렛, 괜찮아요?”
“…….”
비올렛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자 라히라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키아라가 당신에게 다가갔던게 오늘이라니, 운명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라히라는 조금 망설이는 듯 하다 차분하게 이야기 했다.
“키아라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걸고 싶어 망설였다나봐요. 결국 오늘, 비올렛에게 이야기를 해버린 거죠. 그 아이는 위대한 정령의 의지를 당신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고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어요. 많이 충격 받았나요?”
“라히라.”
“그럴 만도 하죠, 비올렛이 마지막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비올렛 역시 잘 알고 있을테니.”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태연하게 비올렛을 대했단 말인가? 라히라는 비올렛을 염려하고 있었다.
“비올렛, 카칸은 마음은 저와 나누지 않지만, 생각은 자주 나눈답니다. 구자르트의 틴중에 유일하게 사실을 아는 것은 저 뿐이에요.”
라히라가 비올렛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카칸도 제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으시지만요.”
그 말에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비올렛과는 달리 라히라는 냉정했다.
“비올렛, 저는 비올렛이 ‘오기 전’부터 그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라히라가 비올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카가 라히라에게 진실을 이야기 했다면, 라히라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비올렛이 온 후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구자르트로 향하는 배 속에서 비올렛이 이자카에게 진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또 알고 있는 진실에 모순이 생겼다.
“비올렛은 아그레시아에서 쫓겨나셨죠? 아그레시아와 구자르트를 잇는 대사막을 혼자서 걸어가라고 내던져졌다고.”
“…….”
“그 대사막에서, 카칸을 만나는게 얼마나 절묘한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지 알고 계신가요?”
“…….”
그땐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올렛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배신감에, 그들의 배신을 합리화하며 눈물을 흘리며 사막을 걷고 있었다. 라히라의 말에 비올렛은 이자카와 만나는 우연이 얼마나, 어이없는 우연인지 깨달았다. 운명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자카가 제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군요.”
비올렛의 말에 라히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그레시아의 국왕과 교황에게 서한이 왔어요. 그리고 카칸께서는 바로 정찰을 핑계로 아그레시아를 은밀히 방문하셨죠.”
“........”
“비올렛은, 정말 사랑받고 있었던 거예요.”
*
“성녀님께서 수도에서 벗어나셨다 합니다.”
라이셀 백작의 말에 샤를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파르르 떠는 주먹을 쥐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스, 스승님은 울고 계셨소?”
라이셀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십니다.”
그에 샤를의 호박색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스승님!”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소년을 보며, 라이셀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것이 왕의 숙명이었으니.
“카칸은 성녀님을 귀하게 대접해 줄 겁니다. 그곳에 있는 편이 더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폐하.”
카칸이 귀하게 대우해준다 해도 무엇이 바뀌겠는가. 결국 비올렛의 마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그레시아에서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이딴 나라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도록. 자신을 원망하도록.
“울어도 됩니다 폐하.”
그 말에 샤를이 고개를 들었다. 에이든이 샤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상이 꺾인 날이 찾아온다면, 그것이 오늘이었다. 세상은 샤를의 이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악은 선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운명은 때로는 노력을 배신했고, 불행한 자에게 꼭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따.
샤를루스는 왕으로서 절대로 내리고 싶지 않았던 선택을 내렸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스승을, 그 사람을 쫓아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비올렛에게 있어 죽어버린 자신의 아버지와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아직은 어려도 됩니다.”
에이든이 옥좌로 올라와 샤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샤를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왕은 지금까지 자신을 억누르고 왕으로서 행동하려 지나치게 노력해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이상이 붕괴되었다. 울음을 억누르려 했지만 억눌러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 선왕의 국장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 울음이 결국 터져 버린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여기 계시면 죽을겁니다. 죽고 말겁니다.”
샤를은 한참을 흐느꼈다. 왕이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이 옳게 돌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을 믿고 아비의 죽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몇만배는 더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이토록 잔혹했다. 너무나 잔혹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소년 샤를은 세상의 부조리를 억지로 받아들였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다음편이 구자르트 마지막 편이네용.
여러분들도 건강관리 잘하세요.. ...
혹시 모르지만 코멘 100추천 1000넘으면 내일도 올리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