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4 꽃이 지다 =========================================================================
그 변수란, 167대 국왕 데메트리우스가 아나스타샤를 마음에 담은 것이었다. 아나스타샤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 소년은 왕위에 올라 왕비를 맞으면서도 그녀를 탐했다. 성녀와 국왕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음에도 그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접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가디언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국왕의 마음은 시꺼먼 질투로 타올랐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냉담했다.
“아나스타샤가 말룸을 죽인 후, 그는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초조한 나머지 그녀를 감금해 억지로 취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격렬히 거부했고, 자신의 피를 나눠 병을 나눠줄테니 자신을 놓아달라 청했습니다.”
“……..”
“비올렛, 알고 계십니까? 신성을 담은 성혈은 사실 피조물들에게 엄청난 신의 은총을 받게 합니다. 성녀는 그 자체가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아이이기 때문이죠.”
이미 이야기를 듣고있지 않은 비올렛에게 체자레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피를 먹기 전, 그는 아나스타샤를 다신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목숨을 구명한 그는 병이 나았고, 약속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진실’을 들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녀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뜻을 가진 가디언을 설득하며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교황을 속이고 그녀를 억지로 빼돌렸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성녀가 살아남은 것이었다.
“사실 신은 내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괴물이 된 성녀가 허무신이 정한 그 ‘끝’까지 성녀를 저주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어떠한 순간에도 신을 저주하지 않는다고요? 피조물인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나 한 것일까요?”
“…….”
“하지만 내기에서 벗어나진 못하더라도, 긴 시간을 끄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
“그저 살아만 있다면, 성녀는 신을 저주하지 않고 신이 내린 성력으로 목숨을 연명하여 다음 성녀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시간도 제한시간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신은 그것을 알기에 아나스타샤에게 가장 강한 성력을 내린 것이었죠. 그녀는 거의 영생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
“아나스타샤는 살아남았죠. 영원한 내기가 벌어지더라도 아나스타샤가 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세상은 안전했습니다.”
“…….”
“아나스타샤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제게 말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가장사랑하던 이에게 배신을 당해 쓰러지던 아나스타샤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 이상한 존재는 자신이 ‘신’이라 말하며. 자신들의 내기와 이 나라의 저주에 대해 설명하고, 역대 성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야 내기다운 내기를 하는구나. 언제나 의외의 방식으로 승리를 거머쥐고는 했지.]
사실 허무신의 내기는 너무나 간단했다. 허무신은 저주를 ‘씨앗’의 형태로 심었고, 허무신이 창조신과 허무신의 내기를 알려 본격적으로 저주를 꽃피우게 한 후 성녀가 신을 저주하느냐 저주하지 않느냐가 내기의 조건이었다. 어느 쪽이든 성녀가 ‘살아있을 때’괴물이 되어 세상을 모두 파괴하여 멸망시켜 허무로 돌리는 것이었으나, 내기는 이상하게 변질되어버렸다.
그것은 창조신은 물론이고 허무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녀들은 신을 저주했고, 신이 내린 성력이 떨어진다면 허무신의 저주가 되어 말룸(허무신은 인간들의 그 표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이 된다는 조건을 두 개를 동시 충족시켜버려 어떻게든 말룸이 되어야 했지만 문제는 성녀들이 말룸이 완벽하게 되기도 전에 생명이 끊겼다는 것이 있었다.
덕분에 말룸의 저주가 몸에 퍼지는 것이 멈추었고, 저주는 그대로 남아있기에, 성녀라는 존재는 죽어있지만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버렸다. 허무신은 죽어도 안식을 얻지 못하는 성녀를 나름 가엽게 여겨 땅속에 파묻었지만, 이미 이지를 잃은 성녀들은 세상의 멸망보다는 죽어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완전한 죽음을 바라며 다음대의 성녀를 기다렸고 그 시간동안 창조신은 다시 아이를 만들어 보냈다.
빨리 끝나야 했을 내기는, 이러한 변수에 의해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어차피 허무신이야 그것이 모두 자신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자신의 저주로 만들어낸 체계에 불만은 없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한 인간이 성녀를 살려버렸던 것이다!
허무신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다가가 살아있는 서른 세 번째 아이에게 꿈으로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가여운 서른 세 번째 아이는 울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허무신은 끝까지 그것을 보여주었다. 역대 성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내기란 무엇인지.
[신을 지금 당장 저주해도 너는 말룸이 되어 세상을 멸할 것이며, 신을 저주하지 않아도 네가 창조신에게 받은 성력이 사라진다면 말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신이 보낸 다음 아이에게 죽겠지.]
집요하게 거짓이라며 부정하는 성녀, 아나스타샤에게 허무신이 속살거렸다.
[너는 끝까지 신을 저주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아이야?]
아그레시아의 지도자들은, 성녀를 없애면 말룸의 후환을 없앴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달랐다. 성녀가 살아있고 신을 저주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시간이 더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왕과 교황은 ‘성녀는 말룸을 무찌르고 다음대 말룸이 된다’는 기록만을 믿은채 성녀를 죽였고. 그들은 자신의 평화를 쟁취한 줄 알았다. 죽어버린 성녀의 시신들이 신을 저주하는 말룸이 되어가는 것도 모르는 채. 그저 그들은 성녀를 죽이고 묻은 그 주변에서 크리처가 나타나고, 말룸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 성녀와 말룸의 연관성을 다시 한 번 재확인했을 뿐이다.
성녀는 과연 끝까지 신을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저주하며, 자신의 대적자가 자신이 되어 또 다음 성녀에게 죽을 때 까지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 그것이 미래란 말인가? 심지어 창조신은 그에게 다른 성녀보다 배는 강한 성력을 쥐어주었으며, 그녀는 오랫동안 마음을 다스리며 외롭게 살아야 했다.
“저주를 내린 것이 허무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내기에 응해 저주를 내린 것은 창조신이었습니다. 창조신은, 그저 세상을 연명할 도구로 아나스타샤를 이용한 겁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도 모른 채, 어린 그녀의 인생을 희생하면서도, 또 기약 없는 그녀의 삶을 전부 그 어두운 마움과 싸우라 하며, 끝없는 전장에, 지옥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던 겁니다!”
“…….”
“아나스타샤는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언제나 칭송받는 가장 고귀한 성녀에서 평범한 여자로 조용히 살아갔습니다.”
“…….”
“제가 아나스타샤를 발견했을 때는 그녀는 이미 백살을 넘기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마음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증오스러운 아그레시아의 왕가에서 태어난게 바로 나니까요.”
“…….”
‘성녀님, 따르게 해주십시오.’
‘전하, 저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의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요.’
‘하지만 성녀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신의 말을 가까이서 듣고, 신의 은총마저 지니셨다는 분의 생각이라면 그 어떠한 것도 제겐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전하.’
‘저는 전하가 아닙니다. 저는 제 자리를 버렸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나스타샤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은발은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건만 체자레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너무나 기적적이게도 살아있는 아그레시아의 성녀가 눈앞에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이다. 그녀의 새파란 눈은 이상하게도 어두운 자수정빛이었지만 체자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절실하게 당황한 성녀에게 빌었을 뿐이다. 자신을 난감하게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존재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내려주신 공작위로, 내 존재는 내 사랑하는 조카를 위협했고, 내 이복형제는 그런 나를 증오하고,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
“아나스타샤만이, 내 존재할 장소를 마련해주었죠.”
체자레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괜찮아 체자레.’
아나스타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체자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그맣고 하얀 손이 그 눈물을 부드럽게 닦았다.
‘네가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제발 부탁이니, 나를 삶의 이유로 삼아줘.’
‘…….’
‘그렇게 하면 내 싸움도, 내 기나긴 삶도 가치 있게 느껴지니. 자, 울지 마.’
눈물을 흘리던 청년은 아나스타샤를 보았다. 살아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존재가 트라이덴에게 끝까지 방해가 된다던 아스토르가의 말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살아서 그녀의 옆에 머물러도 되는 것일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닐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아나스타샤는 오랫동안 끌어안아주었다. 그것은 체자레가 삶에 두 번째로 얻는 구원이었다. 비록 절망이 깔려 있었지만, 이 새하얀 구원은 또다시 가라앉던 체자레의 삶에 단 하나의 빛줄기였다. 세상에게 상처받은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존재만을 자각했다. 낡은 침대,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체자레는 영원을 맹세하며 아나스타샤가 내린 피를 마셨다.
비올렛은 그 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받아들이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벅찼기 때문이었다. 체자레는 그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그녀와 함께 사는 몇 년간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얼마 안되는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저는 성직을 포기 하고 공작으로 돌아가 그녀를 아내로 맞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며 그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더군요.”
“…….”
“그 사실에 나는 이 나라가 너무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성녀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나라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것이, 내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것은 그 나름 이유가 있을 거라며, 신이 준 마지막 안배라 생각했습니다. 그저 둘이 함께,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
“그러나 사람들은……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조차 죄악이라 손가락질 했습니다.”
“…….”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려는 것, 그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해서 그렇게!”
체자레가 주먹으로 그림을 내려치며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그의 눈빛 역시 형형한 분노의 기운을 담았다.
“아나스타샤는 교황에 대한 것은 제게 끝까지 숨겼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교황에게 연락을 취한건 제 가장 어리석었던 행동이었죠. 교황은 내 이복형, 아스토르가에게 진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아스토르가는 우리를 잡아들였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그때는 따스한 봄날, 애녹시 글로리 축제였지요.”
그날은, 그저 따스한 봄날이었다. 사람들은 애녹시 글로리를 맞이하여 도시로 구경나왔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때, 체자레에게 선물이 있다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그 미래에 불행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이 순간을 신이 주신거라 위안하며 살기로 했다. 모든 것을 원망하지 않고 사랑하기로 했다. 세상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행복했던 두사람이 교황 성 류스프리드와 168대 국왕, 그의 이복형인 아스토르가에 의해 끝났다. 아스토르가는 처음으로 발걸음을 했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체자레를 찌르고, 두사람을 죽이라 명령했다. 그러나 그 아비도, 자식도 아나스타샤를 그렇게 원한다니, 저 여자가 죽는 장면은 끝까지 보여주라며 비웃었다. 그래서 체자레는 그 지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아나스타샤는 체자레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칼을 맞았다.
“비올렛,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에게 붙잡혔을 때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그 여자는 나를 구하러 다가왔어요. 내 형은 나를 죽이라 명령했죠. 남자들은 나를 칼로 찔렀고. 나는 죽어가는 동안 그 여자가 죽어가는 것을 봤어요. 사람들은 아나스타샤를 칼로 찔렀습니다. 아나스타샤는 고통스러워 하며 피를 토해냈어요. 그렇게 신성시 되던 성혈이 그 더러운 바닥에 퍼지더군요! 가장 고결한 성녀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제 눈앞에서 수백번을요!”
괴로워 하며 울부짖는 여인이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여자의 폐에 검을 찔러 넣었다.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괴로워 아무말도 못하고 피만 토해냈다. 보라색 눈동자가 붉은 빛을 띠어갔다.
‘제발…! 그녀를 죽인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폐하를 제발……보게해……!’
체자레의 애원에도 남자들은 그저 웃음을 지으며 그를 걷어찼다. 아나스타샤가 또 칼에 찔렸다. 이번에는 심장을 정확히 찔렀으나, 아나스타샤가 바르르 떨 뿐,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여자는 움직였고, 사람들은 그 여자를 괴물이라 생각했다. 여자를 죽인다는 죄책감 따윈 마비된 지 오래였다. 칼을 찔러도 여자는 살아남으니 그들은 그 바퀴벌레와 같은 여자를 그들이 아는 여러 방법으로 죽였다. 피는 바닥에 계속 흘러 내렸고, 몇십번, 몇백번의 죽음 이후, 남자들은 그녀를 죽이는 것을 유희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살려달라 했습니다. 심지어는 나도 몰랐던 아이가 있노라 말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구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했던 여자가. 세상을 구해냈던 여인이 세상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자비를 구걸했단 말입니다! 그녀가 지키던 세상의 구성원들에게! 백년동안 많은 것을 포기하며 고독과 싸우던 그 여자가!”
하지만 그것조차 괴물이 자식을 잉태했노라며, 남자들은 검으로 그 배를 찔렀다. 폐가 회복된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질렀다. 진득한 피냄새는 더러운 폐가를 가득 채웠고, 체자레는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이 몇 번이고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순간 그는 무력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연인은 그렇게 죽어갔다. 죽어갔다. 또 죽어갔다! 그렇게, 세상에게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배신당했던 것이다! 여인은 마지막 안식마저도 허락받지 못했다!
“이 세상에 발붙이는 것마저 두고 보지 못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베이고! 찔리고! 목이 졸려 죽고! 종래에는 목까지 잘렸습니다!”
그들은 체자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비웃었다. 그저 절망에 아무것도 못하는 남자에게, 아내가 죽는 모습을 보라 저열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이 잘려 성력이 떨어져 그녀가 차츰 회복하는 속도가 더뎌지고, 결국 목이 잘려 움직이지 못하자. 사람들은 침을 뱉고 더러운 폐가 바깥을 나갔다. 이내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불길이 휩싸이고 있는 것이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 마주친 아나스타샤의 머리가 눈을 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붉게 물든 눈동자와 체자레의 눈동자가 마주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목이 잘린 몸뚱이가 머리를 찾은 것인지, 머리가 스스로 그곳에 갔는지, 아니면 잘린 단면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머리를 잡아당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 붉은 불길 아래 하얗게 서 있었다. 그리고 체자레가 살짝 정신을 차렸던 것은, 그녀의 입술을 느낄 때였다. 그리고 죽어가던 자신의 몸이 회복되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절감했다.
“…….”
봄날의 햇살은 따스했고, 하늘은 파랬다. 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고 새는 지저귀고 있었다. 그러나 체자레는 그 아름다움이 가증스러웠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그는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
아, 이 빌어먹을정도로 아름다운 나라는. 과연 지켜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인간들은, 기생충 같이 성녀에 붙으며 목숨에 대한 갈망을‘생존본능’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타당한가?
그는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용서하고자 했다, 사랑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목숨을 비참하게 앗아가버린 이 나라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희생을 알지 못하는 이 나라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내기를 한 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비올렛, 허무신이 내건 조건으로, 아나스타샤는 바로 말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성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선택’한 거예요. 끝까지 성결했던 그녀는, 신을 저주하되, 세상을 저주하지 못해 당신에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안식을 찾았죠.”
체자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 비올렛에게 다가갔다. 성녀로 태어난 그녀는 아나스타샤의 목숨을 끊을 가장 저주스럽고도 가여운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이 여자아이는 필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라 믿으려 하고 있었다.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합니까? 비올렛, 거짓이라 생각하는 거겠지요?”
비올렛은 허무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 일기장은 조작된 것이다. 신화는 그가 꾸며낸 이야기다. 체자레는 비올렛을 고통에 몰아넣고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비올렛.”
체자레는 악마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비올렛에게 다가왔다. 비올렛은 그것을 차마 피하지도 못한채 달달 떨며 체자레를 보았다.
“하지만 비올렛, 비올렛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나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체자레의 격앙되었던 목소리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체자레가 비올렛의 앞에 꿇어 안자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바로 린도가, 그 증거이지 않습니까.”
린도는, 비올렛과 같은 은발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은발 자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해서, 이상하게 여겼던 적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못했다. 은발은 신성의 색이었다.
“린도는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
“아나스타샤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체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이 내려준 그 방대한 성력을 가지고 아이를 만들었습니다.”
“……..”
“내가 준 씨에, 그녀의 성력을 결합시켜 잉태된 아이는, 아나스타샤의 성혈이 흐르는 아이였습니다. 린도가 발견된 것은 아나스타샤의 유해가 허무신에게 묻힌 시스벨 남작령의 산이었습니다.”
체자레를 구하러 교황이 군사를 파견할 때, 발견했던 숲속의 갓난아이. 피투성이가 된 아이는 적은발을 하고 있었고, 아이의 눈동자는 선명한 금안이었다. 교황은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교황은 자신이 아끼는 애제자인 체자레를 위해 아이를 데려왔다.
깨어난 체자레는 교황이 보여준 갓난 아이를 보았다. 아나스타샤가 말하던 선물이라는 것이 저것이었다. 그러나 체자레는 그 아이마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녀석이 없었더라면 아나스타샤가 잠시라도 그를 기다려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린도는 아나스타샤가 비참하게 죽은 날 태어난 아이였다. 자신이 존재도 몰랐던 그 아이. 교황은 아이가 남겼으니, 그를 보고 살아가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이었다. 교황은 죽기 직전까지도, 린도의 존재가 체자레를 살아가게 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성력으로 창조된 아이는,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보였으나. 어느 순간에 성장이 멈춰버렸다. 체자레는 아나스타샤와 영원을 맹세하며 마신 피로 성장이 멈추었고, 린도는 아나스타샤의 성혈로 이루어진 완전한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성장이 비정상적으로 느렸다.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이 성장이 멈춘 부자는, 체자레가 아무리 부정해도 그들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인간으로서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성력을 지닌 소년. 그 불가사의한 소년이 바로 아나스타샤와 체자레의 결합의 증거였다.
그래, 그래서였다. 린도의 피가 비올렛의 성력을 보충해주었던 것은, ‘그밖에’ 하지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아나스타샤의 태내에 품어져, 성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방대한 성력을 쓴 비올렛이 힘들어하자 린도가 자신의 피로 그녀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그래서 스승님은 제게…….”
“네, 비올렛. 저는 신을, 그리고 이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체자레는 붉은 추기경이 되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는 그렇게 잔인해져 왔던 것이다. 비올렛은 체자레의 행동, 어디에도 일관성이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세상 자체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이 세계는 어차피 멸망할 세계였기 때문에.
“당신이 신을 저주하길 바랐습니다. 신을 저주한 당신이 말룸의 저주를 받는다면 당신이 바로 말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올렛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주며 절망을 속삭였던 것은, 비올렛이 신을 저주하길 바랐던 것이다.체자레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희망을 가지려면 또 잔혹한 진실을 일러주어 절망에 빠트렸다. 비올렛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한 세상을 경험하면 신을 저주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었다.
비올렛이 ‘신을 저주한다’면 아나스타샤에게 안식을 준 후 다음대 성녀가 나타나기도 전에 허무신의 저주를 받아 말룸이 되어 세상을 멸망시킬테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비로소 멸망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의 마음이 선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당신은 신을 저주하지 않던 모양이군요.”
“……”
“그러니 비올렛이 말룸을 물리치고, 허무신의 속삭임을 듣고 저주를 받아 바로 말룸이 될거라는 첫 번째 계획은 실패지요. 그러나 비올렛, 이젠 비올렛도 잘 아실겁니다 당신의 미래를요.”
체자레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호흡조차 잊어버린 채 힘들어 하는 비올렛을 보고 체자레가 비올렛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졌다. 체자레의 두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두눈에 보이는 것은 명백한 연민과 증오였다.
“당신은 끝까지 신을 저주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체자레는 언제나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작품 후기 ============================
다음편부터는 다시 본스토리로 진입합니다.
체자레와 아나스타샤, 교황에 관한 부분은 외전으로 풀어낼 생각입니다.
저번편을 올리며 신편을 업뎃했는데도 불구하고 선삭이 이루어지고, 그런걸 보면 엄.. 제가 독자님들이 원하지 않는 스토리를 쓰고있다. 그런건 확실하게 느꼈어요.
저도 사실은 피폐물은 잘 못봐요, 그 이유가 제가 멘탈이 약해서. 피폐물을 보면 언제나 그 주인공들이 생각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피폐물을 쓰고 있으니. 그렇다고 주인공들을 사지에 몰아넣으며 하하호호 웃는 자캐코패스는..아닌데..맞는것같네요. 하하;
그래도 후제꽃,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너무나 비참하고, 잔혹할지언정, 이들의 이야기는 어떤식으로든 결말이 날테니까요.
참고로 체자레 테마곡은 kalafina의 'red moon'과 'La crimosa'입니다.
레드분은 후렴구 부분이 체자레의 흑화와 애절함이 잘 나타나있고, 라크리모사는 체자레의 증오가 잘 나타나있는 붉은 음악이라 생각해요.
후제꽃, 지금까지 힘드셨을텐데 따라와주시는 분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와중에 후원쿠폰 보내주신분 유수완님, lemona20님, I-AN님, 적매화님, 호빵우먼님(3번씩이나) 감사드려요. 유종의 미 거두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