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원에 핀 제비꽃-182화 (175/208)

00182  꽃이 지다  =========================================================================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비올렛과 린도가 저마다 인사를 하며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체자레는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풀린 것을 빼면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렸다. 체자레는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표정으로 린도와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체자레와는 다르게 린도와 비올렛은 굳은 표정으로 체자레를 보고 있었다.

“성하.”

체자레의 말에 린도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비올렛은 내심 놀랐다. 체자레는 린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성하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린도는 분명히 그것을 마음에 담아둘 것이다. 그리고 체자레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성녀님과 함께 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린도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거절합니다.”

그 말에 체자레가 린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로 닮은 금안이 마주했다.

그리고 잔웃음을 터트렸다.

“성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는 있습니다. 바깥에 성기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성녀님과 먼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아버지.”

“내가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린도.”

그 부드럽고 단호한 말에 린도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비올렛은 린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체자레가 다시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체자레 역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부자의 금안이 한동안 마주했다.

“린도가 원한다면, 방 바깥에 서 있어도 됩니다. 물론 문은 잠그지 않을 것이고, 창문역시 열어두겠습니다.”

“지금 자식인 저보다, 성녀와의 대화가 더 우선인겁니까?”

대놓고 드러난 원망에 체자레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쭙잖은 어리광은 그만 부리십시오. 진실을 알기 위해서 오신게 아닙니까. 빠르던 늦던 진실은 말할겁니다. 린도”

“제가 이해할만한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린도가 절실하게 말했으나, 체자레는 비올렛에게 하던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린도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 한톨도 내비치려 하지 않는 그 미소는 얼마나 서늘한가. 린도 역시 그 서늘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린도, 그만해.”

그 말에 린도가 정신을 차린 듯 비올렛을 보았다. 비올렛은 린도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린도는 이전, 비올렛에게도 서운함을 토로한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체자레는 비올렛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린도의 이야기를 굳이 비올렛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따로 들어야 했다. 어쩌면 체자레는 린도와의 시간이 더 필요하기에 비올렛을 우선순위로 정한 것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체자레는 그런 것을 설명하지 않은채 어리광부리지 말라 단호하게 린도를 끊어내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절 단둘이 보자고 하셨으니,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올렛이 체자레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체자레가 그저 미소를 지었다. 린도가 간절한 얼굴로 비올렛을 보았으나 비올렛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체자레는 무언가 알고 있다. 비올렛이 체자레가 대답해줄 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으로 오긴 했지만, 그의 심기가 뒤틀리면, 그는 한없이 짓궂어 질 수도 있었다. 비올렛의 시선에 무너지려던 린도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다시 냉정을 되찾은 그가 체자레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짧게 끝나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방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가 방밖에 있겠다는 소리는 비올렛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본 린도가 비올렛을 한번 쳐다보고 바깥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바깥에 대기해 있는 성기사들의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비올렛과 체자레 드디어 단 둘이 방에 남았다. 막상 린도를 위로해주긴 했어도 비올렛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에셀먼드가 곁에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긴장되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비올렛이 체자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룸을 격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성녀님께서 드디어 신께서 내리신 과업을 달성하셨군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비올렛이 눈을 깜빡였다. 체자레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말룸은 이제 비로소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겠지요.”

뭘까, ‘말룸’의 안식을 바라는 태도는. 비올렛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체자레는 황금색 눈으로 관찰하듯 비올렛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비올렛? 린도를 물리친 것은 비올렛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비올렛이 물어보자 체자레가 의아한 얼굴로 비올렛을 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비올렛, 조금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

체자레가 비올렛에게 다가왔다. 비올렛은 그를 피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비올렛의 이마에 있는 푸른 성흔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담은 새파란 눈 색과, 새하얀 은발의 머리카락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진실을 알기 위해 발걸음한거란 말입니까?”

확인하듯 묻는 그 말에 비올렛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자레가 손을 뻗어 비올렛의 두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는 마치 신의 석상을 만지는 신실한 신자처럼, 예술품에 대해 찬미하는 예술가처럼, 비올렛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변함없이 올곧고 아름답습니다. 비올렛, 결국 그래서, 당신은 신을 저주하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그렇다면 제 계획은 실패라 말해야 하는걸까요.”

“무슨 계획을 말하는 겁니까?”

비올렛의 말에도 체자레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비올렛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당신은 제 생각보다 너무나 선했던 모양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답답해진 비올렛이 묻자 체자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다정한 시선으로 비올렛을 보았다.

“그 진실을 그렇게 알고 싶으셨습니까?”

“…….”

그 말투는 어찌보면 비올렛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비올렛, 나는 아주 옛날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은 비올렛이었다. 그럼에도 체자레는 비올렛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비올렛이 말을 하지 않자 체자레의 얼굴이 여유로움을 잃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한참 후에 비올렛이 입을 열었다. 조급해하는 그의 표정은 영락없이 린도와 똑같아 비올렛은 왜 진작 그와 린도가 부자관계라는 것을 몰랐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꿈속의 그 여자 말입니다, 비올렛.”

비올렛이 그 말에 몸을 경직시키며 체자레를 보았다. 확실히, 체자레는 꿈속의 여자를 알고 있었다. 그가 말룸이라는 것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을 하다니. 비올렛은 체자레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꿈속의 여자에 대해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물론 비올렛에게 친절했으며, 성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고, 그녀의 곤란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룸이 그녀를 죽이려고 기회를 보았던 것이 아닌가? 비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체자레가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 말에 비올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올렛, 린도의 어머니가 궁금하지않으십니까?”

그 말에 비올렛은 더더욱 알수 없어졌다. 린도의 어머니에 대한 것을 왜 비올렛에게 말하는 것인가. 그녀는 체자레가 누구를 만나 자식을 낳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스승님 그것은 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린도에게 말해야 하는 겁니다.”

“……..”

그 말에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비올렛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체자레가 손가락으로 그의 방 벽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제야 비올렛은 한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은 텅빈 캔버스였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그림일까? 지나치게 화려한 액자 안에 있는 하얀 캔버스는 어딘지 모르게 기괴해보였다. 비올렛이 체자레를 바라보자, 그가 비올렛의 손목을 잡고 액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손을 펴 캔버스에 다가갔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며 캔버스 위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력으로 일부러 그림을 숨긴 모양이었다.

그녀가 서서히 떠오르는 흐릿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그림이 또렷한 선이 생기고, 색깔이 올라왔다. 그 얼굴이 또렷하면 또렷해질수록 비올렛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올렛은 순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다. 자신도 모르게 도망가려 뒷걸음질 쳤지만 체자레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때처럼 또 도망가시려 하십니까?”

체자레의 그 말에 비올렛은 걸음을 멈추었다. 진실을 알려고 온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왜 이렇게 두려운 것인가. 그의 지하실에 있던 잔혹한 진실에서 비올렛은 도망쳤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 비롯한 나약함이라면, 비올렛은 자랐다. 비올렛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가 보여준 진실이 어떤 진실이듯 마주할 것이다.

그녀는 그 그림을 올려다보았다.그 그림은 한 여인의 그림이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것은 하얀색 옷이었다. 여인의 머리색은 밝은 금발이었으며, 눈동자 색깔은 새파란 색이었다. 아름답지만 평범한 금발과 파란 눈동자. 그림 속 여인들이 으레 그렇듯, 여인은 앞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올렛이 도망가려 했었던 것은 그 여인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굽니까.”

비올렛이 물었다. 체자레는 겁에 질린 비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린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비올렛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비올렛은 그 여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얼굴은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대체 어떻게, 말룸이, 말룸이, 린도의 어머니라는 말입니까?”

비올렛이 덜덜 떨며 말하자, 체자레가 초상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비올렛은 초상화 속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체자레의 얼굴은 일찍이 한 번도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분노에 찬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슬픔에 물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아련한 눈동자로 초상화 속의 여자를 보았다. 비올렛은 체자레가 그 여자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초상화를 보는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올렛, 나에게도 정열이 있었습니다.”

“…….”

“사람을 사랑하려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가혹한 삶을 받아들이고도, 세상을 사랑하고 그 세상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혼자 중얼거리듯 작아서 비올렛은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해야만 했다. 체자레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모든 세상이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악함이 존재하는 것만큼 선함은 고결한 가치로서 그만큼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신이 세상에 내린 법칙이며,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가르침이자 인간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 진리만을 믿고 노력해 왔습니다. 증오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려 노력 해봤고, 실제로 사랑하려 했지요. 또, 신관이 되어서도 신의 가르침을 이루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젊음의 혈기라 할까요? 아니, 젊음의 혈기라는 것도 굉장히 왜곡된 표현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이 말하는 혈기란 그들이 어렸을 적 품었던 보석처럼 빛났던 이상이 아닙니까? 나이를 먹기 때문에 혈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살고 있는 세상이 그 이상을 마모시키며 파괴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이 세상의 구성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젊은이에게 온갖 비극을 선사하며, 그 이상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체자레의 말은 어쩐지 횡설수설했다. 더군다나 그 말은 비올렛이 듣고싶은 말이 아니었다. 비올렛이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었다. 왜 저 여자가 말룸인 것인가. 비올렛의 조급함을 눈치챈 체자레가 웃었다.

“이런, 말이 조금 많아졌군요.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니,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봅니다.”

체자레는 손을 뻗어 그림을 쓸었다.

“제게 이상이 존재했듯, 사랑역시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저 여인을 사랑한겁니까?”

비올렛의 물음에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비올렛, 저는 ‘이’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른 자신의 외모는 밝은 금발 머리에 새파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하더군요.”

비올렛이 더 조급해 하기 전에 체자레가 다시한번 성력을 그림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여자의 머리색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밝은 금색의 색채를 띤 머리카락이 비올렛이 익히 아는 머리색으로 바뀌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아나스타샤.”

체자레가 그림에서 등을 돌리고 비올렛을 바라 보았다. 체자레의 시선이 열기를 띠고, 그림속의 여자와 같은 머리색을 하고 있는 또다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그레시아의 서른 세 번 째 성녀입니다.”

============================ 작품 후기 ============================

요새 여러분들 코멘도...추천수도 줄었음...요.... 후.. ^-^..... 넘나 서운한것!!

여러분 아직 진실이 다 밝혀진건 아니니까 제발.. 코멘트는 스포일러 하지 말아주셔용!

여러분의 추천하나에.. 제가 다음편을 쪼갤지 이어서 붙일지 결정할 수 잇답니다.(비축분가지고협박하는게 아니구..추천이 있어야... 더쓴다는 소리...)내일 모레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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