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꽃이 지다 =========================================================================
자비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제발, 이 고통에서 나를 구해주십시오! 나는 죄가 없어, 정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붉은 불길이 탐욕스러운 혀를 날름거리며 죄인들을 삼켜나갔다. 살이 뜨거운 불에 닿자 사람들은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며 간절한 시선으로 남자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남자는 무표정으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과도 같은 붉은 불빛과 붉은 신관복. 남자는 얼핏 보면 그들을 가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구세주처럼 서 있는 아름다운 금안의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으아아아아!”
왜 신의 자비를 베푸는 옷을 입고 저자는 자신들을 구해주지 않는가, 왜 저 남자는 자신을 그저 보고만 있는가.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단 말인가!
“살려줘, 너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어, 제발!”
고통에 겨운 자들의 이성을 상실했다. 옷이라는 헝겊에 불과했던 옷이 불이 붙어 그들의 살을 지지직거리며 태웠다. 발아래 장작은 이미 붉은 불길에 삼켜진지 오래였다. 아무리 애걸해도, 고통을 호소해도, 자비를 부르짖어도 신관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관님!”
“신이시여!”
“아아아아아아악”
옷이 불타오르자 마치 그들은 불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는 듯 했다. 그 아름다운 붉은 불꽃의 옷은 입은 이들을 지옥의 고통으로 쳐넣어, 웃고 있었다. 살이 타는 누린내와 잿빛연기가 그것을 삼켜나간다. 그 붉고 붉음이 사람들을 검게 태워나가고 있었다. 불에 타는 죄인들은 그제야 그 신관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서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을 이 화형대에 이끈 자가, 저 자였으니 말이다. 황금색 눈이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아이의 얼굴처럼 맑고 환했다.
“신이시여, 제발! 아아, 신관님!”
목소리마저 불길에 삼켜간다. 불길이 시야를 붉게 물들기 전, 사람들은 저 신관의 붉은 옷이 피로 물들어 붉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저런 이를 신관으로 택한 것인가! 아아, 신이 존재 하는 것인가, 왜 저런 악마같은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 신이시여, 당신과 저 신관에게 저주 있으라! 붉은 불길은 마침내 그들의 비탄마저 삼켜버렸다.
붉은 불빛과 붉은 성복,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이 불길의 건조함을 품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붉은 빛에 물든 그의 얼굴에 서린 비틀린 미소는 불에 타버린 가여운 피조물들을 향한 그의 조소였다. 마치 안아 줄듯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 후, 붉은 노을에 붉게 태워진 하늘을 바라본다.
“보고 있습니까?”
그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날이후, 그는 붉은 추기경이라 불렸다.
***
손가락에서 튕겨져 나간 화살 과녁에 꽂혔다. 과녁에 명중한 화살을 바라보며 비올렛은 다시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또 한발, 화살은 과녁에 꽂혔다. 다시 한발, 다시 활시위에 화살을 걸려 할 때였다.
“비올렛!”
곧이어 린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렛은 활과 화살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린도가 비올렛의 옆에 서 있었다.
“성무로 바쁘다고 알고 있는데.”
비올렛의 말에 린도의 기분이 상한 듯 팍 찡그려졌다. 비올렛은 그 얼굴이 귀여워 살짝 미소 지었다.
“서운하게 왜 그런 소리를 해! 모처럼 시간이 나서 겨우 너랑 같이 있으려고 여기가지 왔는데!”
린도는 정말로 서운한 듯 초롱초롱한 금안으로 비올렛을 보았다. 몸은 청년인데, 하는 짓은 아직도 똑같다. 알았어, 라고 그를 달래자 린도는 찡그린 표정을 풀며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이 향하자. 린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준비되어 있던 과녁들은 모두 다 여러 발의 화살에 난도질되어 있었다. 과녁마다 꽂힌 화살들은 강박적으로 동심원을 중심으로 좁게 밀집되어 있었다. 보며 린도는 기가 질렸다. 도대체 오늘 몇발을 쏜 것 인지 숫자로 가늠 할 수조차 없었다. 그 화살들을 보며 린도는 화살을 든 비올렛의 손을 잡아챘다. 예상대로 손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분명 피가 비쳤던 것이 계속 낫고, 낫고 나아서 저렇게 된 것일 터였다. 비올렛이 린도의 두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린도 이건…….”
“비올렛.”
린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자신을 엄하게 꾸짖는 것 같은 그 얼굴에 비올렛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러는 거야?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비올렛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안해서.”
그 대답에 린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룸이 나타날 징조는 이제 단 하나 남았다.‘핏빛 하늘’이라는 최후의 징조가 있을 뿐이었다. 이 핏빛하늘이 나타나고 나서 약 삼일정도 후, 기록에 따르면 말룸은 크리처가 나타났던 도시에 나타난다. 보통 크리처 출몰 이후 3개월에서 반년정도 후에 나타난다고 치더라도. 현재 지금은 이미 4개월을 경과했다. 이제 말룸이 나타나는 것은 불과 2개월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녀의 불안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비올렛 괜찮다고 했잖아. 말룸을 없애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모든 성녀들이 어렵지 않게 없앴는걸.”
말룸의 천적이 성녀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룸을 없애는 것은 성녀에게 있어서 그렇게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언제나 혼자 대적하기에 여러 상처는 필수불가결하지만 그 아나스타샤마저도 압도적인 성력으로 겨우 몇 시간 만에 없앴던 것이 말룸이다. 비올렛이라고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쓸데없이 에르멘가르트 후작가에서 배운 여러가지 무용을 연마하고 있으니 린도로서는 비올렛의 불안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못마땅했다. 무예를 단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깎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명을 사랑하는 비올렛이 순탄하게 배웠을 리는 없다. 분명 그녀의 고운 얼굴에 흘러내렸을 눈물이 상상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린도는 옆에 서 있던 로디온을 보았다.
“…….”
린도의 시선에 로디온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비올렛의 화살이 다시한번 과녁에 명중했다. 예전부터 궁술이 뛰어나다 생각했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솜씨였다.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검술역시 소질이 있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왜 저렇게 화살만 쏴대는가.
“비올렛. 너 검도 잘한다면서 왜 검술보다는 궁술을 중시하는 거야?”
린도의 그 말에 활에서 떠난 화살이 과녁을 비껴나가. 뒤에 있는 나무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겨우 아물었던 손가락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떨어진 피 주변으로 식물들이 자라났다. 그러고보니 비올렛의 주변으로는 식물들이 비정상적으로 자라 있었다.
“다쳤잖아!”
린도가 결국 로디온을 시켜 비올렛의 손에서 활을 빼앗았다. 비올렛은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빗나간 과녁을 보고 있었다.
“그러네.”
비올렛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았다. 말룸같은 건 화살로 없앨 수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검처럼 파괴력이 있는 것을 연마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리체, 검을 가져오렴.”
“비올렛!”
“성녀님!”
비올렛의 말에 즉각적으로 로디온과 린도가 반응했다. 비올렛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언제나 초조해 했다. 그리고 에셀먼드가 떠난 이후로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린도는 비올렛을 보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언제쯤 모든 괴로운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날은 올 것인가.
*
‘너는 검을 쓰기엔 너무 손의 힘이 약해. 만약 쓰려면 활을 사용해.’
검을 든 채 울고 있는 비올렛에게 에셀먼드가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났다. 비올렛은 손을 보았다. 검을 쓰기에 손에 힘이 약한가. 하면 사실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후작은 그 후로도 꾸준히 그녀에게 검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주로 쓰는 것은 활이었다. 차라리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화살로 그들의 명줄을 꿰뚫는 것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비라고 생각했다.
억센 새 화살의 활시위를 당기려 했다. 그러나 화살은 과녁을 비껴나가기만 했다. 그러나 짐승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비올렛에게 절실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활을 연습해야할까. 후작에게 궁술 스승을 달라고는 절대 말 못한다. 분명 에셀먼드의 귀에 그것이 들어갈 것이다. 마치 에셀먼드의 충고를 들은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들킨다니 죽기보다 더 싫었다.
무기고에서 활과 화살을 가져왔지만, 마냥 연무장의 과녁을 쏜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
팽팽해진 활시위가 끊어지고 말았다. 볼에 화끈거리는 느낌과 동시에 손가락에 피가 터졌다. 비올렛은 손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활을 잡아 늘려 연약한 피부는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건가. 어차피 누군가를 상처입고 죽이기 위한 기술이 아닌가? 이 행위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활시위에 상처입은 손가락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털썩 주저앉아 비올렛은 손가락을 보았다. 이 저주스러운 몸의 상처는 천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 그림자가 졌다. 비올렛이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에셀먼드가 서 있었다. 그는 비올렛과 끊어진 활시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무릎위에 놓인 비올렛의 손바닥을 보았다. 비올렛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손을 뒤집었으나 이미 에셀먼드에게 보이고 말았다. 에셀먼드가 그것을 보며 무릎을 꿇고 비올렛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 손은 이미 잡힌 지 오래였다. 그는 찬찬히 비올렛의 손을 살펴보았다.
“……어이가 없군.”
“상관없잖아요.”
비올렛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길이 들지도 않은 활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쏴대니 당연한 결과다.”
“…….”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으나 틀린 말이 아니기에 말할 수가 없다. 비올렛은 그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려 힘을 주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생채기 정도면 금방 낫지만 문제는 그 억세고 가느다란 활시위는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의견을 따르다가 결국 이렇게 되어버려, 부끄러움을 넘어서 수치스러웠다.
그는 생각 외로 조심스럽게 비올렛의 다른 손을 잡았다.
“어딜가요?”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어딘가를 간다 해도 그녀가 떽떽거리며 반항 할 것을 예상한 듯 했다. 비올렛은 자신의 손을 감싼 에셀먼드의 커다란 손을 보았다. 검게 그을린 손등에는 새하얀 흉터들이 가득했다. 검을 배움에도 부드러운 그녀의 손과는 달랐다. 그가 이끌었던 곳은 연무장 옆 작은 오두막이었다. 에르멘가르트 가문에 수련하는 기사들의 휴게실로 이용하는 그곳은 몇몇 기사들이 자리했으나, 비올렛이 에셀먼드의 손을 잡고 온 것을 보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손.”
강아지도 아닌데, 하물며 고양이에게도 명령해도 듣지 않은데 왜 손을 달라는 걸까. 반항적으로 에셀먼드를 보았으나. 에셀먼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강제적으로 손을 잡아 끌었다. 따스한 손의 감촉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는 촉촉한 거즈로 흙먼지와 피가 범벅이 된 비올렛의 손을 닦았다. 언제나 무신경해보이던 그와는 다르게 그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비올렛의 손바닥이 다시 깨끗해지자 그는 능숙하게 연고를 가져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발랐다. 따가움에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빼려 하자 에셀먼드가 달래듯 부드럽게 천을 감싸주었다. 그러자 그 쓰라림이 멎는 것 같았다.
“…….”
어차피 몇 시간 후면 나을 것이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런 것도 신전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또 곤란해지니 이러는 거겠지. 비올렛이 반항적으로 생각했다. 접촉되는 손의 느낌이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손길에 내재된 다정함이 어렴풋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올렛은 그것이 가식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그를 화나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갑자기 에셀먼드의 손이 비올렛의 뺨에 닿았다.
“으!”
비올렛이 얼굴을 찡그렸다. 쓴 연고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까 시위가 끊어졌을 때 볼이 살짝 따가웠다 했더니 아무래도 볼마저 생채기가 난 것 같았다. 에셀먼드와 얼굴이 마주했다. 그 어두운 푸른 눈동자를 보자. 비올렛은 그 시선을 피해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의 손이 힘을 주어 얼굴을 강제로 마주하게 했다. 그가 언제 얼마만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그의 파란 눈이 비올렛을 뚫어져라 보았다. 저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모른다. 비올렛은 그 가까운 얼굴에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치료는 금세 끝났고. 비올렛이 눈을 뜨니 에셀먼드가 자신의 손에 묻은 연고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족답게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이 불편한 것에서 해방인가. 비올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에셀먼드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따라와.”
“또 어디를요.”
그러나 에셀먼드의 손은 다치지 않은 비올렛의 손을 꽉 쥐었다. 그 따스한 느낌에 손을 잡아 빼고 싶었으나, 비올렛은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저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손을 잡아 이끈 곳은 무기고였다. 왜 갑자기 무기고에 가는 걸까. 왠지 모르게 무서워 몸을 움츠리자, 에셀먼드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동안 기다리라 말한 후 천장 가까이에 걸려 있는 활을 내려 주었다. 활은 동물의 뿔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라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거.”
“…….”
“내가 쓰던 거다.”
비올렛은 그것을 꽉 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지금 자기가 쓸 거라 생각하는 건가. 비올렛은 지금 당장 저것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사이에서 고민했다. 어쩜 저 남자는 저렇게 싫은 행동만 할까.
“아직 어린 네가 활을 쓰긴 무리야. 내가 길을 들여놨으니 아프진 않을 거야.”
“…….”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특유의 냉막한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던져버려도, 버려도 상관없다. 다만 네가 배우는 건 늦어지겠지.”
“누가 버린다고……!”
그 말에 에셀먼드가 뒤로 돌아 무기고에서 나갔다. 활은 이리저리 잡아보니 분할정도로 비올렛에게 딱 맞았다. 그것이 못마땅해 던져버리려 했으나 에셀먼드가 예상한 행동을 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비올렛이 할 수 있는 참신한 것은 없었다. 그저 활을 꽉 쥘 뿐이었다. 무기고에 나가자, 나간 줄 알았던 에셀먼드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활을 부러뜨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에셀먼드가 말했다.
“이리 와 봐.”
그는 다시 비올렛의 손을 잡았다. 결국 비올렛은 한손으로는 활을 한손으로는 에셀먼드의 손을 잡고 에셀먼드를 따랐다. 그가 이른 곳은 과녁이 있는 궁술 연무장이었다. 에셀먼드가 비올렛의 손에 있던 각궁을 그녀의 손으로부터 집어들어, 활을 쏘았다. 화살은 마치 정해진 궤적을 그리는 듯 명중했다. 아, 그래. 저 사람이 못하는 게 또 뭐가 있겠어.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것을 보았다. 화살을 쏘는 자세마저도 완벽하고 눈이 부셨다. 활을 다시 비올렛에게 내민 에셀먼드가 다시 활을 두고 비올렛의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연고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손가락은 나아있었다.
“잡아봐.”
그럴 줄 알았다. 혹시나 그럴 까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 사람이 상처를 치료한 것은 아까 저질렀던 그 한심한 행위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비올렛이 활시위를 당겼다. 아까 활과는 달리 시위는 질기지 않고 잘 늘어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후로 당기자 또다시 끊어질 것 같이 팽팽해졌다. 아까의 일처럼 혹여 시위가 끊어질까 겁이 나며 손가락이 떨렸다.
“괜찮아. 끊어지지 않아.”
에셀먼드의 목소리가 어쩐지 부드럽게 들렸다. 비올렛은 그것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리 사이 간격을 넓히고 숨을 멈춰. 숨결 하나에도 궤적이 엇나간다.”
그 말에 비올렛이 흡, 하고 숨을 참았다. 그가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추고 그녀의 작은 손 위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활과 화살이 과녁을 겨누었다. 쏴. 라는 그의 말에 활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과녁의 동심까진 아니지만 어중간한 부분에 닿았다. 명중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과녁 안에는 들어갔던 것이다. 비올렛은 눈을 크게 뜨며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 에셀먼드를 보았다. 에셀먼드는 비올렛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 돌아 가버렸다. 활을 손에 쥔채 비올렛은 에셀먼드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활을 보았다. 그녀는 그 활을 품에 안았다.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는 검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궁술 역시도 억센 활시위를 당겨야 해 손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궁술을 배웠던 것은 생명의 비명소리를 사람의 목소리로 들어 괴로워하는 비올렛에 대한 그의 배려였던 것이다.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지 않는가. 어린 자신도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아서, 활을 결국 버리지 못했다.
비올렛은 자신이 들고 있는 활을 보았다. 그때 그가 준 활을 아직도 쓰고 있을 리는 없다. 그녀는 자랐고, 그녀의 체격에 맞추어 화살 치고는 파괴력이 있는 굵은 화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각궁만은 버릴 수 없었기에, 비올렛은 가끔가다 활이 손에 익지 않으면, 그 활을 손에 잡고는 했다. 그렇게 그 화살을 쏘고 있으면, 어느샌가. 그녀의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 6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비올렛은 계속 생각했다. 잊어버리기 위해 몰두했던 것 마저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니. 그녀는 손이 천천히 아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이전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성력이 차오르는 그녀의 회복속도는 꽤나 빨라진 편이었다.
“성녀님, 이젠 정말 몸이 상하실겁니다. 검은 다음에, 제발 다음에 수련하십시오.”
로디온이 거의 빌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검을 들까 했지만, 결국 그녀는 로디온과 린도의 얼굴을 보고 포기한 채 연무장을 떠났다.
약 한 달 동안의 보수 끝에 백궁이 다시 열리고, 비올렛은 다시 그곳의 주인이 되었다. 백궁은 변함없이 예전과 똑같이 복원되었지만. 사실 잃은 것은 많았다. 성가대의 아이들은 반이 죽었으며, 시녀들은 타르크의 군대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해 거동할 수 없게 되거나 살해당했다. 다 자라서 돌아다니며 야옹거리던 고양이들은 전화(戰禍)에 의해 어디론가 사라져 행적이 묘연했다. 신전에 갔을 적, 그를 떠올리려 데려갔던 고양이들마저 마치 그를 추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날은 따스해지고, 햇빛에 새생명이 다시 깨어나 봄을 노래했다. 그러나 백궁은 어딘지 모르게 인적이 드물었고, 조용하며 허전했다.
“…….”
따스한 햇살을 만끽한 채 조용히 그 풍경들을 바라보자 린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비올렛은 린도가 자신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비올렛.”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린도를 보려니 부드러운 손이 비올렛의 뺨을 감쌌다. 린도의 작은 손은 어느새 커서 비올렛의 얼굴을 감쌀 만큼 제법 커져 있었다. 그 스킨십에 눈을 크게 뜬채 바라보자 린도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이제 날 봐주는구나?”
그 말에 비올렛은 자신이 너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처럼 린도가 시간을 내서 와준 것임에도, 지나치게 자기 위주로 행동했던 것이다.
“미안.”
비올렛의 말에 린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햇살에 적색을 머금은 은발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생각해보면 왜 몰랐을까. 그 금안의 눈매도, 미소역시도 체자레와 닮아 있었는데. 그러나 체자레가 남성적 선이 아름다운 남자라면, 린도는 어딘가 더욱 더 여성과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 비올렛은 린도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린도에게 물어볼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진 않았다. 아버지에 대해 말한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을 린도에게 호기심으로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도는 비올렛의 뺨을 쓸었던 손을 내려 비올렛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끌었다. 그러나 비올렛은 그 과정이 너무나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녀가 잡은 손은 언제나 거칠고 흉터가 많은 건조한 남자의 손이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고운 손의 감촉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치고는 고운 그의 손을 바라보며 비올렛은 린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 걱정시키게 하지 않을 거지?”
린도의 말에 비올렛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걱정을 시켰던 건가. 확실히 린도를 못 본 며칠동안 그녀가 했던 행동이란 화살을 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걱정시킬 일이라면, 궁술을 연습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기로 결정했으니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군가에게 근거 없이 확신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노력은 하겠는데 약속은 못하겠어.”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릴 거라 생각했던 린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 예배당에서한참을 혼자서 울고 있던 비올렛에게, 린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때 비올렛은 린도가 자신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일로 또 얼마나 걱정을 끼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미안.”
다시 한 번 하는 사과에 린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비올렛의 입에서 하는 사과가 달갑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참동안 무언가 말하려다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야 비올렛, 내가 미안해해야 해.”
“응?”
린도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비올렛은 어쩐지 불길함을 느끼며 린도를 보았다. 그는 잠시동안 얼굴을 찡그리며, 창을 보았다.
“이번 성도의 애녹시 글로리가 끝났잖아. 수도는 애녹시 글로리의 시작을 늦췄나봐. 약 이주일 후에 개최된다는 통보가 왔어.”
“…….”
이제 린도는 수도를 ‘왕도’라고 하지 않고, 수도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의 도시와 교황의 도시를 구분 지으려 하지 않는 그의 인식의 변화였다.
“신왕이 등극하고 처음 열리는 수도의 축제야.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 폐하는 나와 네가 수도에 가서 함께 풍등을 날리는 걸 원하나봐.”
비올렛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녹시 글로리가 열리는 기간은 영지마다 다양하다. 그러나 수도는 보통 애녹시 글로리를 가장 늦게 열었다. 그리해야 지방 귀족들이 대부분 다 참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예전 교황과 국왕이 대립하기 이전에는 성녀, 교황, 국왕 셋이서 그 풍등을 날려 보냈던 모양이야.”
비올렛은 옛날을 떠올렸다. 분명 아나스타샤도, 루치아도. 모든 이들의 축복에 둘러 싸여, 애녹시 글로리의 시작, 봄의 시작을 알리는 풍등을 날려 보내며 백성들의 기원을 하늘에 올려 보냈을 것이다.
“사실, 몇 달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냥 나만 가겠다고 했거든.”
네가 힘들어 하니까. 라는 말이 생략 되어있는 것을 알았다. 린도는 그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했다.
“폐하도 별로 내키지 않아 했지만 아마 대신들의 주장이 강해 곤란한 모양이야 백성들에게 처음 얼굴을 내비치는 거라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이끌지 천명하는 자리라고, 꼭 네가 필요하대.”
“…….”
린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비올렛은 린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에 미안하다 하는지 깨달았다. 비올렛은 난처한 얼굴로 대신들의 말을 듣고 있는 샤를루스를 떠올렸다. 신왕은 언제나 지지기반이 약한 법이었고, 그 지지기반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린도와 비올렛을 비롯한 소수의 귀족들뿐이었다.
“응, 가자.”
비올렛은 린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도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수도에 간다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피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분명 그를 보면 마음이 아프겠지. 그러나 지금도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안 아픈지 알 수 없었다.
“폐하를 보는 것도 삼 개월 만인가?”
미안해하는 린도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어보이자 린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황금색 눈이 한참동안 비올렛을 응시했다.
“응, 그래 비올렛.”
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비올렛을 보았다.
“네가 고통스럽지 않게 할게.”
린도가 속삭였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목소리였다.
“네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비올렛이 대답했다.
*
붉은 눈이 부릅뜨며 그녀를 쫒아오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손에는 그것에 대항할 어떤 무기도 없었다. 그녀는 맨몸인 채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비올렛. 사랑하는 나의 비올렛.”
그것이 속삭인다.
“우리 이제 곧 만날 수 있을거야.”
부드럽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그럼에도 그 평화로운 목소리가 안온하다 여기지 않는 것은 그 뒤에 있는 강대한 기운 때문이리라.
“비올렛.”
결국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비올렛은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새하얀 발에는 길고 끈끈한 촉수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비올레엣.”
그것이 아가리를 벌린다. 그와 함께 뜨뜻미지근한 악취가 확 풍겨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삼키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볼에 서린 따스하면서도 따끔한 감촉에 눈을 떴다.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 분명히 자신을 깨워 준 것 같은데. 따스하면서도 따뜻하다니? 게다가 털이 많은 말랑한 느낌도 분명…….
“어….”
비올렛은 자신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내려다보는 한 쌍의 샛노란 눈을 보았다.
“잘 살아남았냐. 인간?”
냥,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말했다. 비올렛은 그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그녀의 가슴팍에 있었던 고양이가 데구르르 굴러 그녀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빼빼 마른 고양이를 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다 자란 새끼고양이들이 야옹거리고 있었다.
“보고싶었다. 말 통하는 인간.”
그 인사에 비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랏다. 얼굴에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살아 있었다. 아직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양이들이 다시 이곳으로 살아 돌아왔다.
“우냐 인간?”
“울지 마라 인간.”
폴짝 폴짝거리며 고양이들이 침대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발톱 때문에 침대 시트가 긁히며 찢어졌지만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고양이들이 전부 비올렛의 어깨와 가슴을 타고올라와 그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멈추려고 했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아, 인간 우리가 너무 그리웠나 보다.”
“더 빨리 찾아갈 걸 그랬다.”
“그래도 그 무서운 인간들이 있을까봐 무서워서 그랬다냥, 미안하다냥.”
고양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마음여린 친구에게 아낌없이 친근감을 표현했다. 오랜만에 방이 들어찬 기분이 들어 그녀는 활짝 웃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끊어올리려던 것 까지 한꺼번에 올립니다. 제가 내일 여동생 집에 하루 묵고 오느라, 못올릴수도 있어서요! 봐주실거죠? 헤헤헤 부제에 비해 희망찬 시작!
4부의 시작은 밝음밝음이네요. 헤헤헿... 말룸진짜 이제 곧 나올거여용.. 아마 3화에서 4화정도 후에? 5화? 나올거니까 기다려주세요!
(사실 10화정도 후에 나올거라 작가들에게 스포 했다가 작가들에게 몰매맞고 5화이내로 합의봄..후..)
요즘 날씨가 많이 춥네요... 감기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