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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156화 (149/208)

00156  제비꽃, 피어나다  =========================================================================

무릎을 꿇은 아버지를 내려보던 청년의 모습은 그가 사랑하던 형이었으나 그때는 악마와도 같은 서늘함이 있었다. 그 날은 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내리는 하얀눈에 대비되어, 머리를 찧은 아버지의 피가 대비되었다.

트라이덴은 눈을 떴다. 지금은 내성의 방어선이었다. 수도를 감싸고 있던 성곽은 유리와 같은 방어이다. 이 내성마저 뚫려버리면, 수도에는 희망이 없다. 설마 교황을 버리고 진군할줄은 몰랐던 것이 패착이었다.

그는 이민족에 대한 아그레시아인들의 반감을 무시했다. 따라서 성도를 침입하며 수도로 진격하여 교황파 군대를 고립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었다. 멍청한 군나르족은 따뜻한 남동지방에서  수도인 북서지방으로 진군할수록 속도가 더욱 더뎌졌다.

그 이민족들이 도시 하나를 쓸때 얼마나 무자비하게 쓸어버리는지, 국왕이 악마를 끌여들여 미쳤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군사의 사기는 떨어졌고, 왕자의 독살건으로 섰던 명분마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은 변함없이 굳건했다. 성녀는 꼭 자기 손으로 죽일 것이다. 추기경도, 교황도 이 손으로 죽여 없애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이다. 그는 역사에 남게 되어 영원히 추앙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편의 역사는 사라질 것이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신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

‘폐하, 독대할 기회를 주셔서 성은이 망극합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은 이들 중 하나입니다. 마치 폐하처럼.’

에르멘가르트 가문은 모두 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이들의 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젊은 피는 에르멘가르트였다.  후계 싸움에서 쫓겨났던 이 청년은 그가 원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에 대해 조사하는건 필수였습니다. 폐하, 보십시오. 이것은 제가 수도의 대신전에서 찾아낸 문건입니다. 왕궁의 도서관에 있던 선왕폐하의 유언에 있던 암호를 풀어내어 찾았나이다.’

내밀어진 선왕의 유언장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성녀가 있기에 말룸이 있다, 성녀를 죽여라. 라는 문장은 간결했으나 그가 생각하던 것에 힘을 실어주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 인이 쓰여진 옥쇄는, 분명히 왕가에서 찍은 옥쇄인 것이다. 선왕은 이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합리적이었으면, 그것이 왜 '지금에서야'공개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생전 선왕이 살아있을 적에 해주어도 될 이야기는 왜 지금, 이런 절묘할 때 그에게 당도했는가. 그는 의심을 품었어야 했다.그러나 트라이덴은 그것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멍청한 교황마저 찬동하는 그 서류를 보고,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흥분하느라 그런 것에 대해 고찰을 하지 못했다.

때는 무르익었다. 기특하게도 성녀는 자신의 입지를 주장하기 위해 신전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 성녀의 증명 건으로 체자레는 왕위 계승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포기를 선언해 박쥐같던 교황파 귀족들 역시 와해되고 있었다. 중립에서 관망하던 데후바스 백작가가 넘어온 것은 큰 수확이었다.

신전놈들의 콧대를 눌러주기엔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리하여 일으킨 전쟁은 치밀한듯했으나 헛점이 너무나 많았다. 애초에 트라이덴의 패착은 작전이 아니라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벌어진 그 모멸과 비극에 집중하느라 평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내성의 수호 가문은 에르멘가르트 후작가문이었으나, 지금은 데후바스 백작가로 바꿨다. 지금의 애송이 후작은 내성을 지켜낼수 없을 거라는 믿음때문에 그러했다. 그 새파란 애송이는 그를 배신하고 신전으로 간 맏형과 닮아서 언제나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왕자가 그를 따르는 것 마저 그러했다.

어제의 말 역시도 그랬다. 갑작스럽게 독대를 청해서 다니엘 하드퍼드의 죄에 대해 고발하다니 말이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가? 후계싸움이 끝나서 후작위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 어린 마음을 못버리다니 말이다. 다니엘 하드퍼드가 그럴리가 없었다. 능력이 있어서 곁에 두기로 서니, 계집처럼 투기하여 형을 모함한단 말인가? 자칫하다 이것을 기사들이 듣는 앞에서 했으면 큰 일이 벌어질 뻔했다. 에르멘가르트 가문은 이제 쓸모없어졌다. 전쟁이 끝나면 중앙에서 축출할 것이다. 그 의미로 그는 대노하여, 해독제를 그가 손에 넣었다고, 그가 독살범이 되지 않는다 소리치며 그 애송이 후작을 내성으로 보내버렸다. 그런 굴욕을 당했으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왕손은 왕이 되겠죠? 저는 그 나라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증오에 이를 갈았다. 무릎을 꿇은 아버지의 이마에 흐른 피를 잊지 않았다. 그것을 미소마저 띠며 내려다 보는 체자레를 그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왕궁은 광기가 지배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버지를 두면서 겁에 질렸다. 이해하고 싶어 편지를 보냈으나 체자레는 그것을 무시했다. 심지어 그는 찾아가기까지 했으나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약속할만한 시간을 알려주겠다는 비아냥거린 대답까지 서면으로 들어야만 했다.

그는 나이를 먹어갔다, 마치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체자레 티게르난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사사건건 그를 거슬리게 한다. 그의 권위를 두고 조롱하고, 조롱하고, 또 조롱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선왕의 광기를 그대로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 증오와 분노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희석되지 않은채 켜켜이 싸여 썩어 문드러져가 광기가 되었다.

신전놈들을 없애고, 그 추기경이 중히 여긴다는 성녀를 없애겠다. 그 성녀의 부정한 자식이라  불리던 체자레 티게르난 역시 이 손에 축출할 것이다. 이왕이면 생포해서 잡아올 것이다.  내일이 되어서 벌어질 전투를 생각하며 그는 희열에 휩싸였다. 드디어 그를 마주보는 것이다. 전투는 사실 불리하지 않았다. 데후바스 백작은 단단한 강철무기의 광산을 가지고 있었고, 군사들의 질이 특히나 높았다. 죽은 베오른 에르멘가르트에겐 가려졌지만 말이었다. 죽어버린 그의 예전 호위기사를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뚝뚝한 사람은 필요 없다. 그리고 그 멍청한 아들들 역시 말이다.

-난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제야 서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요. 별이 보고싶다면 우리 같은 하늘을 바라봅시다. 재미있는 책의 이야기나 당신의 일과는 이제 편지를 주고 받아도 돼요. 나중에 제가 대신관이 되어 수도에 거하게 되면 만나볼수도 있을 겁니다. 추기경이 될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울지말아요.

사랑이라니, 그가 했던 가식이 눈물겨울 정도로 역겨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창가의 하늘을 보았다. 날은 어두웠고, 또 눈이 내릴것 처럼 먹구름이 끼어 별은 단 한개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보겠군, ‘형.’”

다음번엔 목을 자르리라. 그때 트라이덴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폐하, 데후바스 지휘관이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하라.”

성벽을 맡은 자로서, 그의 의견을 듣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좀 피곤했지만 정신만은 내일 있을 전투를 생각하자 맑았다.

“무슨 일인가 후작?”

그는 허리를 숙인 데후바스를 보았다. 전시 상황인지 그의 허리춤에는 검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국왕을 알현함에 있어, 무기를 가지는 것은 허락을 맡아야 했다. 그것을 지적하려 할 때였다.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스릉, 하며 검이 들림과 동시에 배에 격통이 느껴졌다. 호위기사들 역시 검조차 뽑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찔린 배 사이로 피가 쏟아져나왔다. 그는 배를 감싸며 소리쳤다. 그러나 호위기사들 역시 데후바스 백작의 가신들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여봐라...누가, 누가.......!”

“아무도, 네놈을 찾지 않을 것이다.”

데후바스 백작이 이를 악물며 싸늘하게 말했다.

“왕가에 대한 우리 가문의 원한은 계속 될 것이다. 나의 조상은 이 치욕을 갚으라 후계자들에게 물려주었다.”

선왕이 후작에서 백작으로 강등한 건에 대해서 그러는 것이구나. 이 반역자놈들! 그는 뭐라 말하려 했다.

“네놈의 광증에 나라 전체가 불타고 있다. 성녀를 배출한 우리 가문이 우리를 부정할만한 왕을 떠받들것 같았느냐? 우린 문을 열어 새 지도자를 맞이할 것이다. 교황이 어떤 자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네놈처럼 멍청한 우왕(愚王)은 아니리.”

그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데후바스의 후작의 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합니다.

같은 붉은 머리를 한 따스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애정을 담뿍 담은 눈이 그를 향한다. 마지막에 보이는 것은 아내의 모습도, 아들의 모습도 아니다. 그에게 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그의 머리색 같은 붉은 피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소년의 붉은 머리 색을 떠올리게 했다. 천진한 미소가 눈에 아른거렸다.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형은, 왜 변했나. 왜 변했던 것인가. 말하지 그랬어, 내게 말해주지 그랬어. 이해하고 싶었다. 알고 감싸주고 싶었다. 형이 내게 처음으로 손을 뻗어주었듯이, 누군가의 손을 잡은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런 주제에 먼저 손을 쳐내버리고 배신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증오는 나이를 먹었고, 더욱 더 커져서 그를 짓눌러 광증이 되었다. 그는 환하게 웃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그 가녀린 목을 틀어쥐고 증오를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또 애정을 갈구하고 싶었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은 그의 형 처럼, 그의 내면 역시 나이를 먹지 않았다.

‘트라이덴, 뭐하시고 계십니까.’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따스하고 애정어린 목소리였다. 그가 다시 듣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왕손, 여기서 잠드시면 안됩니다.’

형, 하지만 지금은 자야 할 것 같아. 그는 매우 졸렸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울려 퍼졌다. 트라이덴은 눈을 감았다.

*

“이게 무엇입니까.”

체자레는 내밀어진 상자를 보았다. 그의 막사 안에 들어온 것은 상자였다.

“그것이, 제 내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지휘관 데후바스 백작이 항복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모를리가 없다. 불길한 붉은 자욱과 피비린내가 상자로부터 나고 있었다. 체자레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상자에 쌓인 붉은 비단을 풀었다. 상자를 열자 왕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잠시동안 그 상자 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자를 들고 온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막사 안 의자에 앉아 테이블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그 상자에 주저없이 손을 집어 넣었다. 왕의 머리카락은 목을 들어올리기엔 너무 짧지 않은 길이었으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그의 양 볼을 잡아 그 머리를 꺼냈다. 역한 비린내가 났으나, 체자레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서늘한 불빛을 보고, 체자레는 목을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왕의 목을  들어, 체자레는 한참동안이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비단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속삭였다.

“'네가 다스리는 나라'는 이제 없구나, 트라이덴.”

막사 안은 아무도 없었고, 그 고요함 속에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이마와 왕의 이마를 마주했다. 죽은 머리에는 온기는 느껴지지 않고 싸늘함만이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모든걸 사랑할 정도로 내가 완벽한 신관이 된 건 아니었어.”

그는 아주 다정한 어투로 속삭였다. 오래전 행복했던 어느날 처럼 말이었다. 붉은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의 황금색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단다, 하지만 너 역시 같은 선택을 해버렸잖니. 미안하구나, 동생의 허물을 감싸주는 것이 형이라지만, 나는 형의 자격이 없었던거지.”

그는 피로 얼룩지며 주름져 흉한 왕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체자레의 손의 온기에 살얼음이 얼어있던 목에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경건하고 고결한 의식과도 같았다. 체자레는 아주 오랫동안 그것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뗀, 후 체자레가 말했다.

“그러니 너는 언제나 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된단다.”

눈물 젖은 금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작품 후기 ============================

넹.. 왕 죽었구여...ㅎ.... ㅎㅎ...

추천 또 넘으면 이번엔 열두시 넘어서 바로 연참하는 형태로 할게요 안그러면 열둣시 알람이 안가요

오탈타지적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빠른 수정을 위해서는 그부분을 정확히 지정해주시는게 좋아요!

뭉뚱그려 말하면 처음부터 계속 읽어야하는데. 언제나 말하지만 저는.... 오탈자를 보는데 너무 소질이 없는것. 사실 이것도 엄청 많이 고친거랍..니다..(눙물)

자 그러면 ㅇ여러분 자정에 봬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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