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제비꽃, 피어나다 =========================================================================
다니엘은 오늘도 비올렛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비올렛은 되도록이면 다니엘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교황의 성도가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려주자, 그녀는 더욱더 우울해 했다.
“왜, 설마 교황도 네게 매혹된거야? 많이 아쉬워?”
구자르트까지 전쟁에 끌어들여졌다. 나라 전체가 불꽃에 휩싸여있었다. 그 비명과 원념이 자꾸 그녀의 귀에 맴돌고 또 맴돌았다. 국왕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다니엘은 왜 그런 어리석은 제안을 꺼낸 것인가.
“그런데 너는 형을 좋아하니 안됐구나, 형은 널 배신했는데 말이야. 아주 멀리 나가서 연락도 없는 모양이야. 결국 폐하의 밀명을 받아 출진했는지도 모르지. 하긴 너같은 천민 아이를 누가 좋아하겠니. 하지만 형도 형이야, 그 냉정한 상황판단력엔 완전하게 질려버렸다니까.”
비올렛은 다니엘의 말을 듣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완벽한 강자의 입장이었고, 정말로 비올렛을 그냥 봐주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 지긋지긋함에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물었던 것이다.
“다니엘, 너는 왜 이렇게 네 형을 미워해?”
그 말은 다니엘을 놀라게 한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비올렛이 처음으로 그에게 보인 동등한 관심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비올렛은 언제나 그에게 이야기만 들으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으며 그것이 거짓이라 조롱하며 살아왔다. 그에게 그 어떤것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고통에 견디다 못한 비올렛의 호소였다. 그것을 비웃을 줄 알았던 다니엘은, 그저 아주 놀라운 것을 들었다는 듯 비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올렛은 다니엘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예전의 그의 장난감으로서도, 그보다 높은 자로서 멸시하는 표정도 아닌 그저 인간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다니엘은 어딘가에 감전이라도 된 것 처럼 몸을 움찔 했다 이것은 그가 받은 익숙한 종류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의 가면, 그의 광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었다.
“아니야, 너는 에이든도 미워하고. 후작 가를 미워했어. 하지만 너는 거기 안에 있었잖아. 나랑은 달랐어. 거기에 온전히 속해있었지.”
비올렛의 퀭한 눈동자가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이 피식 바람빠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온전히’속했다고?”
비올렛은 다니엘을 몰랐다. 정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가 왜 이렇게 까지 악독한지, 왜 그렇게 남의 고통을 즐기는지, 왜 그렇게 에르멘가르트, 자신의 가문을 싫어하는지 몰랏다. 다니엘은 울분과 독기, 악과 광기를 고스란히 담은 그의 푸른 눈으로 비올렛을 보며 독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순수한 의문은 처음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러나 그 얼굴은 울것처럼 일그러졌다.
“난 한 번도 그곳에서 온전히 속한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비올렛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올렛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무릎에 파고 들었다. 갑자기 무릎에 느껴지는 그의 얼굴의 감촉에 비올렛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다행이 다니엘은 얼굴을 묻은 그녀의 무릎 위까지 손이 올라오진 않았다.
“비올렛 정말이야. 나는 그곳에 속하지 않았어. 자랑스러운 군청색 머리와는 너무 다른 이 머리색처럼 말이야.”
그는 흐느끼듯 말하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가 이것을 말하고 싶었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줄곳 이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알아달라고, 알아달라 소리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베오른 에르멘가르트는 나를 버리는 패 취급했어. 난 들었지. 어차피 후계자는 잘난 형이고, 또 건강한 막내까지 있다고 하는 것을.”
“........”
“그래 나 따윈 그냥 없애버려도 되는 자식이었어. 그렇잖아? 아버지란 작자는 내가 병에 걸려도 날 찾아온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어. 그마저도 찾아오는 순간 내게 말도 붙이지 않고 슬쩍 보다가 돌아가버렸지. 심지어 형도 에이든도 못오게 했어. 병이 옮는다고, 후계자를 잃어버릴 수 없다고. 그래서 비올렛, 사실은 나, 어렸을 적에 형과 에이든과 무척 서먹했어. 그 인간들은 지긋지긋하게 건강했거든.”
비올렛의 머릿속에는 방안에 앓아 누워있던 소년이 보였다. 고독한 방 안에서, 어머니의 걱정어린 치료를 받는 그는, 아픈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을 먼저 습득했다.
“내가 다섯 살때, 창문을 보았어. 에이든은 나보다 잘 걸어다니는 두살이었고, 형은 일곱살이었지. 형은 에이든을 안아주고 있었어. 에이든의 웃음소리가 이곳에까지 들려왔지. 아버지는 그걸 지켜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어. 그건 너무나 아름다웠지. 사실 그들은 내 사랑하는 가족이라,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그의 얼굴은 꿈꾸는 얼굴처럼 몽롱했다. 그때의 그 꿈결 같은 장면을 다니엘은 상상하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건강해지면, 저곳에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신에게 빌고 또 빌었어, 비올렛.”
“.......”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그저 내가 건강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면, 아버지의 관심도, 근심어린 얼굴이 아닌 따스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시선도, 멋진 형과 귀여운 남동생도 날 좋아해주고 사랑해 줄거라는 믿음이 있었어. 신은 과연 내 바람을 들어주었을까? 아니, 전혀 들어주지 않았어.”
그녀가 어렸을때 내일 날씨가 좋게 해주세요, 엄마의 감기가 낫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던 것 보다 더욱 더 그는 절실하게 신에게 빌었으리라. 다니엘의 얼굴을 본 비올렛은 어쩐지 어리고 창백한 금발의 소년이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 거기서 난 아주 어렴픗이 깨달았을지도 몰라. 나는 저들 사이에 영원히 속할 수 없겠구나.”
“........”
“그래도 어리고 어리석던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어, 하루 빨리 몸이 나아서. 저곳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형과는 한번도 제대로 지낸적 없지만 날 좋아해 줄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는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말이야. 에이든은 작고 귀여웠지. 나도 저기에 들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그러나 사람들은 에이든만을 귀엽다 여겼지 병약한 둘째는 안중에도 없었어. 어렸을 적 에이든의 장난기는 아주 사랑스러웠나보더라고.”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올렛은 다니엘의 냉소가 작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 기도가 듣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은 날, 그래도 나는 만족했어. 사실 어머니만 있으면 되었어. 어머니는 내게 다정하셨으니까. 어머니만이 날 유일하게 생각해줬거든. 다른 형제들 보다 더욱 더 말이야.”
그는 비올렛의 치맛자락을 꽉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후작가에 입양되었을 때,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조용하고 기품있는 가족처럼 보였다. 비올렛의 눈에는그 위화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후작은 그를 아들로 대했고 에셀먼드도 에이든도 그를 격없이 대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다니엘 나는...”
“예전에 이곳에서 화재가 있었어. 아, 물론 아주 작은 화재라 너는 모를거야. 아니 그건 나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게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으니까. 하녀 하나가 램프를 잘못된 위치에 두고간 모양인지 불이 났었어. 잘난 후작님께선 출근하셨고 불이났던 곳에는 마침 하녀들이 없었어. 집사와 앤은 휴가를 갔었고, 나머지 하녀들은 별관과 정원을 청소하고 있었거든. 그 램프가 커튼에 불이 붙어서, 2층은 연기에 휩싸였지. 나는 겨우 여섯살이었고, 그때도 열에 앓아누워 움직일 수 조차 없었어.”
“........”
“살려달라고 빌었어. 신에게 그렇게, 빌었어. 연기는 목을 넘어오고, 아무도 날 구해주러 오지 않았어. 창밖은 미치도록 아름답고 파랬는데,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았어. 숨이 막혔고 뜨거웠어. 그 와중에도 나는 어머니를, 내 형들을 걱정했어. 그들역시 나와 같은 고통에 처해있다고 생각했어. 난 괴로웠어. 너무나 괴로워 죽을 것 같았어. 너무 연기를 많이 마셔서, 목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같았어. 눈은 매워서 뜰 수 없었지. 사람이 죽는다고 할 때 이상한 힘이 생긴다고 하지. 나는 일어났고,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달렸어. 난 죽고싶지 않았던거야 . 내가 간 곳은 계단이었고, 나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어. 1층은 숨쉬기가 편했고 나는 기어서 바깥에 겨우 나갔어. 그리고 얼른 하녀에게 말해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구하자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는 발견했던거야....... 어머니는..... 형의 손을 잡고 있었고. 에이든을 안고 있었어. 어머니는 2층에서 형이 책을 읽는것을 보고 에이든을 재우고 오겠다 말했지, 나를 잊을리는 없었어...... 그런데 날 잊은거야, 아니, 아니지, 버린거지.”
비올렛은 놀라서 다니엘을 보았다. 얼굴을 묻은 무릎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훌쩍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봇물이 터지듯, 그렇게 그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비올렛이 독기가 올라서 에셀먼드와 에이든, 후작을 대했듯이, 그 역시도. 겨우 혼자서 살아나온 소년이 자신의 형제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을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때 어머니와 형의 놀란 표정이란! 그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나는 버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지, 에이든처첨 건강하지 못해서 나는 그 '여유분'도 못됐어. 나는 능력이 없었거든!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겨우 기침 몇번 하는게 고작이었어. 그때부터였을거야, 형이 나한테 관심을 가졌던게. 형은 처음부터 내게 별로 관심이 없었어. 잘난 나머지 어렸을 적 부터 바빴거든.......”
“........”
“그게 동정이라는걸 알고 있었지, 적선이었어, 너무나 알기 쉬운 감정인데 그걸 모를리가! 그때, 그때말이야, 내 인생에 가장 비참했을 때, 제일 사랑하던 어머니에게 선택받고 나는 버려졌는데 겨우 발버둥쳐 살아남은 것을 보았을 때, 그 고귀한 형은 날 얼마나 불쌍히 여겼을까!”
“.......”
“에이든에게 좋은 형이 되어줄 수 없으니 네가 되라고? 버림받은 자식새끼가 제대로 받아들여진 자식한테 좋은 형이 되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는 비올렛이 걸터앉은 침대의 매트릭스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부들부들 떠는 주먹이 탕, 탕, 거리는 소리를 내며 섬뜩한 울림을 자아냈다.
“어머니는 내가 일곱이 될때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미안하다 사과했어. 나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했어, 하지만 두번 다시 어머니를 믿지 않았어. 그것이 내가 본 진심이었으니. 어느날 어머니는 병에 걸렸고, 꼭 마법처럼 내가 건강해졌지. 나에게서 옮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아 건강해졌다 했고, 잘난 후작님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하는 듯 했어. 심지어 후작님은 어머니의 임종때 나를 찾았는데 나보고 어디를 놀러 갔냐고 크게 야단을 치셨어.”
“........”
“난 놀러 간게 아니야... 나는 한번도 그런적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난 일어나자마자 예배당에 가 있었거든. 신에게, 아그레시아에게 얼마나 빌고 또 빌었는데.......어어, 얼마나.....사랑하는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내가......”
제기랄, 그가 다시 욕을 내뱉었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비올렛은 그의 짙은 원망의 감정의 실체를 목격했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비올렛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가진 절망에 공감해 버렸다.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서 받았던 소외감에 공감하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는데.
다니엘은 처음에 온 그녀에게 다정했었다. 정말이었다, 그는 한없이 다정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후작 가에서 처음으로 안도했다. 그는 계산적이긴 했지만, 비올렛을 아껴주었다. 그것이 동정인지, 우월감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진실한 호의인지는 모른다. 비올렛은 그때 따스함을 느꼈다.
어쩌면 다니엘에 대해서, 그렇게 넘겨버렸던 것도,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때 예배당에서 그는 어떠했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쓸쓸한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했던가.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는데.
어느새 울음을 멈춘 다니엘이 비올렛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다. 비올렛의 눈에는 조용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다니엘은 그것을 보았다. 하얀 손이 비올렛의 얼굴에 닿았다.
“날 위해 울어주다니 너는 여전히 착하구나.”
“아니야.”
비올렛의 단호한 단답에 다니엘이 웃었다. 공감하고 안아주기엔 그들은 너무 많이 와 버렸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에,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해, 비올렛.”
그의 울음기 서린 목소리는 애절하고, 절실했다. 비올렛은 움직일 수 없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 작품 후기 ============================
추천수 2000이네요, 내일 또 일어나면 올릴게요 제가 잠와요...
사실 다니엘에 대한게 서평에서도 이해가 안간다는 분들이 많아...너무 걱정했어요...
다니엘 이런 과거가 있다는 것..
누구나 다 가족들에게 소외받아 서러웠던 경험있으시죠? 다니엘은 그런데 몸이 약해서..
게다가 머리색까지 달라서, 그리고 잘하는게 가문이 추구하는것과 달라서
상당히 소외감을 느꼈어요... 특히나 어렸을적에 화재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아
사실 도저히 후작과형과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겠죠.
사실 후작님의 심리는, 버리는패라기 보다는 아이에게 정이 들까봐 일부러 더 냉막하게 말한게 있어요. 후작님은 비올렛에게도 말실수를많이했죠. 아들에겐 더했을거라 생각해요. 에셀먼드가 그렇게 자랐던 것 처럼
에드야 뭐..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