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제비꽃, 피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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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전에는 유례없이 고급하녀들이 몰려와 비올렛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들은 비올렛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출발 바로 당일, 리체의 남동생이 아프다는 소식만 없었더라면 리체역시 이곳에 와서 신기하다고 비올렛에게 재잘거렸을 터였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으나 리체의 불안하고 서투른 시중보다는 수도의 눈치 빠른 고급하녀들의 손길이 받기 편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섬세한 손길에 비올렛은 문득 앤이 그리워졌다. 그녀의 언니같은 존재, 잘 있을까? 하지만 이제 후작가에 찾아갈 수는 없다. 집을 나온 신관역시 혈육을 만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 은연중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성녀가 아닌가?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은 하지 않음이 옳았다.
부드러운 연한 하늘색 드레스가 찰랑였다. 성복이 아닌 예복처럼 차려 입은 드레스를 입은것이 어찌나 오랜만이었는지, 부풀어진 속치마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과연 린도가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은 것인지 비올렛의 목에는 그동안 거의 착용하지 않았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백금으로 만든 목걸이는 두개의 체인을 꼬아 만든 것으로 체인이 만나는 곳 마다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다이아가 세공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있는 메인 쥬얼리로는 비올렛의 눈 색과 똑같은 깨끗한 색의 아쿠아마린이 반짝이고 있었다.
늘어트리고 다녔던 머리카락은 장미모양으로 틀어올려졌고, 언제나 숨겨졌던 어깨의 선이 드러나 있었다. 노틸레스제 비단은 그녀가 입었던 어떤 드레스의 옷감보다 부드러웠으며, 그 광택이 은은했다. 여린 분홍 꽃물을 머금은 입술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비올렛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꾸며져 아름다워진 자신의 얼굴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우세요!”
하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올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는 조였고, 속치마가 무거워 걷기 힘들었다. 언제나 품이 넉넉했던 성복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비올렛은 한걸음, 한걸음, 방 밖을 나가 복도를 둘러 보았다. 새하얀 신전에 어울리지 않는 색이 있는 드레스가 비올렛의 발걸음에 사뿐하게 흔들렸다. 복도를 지나자 비올렛은 에셀먼드를 보았다.
그 역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예전 크리처 토벌 후에 잠깐 예복을 입었던 에셀먼드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보다 훨씬 화려한 예복을 입은 그를 보고 비올렛은 아릿하게 미소 지었다.
“옷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비올렛의 말에 에셀먼드가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잠시동안 그의 시선이 비올렛의 얼굴에 머물렀다. 아주 약간의 침묵 끝에 그가 입술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고 그는 손을 뻗어 비올렛의 손등을 입술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손등이 열이 오르는 듯 화끈거렸다. 그 느낌에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물빛 비단장갑을 낀 손이 에셀먼드의 장갑을 낀 큰 손 안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쥐어졌다. 그녀는 그 손의 따스한 감촉에 미소를 지었다. 에셀먼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기분이 좋으신 겁니까?”
“그럼요.”
비올렛이 말했다. 에셀먼드는 비올렛의 얼굴과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기억나시나요? 1년 전에도 왕자 전하의 생일 파티때 말이에요, 그때도 절 에스코트 해주셨잖아요.”
1년, 겨우 1년 전임에도 그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샤를을 가르쳤던 것도 그렇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다. 게다가 그땐 이자카 역시 있었다. 그는 뭐하고 있으려나. 비올렛은 상념에 잠겼다가 에셀먼드의 대답에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그 뿐. 그것이 그에게 좋은 기억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과거는 비올렛도 에셀먼드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으니.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하자 에셀먼드가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에셀먼드는 서로 마주 본 채 마차에 앉아 있었다. 에셀먼드의 시선이 비올렛을 똑바로 향해있음에도 비올렛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왕궁이 그리우셨던 겁니까?”
“글쎄요.”
어쩐지 이 사람을 놀리고 싶었다.
“저번부터 이상합니다. 당신은 지나치게 들떠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의 얼굴을 본다. 비올렛이야 말로 어깨를 으쓱 했다. 왜 사람들은 그녀가 웃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일까.
“저 어렸을적에 많이 웃었어요. 제 엄마 아빠랑 살고 있을 때도, 꽃의 거리에 있었을 때도, 후작가에서 몇년간은 잘 웃었잖아요. 왜 지금은 이상하다 여기는 건가요?”
그 부드러운 말에 에셀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봐도 비올렛에게선 아무것도 얻어낼 것이 없다. 비올렛은 그저 만개한 꽃처럼 웃을 뿐 이었다. 그녀가 마차의 창을 열었다. 수도의 밤의 경치가 보였다. 바람이 들어와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살짝 간질였다. 그녀의 수호자는, 수호해야 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어색하여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비올렛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
비올렛의 방문은 연회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비올렛은 왕과 동등한 지위가 있다 명시되는 성녀이니, 선택한 것이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수도의 왕궁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어두운 입구, 비올렛은 잠시동안 서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정원의 꽃들은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가을이 옴을 알리며 그 향기를 뽐내고 있다. 교황성도, 왕궁도 이렇게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왕궁 특유의 향기가 나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귀부인들의 수다소리, 남자들의 호쾌한 웃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비올렛은 어쩐지 지금이 더 긴장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슬쩍, 에셀먼드를 보니 예상대로 에셀먼드는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시종들이 문을 열고 그녀의 참석을 알렸다. 그녀는 대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또각거리며 힐을 신은 발걸음은 경쾌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았지만 우아함이 서려 있었다. 문을 들어가자 일순 연회장의 모든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모두들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이전 그녀의 생일 연회에서도 이러한 주목을 받았지만 그때 그녀는 지나치게 날이 서 있던 나머지 자신이 긴장했음을 숨기려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지금 비올렛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비올렛과 에셀먼드를 보았다 후계를 버리고 피 한방울도 안 섞인 여동생에게 가디언을 지원한 기사와 성녀가 어떤 시선으로 비칠 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를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연회장이 아닌 단 위에 마련되어 있는 교황과 왕의 사이인 상석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그녀는 교황과 왕의 사이에 마련된 그녀의 자리에 앉앉아 부채를 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비올렛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왕과 교황과 같은 위치인 성녀’라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실질적으로 비올렛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자신을 뜻 하며,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언제나 성녀의 자리는 인정했지만 그 성녀가 가진 위상에 대해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의 비올렛은 달랐다. 이것은 신적에 적을 올린, 성녀로서 이들의 앞에 군림하듯 여왕처럼 앉아 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역병과 크리처들에 대해 해결하고 나니, 저들 역시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닌, 언젠가는 신의 품으로 돌아갈 사람들처럼 생각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치졸한 우월감이라면, 그녀는 그 우월감을 가진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침묵하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기대하는 얼굴이었으나 비올렛은 그저 부채만 팔랑이며 입을 막을 뿐이었다. 이윽고 연회장에는 티게르난 공작이 다가왔다. 자신의 머리 색 처럼 붉은 예복을 멋드러지게 차려 입은 체자레는 언제나 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연회장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체자레는 언제나 그 화려한 머리 색 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 끌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상석에 앉아 있는 비올렛을 향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이다.
“나라의 살아있는 심장을 뵙습니다.”
장갑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추기경, 공작령의 업무가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체자레를 본 것은 한달이 넘어섰다. 한 달 동안에도 그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체자레는 그렇게 말하며 마련된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국왕을 기다렸다.
“성녀님, 그걸 아십니까?”
체자레가 속삭였다. 비올렛이 그것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미소 지으며 비올렛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비올렛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말에 비올렛의 두 뺨이 붉어졌다. 아무리 꺼리는 사람이라도 갑작스럽게 저런 말을 하게 된다면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하께서 비올렛을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제가 다신 그렇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드레스는 제 옷이 아니니까요.”
“저런, 어떻게 비올렛에게 선물되는 아름다운 옷들이 비올렛의 것이 아닙니까? 오로지 성녀인 당신만을 위한 것들입니다.”
체자레가 그렇게 말하자, 비올렛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저에겐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걸 누가 말한 겁니까?”
비올렛은 뒤에 에셀먼드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비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꼭 누군가가 말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성녀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비올렛은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살펴보았다. 오묘한 색의 드레스는 확실히 고가의 비단으로 만들어진 값을 하듯, 가볍고 구김이 가지 않았다.
“성녀가 드레스를 입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디언?”
체자레가 뒤를 돌아 에셀먼드를 보며 물었다. 비올렛은 체자레가 에셀먼드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비올렛의 시선이 에셀먼드를 향했다. 에셀먼드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체자레가 말했다.
“설마, 그 드레스가 안어울린다 말했던 무도한 이가, 경은 아니겠지요?”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그것을 떠보기 위함이었구나. 비올렛을 향할 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싸늘함이 담겨 있었다. 체자레는 언제나 정확했다. 예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자작부인에게 훈육을 받았을 때 그녀는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다.당시 에셀먼드도 그런 소리를 했었고, 1년 전에도 그런 소리를 했었다. 물론 그의 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에셀먼드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할 터였다.
“추기경.”
비올렛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녀의 눈이 서늘함을 품자, 체자레의 시선이 다시 비올렛에게 향했다.
“그저 농이었습니다. 바로 발톱을 드러내시니 민망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성하에 대해 실례가 되잖습니까. 그래서 조금 장난을 친 것 뿐입니다.”
그 말에 비올렛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린도가 그렇게 신이나서 선물해 준 옷들이다. 비올렛 자체가 그 드레스에 대해 무심하다 못해 부정적인 감정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가는 린도와 드레스를 고른 신관들의 신관들의 표정이 실망으로 일그러질 것이다.
“성하께는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체자레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보는 눈에 묘하게 애정이 서려있어, 비올렛은 또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체자레와 더 대화를 나누려 했지만, 이미 왕이 들어와 비올렛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왕은 못본 사이에 더욱 더 나이가 들었던 듯 했는데 눈은 푹 꺼졌고, 주름살이 더욱 더 늘어나 있었다. 그의 노란 금안이 그녀를 보고 체자레를 보았다. 왕은 심지어 체자레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비올렛의 인사에도 국왕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체자레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교황의 대신으로 온 체자레는 언제나 국왕을 거스르게 하는 오만불손함이 있었으며, 비올렛은 국왕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비올렛에게도 흔한 인사치레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왕비와 인사를 나누던 비올렛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스승님!”
샤를이 멀리서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지만, 이 왕자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 했다. 호박색눈동자가 반짝 별처럼 빛이난채, 소년은 달려오고 있었다. 그를 가르쳤던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소년은 환한 얼굴로 비올렛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연회장에서 비올렛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듯이 말이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작년에는 단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온 샤를이 이번에도 그녀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의 1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만나지 못했는데도 마치 마모되지 않은 것 처럼 말이다.
비올렛은 샤를을 향해 그렇게 정을 준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먼저 연락하지 않는 비올렛에게 재촉하듯 편지가 왔던 것에 답장을 하면서도 왕자의 이 관심은 그저 그가 성인이 되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먼 훗날, 아니, 가까운 시일이라도 비올렛에게 배신할 것이라 생각했다. 맑은 목소리에는 변성기가 서린 듯 이젠 제법 굵어졌다. 그 사이 키가 한뼘이나 더 자란 듯 했다. 비올렛은 샤를을 자신이 생각 했던 것 보다 더욱 더 좋아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전하, 뛰면 넘어지십니다.”
그럼에도 샤를루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안겼다. 비올렛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 소년을 절대로 미워할 수 없었다. 노을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고싶었습니다.”
샤를의 말에 비올렛이 저도요, 라고 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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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부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