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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132화 (125/208)

00132  제비꽃, 피어나다  =========================================================================

“손목에 힘을 더 주십시오.”

비올렛은 에셀먼드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몇합정도 검이 부딪히며 격렬한 소리가 났다. 도열해있는 성 기사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성녀가 검을 쓴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몇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멀리서나마 보았다. 하지만 그땐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보였고, 궁술만 연습해서 그녀의 실력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실력일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무가(武家)였던 에르멘가르트 가문에 일시적으로 나마 적을 올렸다는 사실이 검을 배웠다는 것으로 연결이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의 생각에서 성녀는 언제나 지킴을 받을 만한 위치였다. 지금 검을 맞대고 있는 에셀먼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수준급 검술이 아닌가. 궁술을 연습할 당시 궁술역시 대단하다 생각했건만.....  몇번의 합이 끝나고. 비올렛은 검을 땅에 꽂았다. 젖은 머리에 땀이 젖어 흘러내렸다. 에셀먼드가 그런 비올렛에게 무엇이 잘못 된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것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저 정도 까지 되려면 얼마나 구른거지?”

불쑥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케이든이 대답했다.

“글쎄요 못해도 열두살 정도부터 혹독하게 수련하지 않았나... 적어도 검을 휘두르시는데 망설임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던 케이든은 놀라 옆을 보았다. 굵직한 목소리가 낯이 익었던 탓이었다.

“서...성하.”

린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케이든은 린도가 꽤나 화가 났다는 것을 느끼고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린도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비올렛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 여름에 입은 옷이 땀에 절어 비올렛의 몸에 딱 붙어 묘한 느낌을 주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에 꽂혔지만 에셀먼드가 그들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자리를 움직이더니 비올렛을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시선을 차단했다. 린도역시 그들을 한번 훑어본 후 비올렛에게 다가갔다.

“가디언, 그대는 너무 성녀에게 혹독한거 아닌가?”

요사이 잠잠하다가 갑자기 왜 또 에셀먼드에게 그러는 것일까. 비올렛이 린도를바라보자 린도가 입고있던 하얀 옷의 옷깃으로 비올렛의 얼굴과 목에 또르르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언제나 길었던 머리는 땋아 늘어트려 가느다란 어깨와 새하얀 목덜미가 다 보였다. 오히려 평소 여성스러운 성녀의 모습보다 헐렁한 여름, 여성용 전투복을입은 것이 미묘한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린도는 그게 못마땅했다.

“린도?”

“꽃같은 비올렛의 얼굴에 땀을 흘리게 하다니.”

성녀는 땀을 흘리면 뭐 비누처럼 녹아버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비올렛은 그말을 듣고 황당해했다. 그에 에셀먼드가 말했다.

“선선대 후작께서, 몸을 지키는데 필요하다고 결정하셨던 일입니다.”

그 말에 린도가 얼굴을 찌푸렸다.

“검을 쓰는 그대는 이 짓이 힘들다는 것을 알터. 그렇게 대단한 맹세를 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그대로 두지 그랬나? 그대는 그대의 검에 자신이 없는거지?”

“린도!”

린도의 비꼼에 비올렛이 화를 냈다. 이번에 린도는 비올렛을 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너를 위해 화를 내주는데 왜 나에게 그래! 라는 징징거림이 내재된 얼굴이었다. 비올렛이 노려보자 그는 입을 쏙 다물었다.

“여쭙겠는데, 그렇다면 말룸이 오기 전까지 성녀님들께서는 따로 무예를 배우시지 않으신 겁니까?”

에셀먼드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비올렛 역시 검을 배웠던 것도 말룸때문에 배운 것이라 알고 있었다.

“성녀를 보호해주는 가디언이 있고, 말룸때는 성녀는 성력만으로도 말룸을 상대할 수 있었어. 물론 성녀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상처를 입었지만 언제나 말룸을 없애는데 성공했지. 이런 기록은 그대도 알텐데?”

“........”

성녀들이 무예를 배운 적이 없다니 조금 새롭긴 했다. 힘들었던 세월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그동안 했던 일이 헛수고일까. 비올렛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일이 힘들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언제나 울었던 것도. 다른 성녀들은 그렇다면 전부 이런 경험이 없었단 말인가?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린도. 그만해.”

“왜 나한테 그래 비올렛!”

그가 짜증을 냈다

“보호 받아야 했던게 맞잖아. 성녀인걸? 나라를 구할사람이잖아. 왜 땅바닥에 구르면서 자길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해? 알아서 보호해 줘야 하는거 아니야? 넌 신전에 왔었어야 했어!”

어렸을 적, 린도는 비올렛을 찾아 데리러 왔었다. 그러나 비올렛의 거부에 어쩔줄 몰라하며 그는 손을 거두었다.

“그때 내 손을 잡았어야 했어. 내가 그때 널 데리러 왔어야만 했다고.”

왜 린도가 억울해 하고 분해하는지 모르겠다.

“너 동물의 말을 알아듣잖아. 내가 아무리 모른다해도, 검술 수련에서 사냥과 살생은 필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

비올렛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이 린도가 분노하고 있는 이유였다. 비올렛은 린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비올렛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신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이다. 비올렛에게 살생의 의미는 다른 이들과 경우가 다른 것이다. 마치 ‘살인’처럼 죽기 전 동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활을 배웠어. 그러니.....”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그건 살생하는 죄책감으로부터 달아나려 한 임시 방편인거잖아 뭐가 달라!”

린도가 더욱 더 화를 냈다. 비올렛 역시 이번에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맞았다. 동물을 죽이는 죄책감에, 에셀먼드의 제안에 따라 활을 배웠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그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그러나 린도는 그 모순을 지적했다. 그 소리가 듣고싶지 않아. 생명을 죽이는 감촉을 느끼고 싶지 않아 배운게 활이라는것은 모순이었다. 어차피 활이든 검이든 생명을 똑같이 죽이는 것. 린도의 말은 정확했다.

비올렛의 표정을 본 린도의 얼굴이 아차 싶어 일그러졌다. 심지어 린도의 일방적인 화를 보고 있던 성기사들도, 옆에 있던 에셀먼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냈던 린도 마저도 아무말도 하지 못햇다. 비올렛의 얼굴은 그만큼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저 아무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그녀는 린도에게 몸을 틀었다.

이대로 또 무시당하는건 아닐까. 소리지르고 울면 어떡하지? 아니, 나를 무시하고 당장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비올렛은 린도에게 몸을 틀자마자 팔을 뻗어 린도의 두 손을 잡았다.

“린도.”

또 뭔가 화를 낼 것 같았던 비올렛이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린도였다.  당황한 금색눈동자에 비올렛의 하늘색 눈이 곡선을 그렸다.

“고마워. 이제 됐어. 응? 그만화내.”

그 말에 린도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되면 더 화를 내려야 낼 수도 없다. 린도의 얼굴이 울컥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다시 또 입을 뻐끔대며 다물었다.

“이제 여기에 별로 불만도 없어. 그것때문에 왕궁에서 하쉬샤신한테 죽을뻔 하다 살아났는걸? 너도 알고 있잖아. 이젠 괜찮아. 말룸과 싸울 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아무런 도움이 안되진 않을거야. 그때는 그 누구도 날 지켜주지 않는 나 혼자만의 싸움이잖아?”

“......”

말룸과 싸울때는 말룸이 나타난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금기가 있었다. 그곳에 나타난 사람은 국법이든, 성문에 의거하든 나라 제 1의 금기를 어긴 대역죄로 처형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올렛은 말룸과의 싸움에선 철저히 혼자여야만 했다. 그리고 후작 역시 그러한 점을 대비했던 것이다. 만일의 하나를 위해서 .

그것이 나라를 수호하라는 그의 강박적이며 우직한 충정 때문인지, 자신을 미워하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비올렛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후작은, 그녀의 양아버지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죽은 후작을 떠올렸다.

“미안.”

그때 린도가 사과했다. 푹숙인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어렸다. 그러나 비올렛은 생각보다 상처 받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린도는 그녀의 상황을 보고 그녀 대신 화를 내준 것이었다. 린도가 비올렛에게 잡힌 손을 꽉 쥐었다. 비올렛의 미소를 보던 린도는 눈을 피했다. 얼굴에 피가 몰려 심장이 덜컹 뛰기 시작한 것이다.

비올렛이 에셀먼드를 보고 돌아가자고 했다. 서서히 잡힌 손이 놓아지고, 비올렛은 다시 신전 안으로 돌아갔다. 성기사들이 조용히 수근거렸다. 지금 성녀님의 미소를 본건가. 그래, 그런거겠지. 린도는 비올렛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잡힌 손의 감촉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

“차는 안 드실건가요?”

비올렛이 물었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은 비올렛을 보며 에셀먼드는 입을 다물었다. 비올렛은 에셀먼드가 갑자기 왜 그렇지 않아도 없는 말수가 줄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비올렛의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셀먼드 경?”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분명 목이 탈 터였다. 그녀가 두번 부르자 에셀먼드가 결국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린도가 아버님을 비난해서 신경쓰이시나요?”

“아닙니다.”

에셀먼드가 말했다. 비올렛은 차를 부어 에셀먼드에게 내밀었다. 에셀먼드는 그 붉은 찻물을 보고 있었다.  기운이 없는건가. 비올렛이 에셀먼드를 보았다. 그의 어두운 푸른 눈이 비올렛을 향했다.

“저는.”

“...저는?”

에셀먼드의 말에 비올렛이 뒷말을 따라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걸까? 아직도 멀었다니. 비올렛은 에셀먼드의 입에서 그런 자조적인 말이 나올줄 몰랐다. 그저 그 말의 진의를 해석하려 애썼다. 무엇이 멀었다는 것일까.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경.”

“아니, 아닙니다.”

비올렛의 얼굴을 본 에셀먼드가 말했다. 비올렛은 그 말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검술 연습을 하신 겁니까? 그것도 연무장에서?”

비올렛이 검을 휘두르는 것은 거의 없던 일이었다. 활 역시 최근에는 쏘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다시 몸을 단련시키는 것일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요.”

비올렛이 대답했다. 그녀는 꿈의 붉은 눈의 시선이 자꾸 강해져 온다는 것을 말할수는 없었다. 그 붉은 눈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말룸’이다. 그 시선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아무것도 안하는것은 초조했다.

“잠을 요새 또 못주무십니까?”

“네?”

“인기척이 들립니다.”

“아.”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셀먼드는 정확하게 그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다 일어난 인기척이 들리다니, 그것도 좀 창피한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숨기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에셀먼드가 말하자 비올렛이 응수했다.

“하지만 뭐가 아직 멀었다는 건지 경도 숨기시지 않았습니까.”

비올렛의 말에 에셀먼드의 눈이 약간 크게 떠 졌다. 사실 대화는 이렇게 나누고 있어도 여전히 비올렛은 에셀먼드에게 아직도 멀었다는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멀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도대체 그 부족한게 무엇인지요.”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으신겁니까?”

“아마 그것때문에 또 잠을 못잘지도 몰라요.”

비올렛이 턱을 치켜올리며 도도하게 대답했다. 말을 꺼냈으면 숨기지를 말아야 했다 비올렛은 에셀먼드에게 꼭 그 대답을 듣겠다고 다짐했다.

“또 밥먹을때도, 기도중에도 계속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그 말에 에셀먼드의 장난기를 돋운 것 같았다. 비올렛이 이 재미없는 장난질에 한마디라도 할 요량으로 에셀먼드를 보자 에셀먼드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이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장난을 치나.

“그래요 저도 이제부터 숨길거예요, 그러니 경께서도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세요.”

비올렛이 말했다. 치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온도가 다른 에셀먼드가 언제나 미웠다. 그런 투정에 에셀먼드가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

“언제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난을 치면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려면 좋으련만. 또다시 이렇게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또 다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붉어진 뺨을 숨기려 비올렛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이렇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녀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하느라 애썼다.

“그, 그래요, 계속 생각하세요.”

설령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죄책감에 기반된 감정임을 너무나 잘 안다. 더 나아간다면. 오누이 같은 그런 다정함일지도 모른다. 에셀먼드에게서 그녀는 여동생, 아니면 자신이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 아니면 평생 지켜줘야 할 사람인 것이다.

“나도 더 바라진 않을게요.”

그녀가 작게 그 말을 했다. 그 말이 에셀먼드에게 닿았는지는 모른다.

*

눈을 뜨자 비올렛은 황폐해진 초원에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달콤한 향기와 시원한 바람, 그 바바람에 노래하는 초록 풀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또 ‘신’을 만나는 곳임을 알았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녀는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왔구나.”

그녀가 미소 지으며 저 멀리 다가오고 있었다. 비올렛은 신을 노려보았다. 비올렛은 아직도 그녀가 보낸 ‘역병’에 납득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의 전지함과 전능함에도 의혹이 가득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도대체 왜 신이라는 작자에게 이 악취가 나는 것일까.

“이제 찾아오지 말아요, 보고 싶지 않아요.”

비올렛이 신을 보며 말했다. 신을 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애달프고 처연했다. 하지만 그동안 왜 몰랐을까. 그들이 만났던 풍경은 계속해서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에 파묻인 썩은내가 코를 찔렀다. 코를 막았지만 소용없는 악취였다.

어딘지 모르게 공포감이 들었다. 그것은 왜 인지 몰랐지만 비올렛은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지마.”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었지만, 목소리는 섬찟했다. 긴 검은머리카락이 음산하게 땅에 늘여져 질질 끌리고 있었다.

“넌 내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그녀가 노래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비올렛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렸을적 이따금 꾸었던 꿈이다. 자신을 찾아 헤매는 달콤한 목소리. 그리고 찾았다며 벅차오르게 기뻐하던 그 목소리.

“넌 내거야, 아이야. 도망치지 마.”

그녀를 깨우던 소리. 비올렛은 처음으로 이 꿈속에서 겁에 질렸다. 그리고 그동안 이 신이라 여겨왔던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점점 썩은 내를 풍기며 비틀거리며 천천히걸어왔다. 그 감긴 두 눈이 처음으로 떠졌다. 핏빛의 붉은 두 눈이 보였다.

같은 꿈을 꾸면서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붉은 두 시선이 자신을 쳐다본다 생각하면서, 그 시선을 가진 여자가 저 여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붉은 두 눈이 어쩌면 말룸일지 모른다 생각하면서 왜....!

“당신은, 신이 아니었어, 당신은, 말룸이었던거야! ”

비올렛이 소리쳤다. 언제나, 베일에 쌓여 있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이로운 기적의 존재라, 비올렛만을 사랑하는 줄 알았던 신인줄 알았던 여자가 드디어 가면을 벗었던 것이다. 신인 척 하고 그녀에게 들러붙어서, 그녀를 없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가 붉은 입술에 비소를 지었다. 그녀는 입이 찢어지듯 웃고 있었다.

“비올렛, 절대 도망가선 안돼. 넌 내 거야.”

그 두 눈에 핏물이 서리며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가 전신을 엄습했다. 비올렛이 그녀를 말룸으로 인식하는 순간. 악취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에게 휘몰아쳤다. 말룸은 어린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넌 내거야 비올렛. 넌 내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거야, 내거야. 내게서 벗어나선 안돼, 도망치면 안돼, 비올렛, 비올렛, 비올렛, 비올렛.”

쉴새없는 목소리가 비올렛의 귀를 울렸다. 그녀는 참다 못해 공포에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난생 처음으로 말룸이란 거대한 악의 존재를 마주했던 것이다.

‘말룸!’

꿈에서 깬 그녀의 심장이 쉴새없이 방망이질 쳤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며 리체가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리체?”

그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악몽을 꾸고 있던 것을 발견해서 내내 이러고 있던 모양이었다.

“성녀님, 악몽이 심각하신가봐요.”

비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룸에 대해 뭐라 말할까 고민했다. 짧은 비명을 질렀던 탓인지 노크 없이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무슨일이 있으셨습니까?”

정중한 어조의 기사에게 비올렛이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셀먼드 경 들어가 쉬세요.”

아무리 가디언이라 해도, 성기사단들과 적당히 교대를 할 수 있건만, 그는 되도록이면 하루 종일 비올렛의 곁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아직도 말룸을 처음으로 목도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몸이 잘게 떨려오고 있었다.

“악몽은 아무것도 아닌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낱낱이 보고 있었던 듯, 에셀먼드의 불쾌한 어조가 들렸다.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그 불안한 떠들썩함에 비올렛이 몸을 경직시켰다.  에셀먼드 역시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검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성녀님!”

신관들이 그녀의 처소에 뛰어들었다.

“성녀님의 침소에 무슨 불경입니까!”

리체가 소리쳤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그들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비올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일이십니까.”

비올렛이 차분하게 말하자 신관들은 마치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듯 말하였다.

“대 예배당에 가보십시오. 아그레시아 상이... 아그레시아 상이...!”

*

밤이라 어두운 예배당은 촛불의 황금색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먼저 온 체자레와 린도가 보였다.

“비올렛, 그냥 더 자지 왜 여기왔어.”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비올렛이 물었다. 린도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에셀먼드를 노려보다 새하얀 손가락으로 석상을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 손가락 끝에 닿아있는 것은 석상의 머리였다.

“........”

비올렛은 태어나서부터 그토록 기이한건 본적이 없었다.  아그레시아의 석상에서 피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양의 눈물이라 그녀는 일견 그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대한 그녀의 눈에 맺힌 핏방울이 마치 비올렛을 노리기라도 한 듯 그녀에게로 떨어졌다. 에셀먼드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붉은 액체를 뒤집어 썼을 것이다. 붉은 액체가 퍼지며 비올렛의 새하얀 옷에 튀었다. 냄새가, 냄새가 풍겼다. 이것은 진짜 피였던 것이었다.

“...말룸..”

역시 그것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룸은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세상에;; 습작란에 12시 정각 올리고 뿌듯해 했음 나년을 매우 처주시옵소서 (석고대죄)

아냐 님들 나 진짜 아홉시에 소설 다 올리고  퇴고까지 미리 해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고.. 근데 그게 습작란이었을줄이야....너무 올곧게 올라가있었..눙물난다. ㅠㅠ

말룸의 정체는 저 여자였음니다!

그리고 첫화때 나온 사람.. 그거 집착남주라생각하는데..여러분.....그거 저남자목소리라 말한마디도 안썼음.....

아직 말룸의 행동에 대해 납득이 안가실거에여ㅋㅋㅋ 뭐 이건 차자 서술하도록 하겠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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