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제비꽃, 피어나다 =========================================================================
교황성에 무섭게 내려앉은 냉기에, 시종들, 신관들, 심지어는 대신관들도 땀을 흘리기에 바빴다. 교황의 심기를 대변한 것인지 여름의 따스한 날씨여야 함에도 하늘은 먹구름만 꼈다. 살벌한 기운은 교황의 불쾌한 심리를 나타냈다. 그도 그럴것이 거의 열리지 않은 성무 회의에 성녀가 처음으로 참여했고, 사상 처음으로 성녀와 교황이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성녀는 전면적으로 신전의 방식을 반발하고 나가버렸다.
“이렇게나, 내가 매달렸는데.”
그래서 그 나머지 신관들도 죽이지 않고 파면만 했다. 물론 그녀가 오기전에 신관들은 어쩔 수 없지만 체자레가 죽여버리긴 했다. 비올렛은 린도가 어떠한 이유에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랬다. 나중에서야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 이것은 비올렛에게 바치는 그의 마음이었다. 비올렛이 화만 풀어준다면. 그래, 다시 그때처럼 머리를 만져준다면, 안아준다면. 그깟 양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성무회의의 린도를 바라보던 비올렛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린도는 그런 시선을 처음 받아보았다. 그것이 더욱 더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런 시선을 가장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받았던 것에 있었다. 하지만 신관들 앞에서 까지 그럴 필요가 있었냔 말이다. 아니 애초에 왜 그녀는 자기만 미워할까? 생각해보면 불합리했다. 그녀의 가디언인 에셀먼드는 그녀가 태어났던 마을을 멸망하게 만들었던 원인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거하던 그 더럽.. 아니,( 그는 더럽다는 표현을 다신 그곳에 쓰지 않기로 했다.) 그 천박한 곳을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상식적으로 나쁜 인간은 그가 아닌가? 왜 비올렛은 자꾸 그만 바라보는 것일까. 이젠 후작의 지위까지 버려서 그저 그녀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허울뿐인 기사인 그가 뭐가 멋지다고? 얼굴때문인가? 린도는 자신이 아름다운 외모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셀먼드와 비교가 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큰 체격과 든든한 등 때문일까? 그래, 그럴수 도 있었다. 린도는 방에 있는 커다란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원한 소년의 모습. 린도는 그것이 싫었다. 성력을 풀어 거울을 던지자 쨍그랑, 하는 소리가 거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린도의 분노는 사라질 줄 몰랐다. 그는 한참동안 씩씩거렸다.
성녀가 몸소 나간다는데 신관들이 따라나섰지만 린도는 가만히 기다리라 명했다. 역병을 다루는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것을 처리했는지 평가해주겠다. 그는 몸을 사리는 대신관들에게 그 역병의 도시로 갈 준비를 하라 일러두었다. 성녀가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생각이냐 말하니 입을 닥치고 그를 따랐다.
그리고 린도의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비올렛을 향한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해달라는 건 다해주었고 심지어 찻잔에 설탕 세 스푼이 한 스푼으로 줄면 걱정해서 요리사를 갈아치웠다. 고양이도 키우게 해주었고, 격식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예쁜 옷도 사주었다. 보석도 자주 선물하여 그녀의 창고에 두둑히 쌓여있을 터였다.
언제나 성녀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내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녀 뿐이다. 그 누구도 네 곁에 설 수 없다. 신을 모시는 자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결코 그 옆에 누군가를 둘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성녀 뿐이라 그렇게 듣고만 왔다.
성녀가 나타나면 이 고독이, 이 외로움이 해소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성녀가 나타나는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만의 존재가 나타난다는 그 꿈같은 동화 밖의 세상으로 린도는 벗어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것이 수십 년이 지나고 비올렛이 나타났을 때 어떠했던가. 그 자그마한 몸집을 기억한다. 처음만난 비올렛은 울고 있었다. 자신처럼 이 환경에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었다. 비올렛을 억지로라도 끌고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성녀다. 억지로 데려가면 분명 미움받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오게 될 존재. 멀리서나마 지켜보자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눈물을 나게 한 사람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벌였던 일이 비올렛이 겁에 질려 에셀먼드의 품에 안겨 도망치게 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접하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그녀와 같이 나란히 서 있을수 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비올렛은 갈수록 호의적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께름칙하게 여겼고, 종래에는 화까지 냈다.
“……안 도와줄 거야.”
그는 생각했다. 절대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잘난 가디언과 어디 한번 마음껏 해보라 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린도는 비올렛이 제대로 일을 처리할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지배령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성녀로서 또 찬양받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애정을 더 줄수도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4일이 지났다.
“뭐하는 거야!”
비올렛에게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다른 곳들은 중급신관을 보내놨으니 문제는 없을터였지만, 그 마을에 굳이 갔던 비올렛은 왜 연통이 없는 건가. 이젠 연락까지 하지 않으려는 건가? 분명 연락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놓았다. 린도는 심통을 부렸던 것이다.
“추기경, 비올렛에게 왜 연락이 없는 걸까요?”
린도가 말했다. 평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는 체자레가 말했다.
“글쎄, 그 가디언과 도망이라도 가셨을 수도 있겠군요.”
“추기경!”
하지만 추기경은 그 금안에 서린 조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좌우지간 태평한 얼굴이었다.
“어지간히 미움받고 계시나봅니다, 성하.”
“추기경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린도의 말에 체자레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미움받는 덴 익숙합니다. 사랑받을 기대는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성하와 다릅니다.”
그 여유로운 말에 화가 났으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말로 에셀먼드와 어디 도망이라도 갔으면 어쩌나 하는 질투,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 했던 걱정이 머릿속을 꽈악 채웠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보급품도 안주셨고 단 둘이 그 마을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건, 그건 알아서 제게 도움을 청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린도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보급품도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린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가실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사이 바깥을 많이 나서시는군요. 성력은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린도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체자레도 따라 일어났다. 체자레가 지시를 내리며 신관들을 소집시켰다. 체자레의 손짓 하나에 신관들이 모여들었다. 린도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순 그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왜 불쾌감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추기경은 저쪽에서 신관들을 살피십시오. 저 혼자 가겠습니다.”
린도의 말에 체자레가 물었다.
“성녀님께서 거하시는 마을을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추기경은 마을을 돌아보십시오.”
사실 같이 간다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을 다른 마을로 보내버린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그가 비올렛과 만나면 에셀먼드와는 다른 의미로 비올렛의 시선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린도의 투정이었다. 체자레도 그것을 눈치 챈것인지 순순하게 물러났다.
비올렛이 간 마을은 낮은 산이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산을 넘어야만했다. 몇시간만에 들어간 마을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멸망하며, 죽어있었다.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신관들이 왔음에도 그들은 별로 반가워 하지 않는 듯한 기색을 보였던 것에 있었다.
린도는 그가 지배하는 성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록 이들이 구제해야 할 하찮은 생명들이긴 했지만, 그들이 웃고 지내는 데에 나름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신의 존재를 찬양하며 그 신을 모시는 신관들역시 존경한다. 심지어 신권이 덜 미치는 왕도에서조차 신관들은 함부로 하지 못할 존재였다.
신을 모시는 자들은 언제나 어느곳이든 환영받았다. 아그레시아는 그런 나라였다. 신성의 도시, 바로 신성의 왕국.
그러나 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관들을 본체만체하고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린도는 인상을 쓰며 저 무례한 신자를 따라갔다. 그리고 신관의 예배당에 누워 있는 환자를 보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은 불경이었다. 신을 모시는 곳에 어떻게 저런 더러운 환자들을 들여 놓는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 불경에도 개의치 않고 저마다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사람들은 입구에 비치된 천을 뒤집어쓰고 손을 씻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해서 보았더니 그 마을 사람들이 토악질을 하는 환자의 토사물을 닦았다. 신관들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이 신관을 향했다.
“성녀는 어디 있습니까?”
“성녀님이요?”
린도의 물음에 마을사람 한명이 되물었다. 린도는 그의 얼굴이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손함을 자처하고 있지만, 린도가 언제나 보아왔던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더욱더 확연하게 보였다.
“신전 안 저쪽 방에 계십니다.”
아 다행이다. 그래도 도망가지는 않았나보구나. 린도는 안심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의아했다.
“이제 신관이 왔으니 괜찮을 겁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산 생명이 아닙니까?”
그런데 너희는 왜 그런 태도인가. 린도는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 신관들이 찾아와준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는가? 그들은 교황이 여기 있다는걸 모르기에 그러는가? 그러자 마을남자의 퀭한 눈에 파르스름한 원망과 슬픔이 서렸다.
“아아!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그 절망어린 탄식에 린도는 의아했다. 무슨일이 벌어졌기에 그런 것일까?
“신관들께서 조금만 더 빨리 오셨다면, 우릴 버리려고 하시지 않았다면, 저 성녀를 보내지 않았다면 우린 살았을 겁니다. 우린 전부 다 살았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남자가 린도를 쏘아보며 통곡했다. 린도는 그 말에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원망어린 시선은 처음이었다. 교황인 린도에게 있어서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경외어린 시선, 숙인 머리 뿐이었다. 심지어 누군가를 죽이고 고문할 때조차도 그들은 린도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울부짖음을 린도는 멍하게 듣고 있었다. 그들의 적대의 이유를 하나하나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성토했다. 신관들도 린도도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비올렛은 성력을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미 한 소녀가 죽었다고 한다. 다음엔 누가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왔더니 거부했다고 했다. 린도는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올렛의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지, 입맛에 못 맞춘 저들이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눈 앞에 죽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린도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비올렛을 찾아갔다.
비올렛은 작은 기도실에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를 따르던 호위기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비올렛은 마치 잠든듯 했다.
“비올렛, 도대체 왜 그런거야?”
린도의 물음은 비올렛의 고요를 깨트렸다.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하늘색 눈동자에 보랏빛 물감이 어려있었다. 린도는 그 분노와 다르게 그 눈동자가 아름답다 여겼다.
“왜 그랬냐니? 무슨 짓을 한건데?”
비올렛이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 너는 역병을 막기 위해 이곳에 온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이미 역병은 사라졌어야 하는데 너는 지금 여기 가만히 앉아 마을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잖아.”
“그래 맞아.”
비올렛이 린도의 말에 또다시 긍정했다. 린도는 비올렛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왜 성력을 안 쓴 거야?”
“쓰고싶지 않았으니까.”
그 말에 린도는 기가 막혔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게 아닌 ‘쓰고싶지 않아’서라니. 비올렛은 린도보다 더더욱 감정적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올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비올렛이 잠긴목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역병환자들은 한곳에 모아서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 손을 씻어야 한다는것도. 입을 막아야 한다는것도 몰랐지. 아니 심지어는 치료라는 개념도 가지고있지 않았어. 당연하겠지 신관들만 기다렸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신관이 왔잖아!”
“아니, 처음에 마을을 소거하려 회의때 말했던거 기억나? 이미 버리려 했잖아.”
그 말에 린도의 말문이 막혔다. 소거에 동의한 그 도시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마을들은 산채로 불에 태워져 사라질 마을이었다. 비올렛이 왔기에 이 마을은 살아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다 신관에게, 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비올렛이 속삭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그렇게 그들이 의존하는 신이, 바로 그 신을 모시는 종교의 지도자인 네가 그들을 버리려는 건 생각해보지 않은 걸까? 왜 이들은 이렇게 의존적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해, 네가 대답하려 했던 그대로야. 네가 보살폈기 때문에. 하지만 너는 이 사람들의 곁에서 영원히 이들을 지켜줄 수 없어. 우리 마을이 산적에게 불태워 사라졌을 때 후작 가에서 아무것도 안해준 것처럼, 너도 마찬가지야. 교리대로 신이 영원히 함께할지언정, 신의 기적을 행하는 자들은, 나도, 너도, 신관들도 이 마을에 영원히 함께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하급신관도 사실 도망치려다 죽은거라는걸 들었어.”
“........”
“사람들을 보았니? 아니, 너는 항상 내려다보니 모르겠구나.”
비올렛이 조용히 말했다.
“신관은 신의 의지를 실현할 자들이며, 이들이 온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이곳에 있다는 것, 오지 않는다면 죽음뿐.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지. 안오면 죽는것이고 신관들이 온다면 성력 한번이면 어떤 병이 든 며칠이 지나면 나아버리는걸? 그래서 의원 따윈 필요 없었겠지.”
린도는 도대체 이 성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의 방침을, 이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건가? 이 신앙에 대한 신민들의 순수한 열망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따스한 햇살로 농사가 잘되면 신의 덕분, 비가와 홍수가 나버리면 신의 분노. 신에게 비굴할정도로 굴종하는 사람들.”
비올렛이 기도실 위의 자그마한 신을 나타내는 구체를 보며 말했다.
“왜 행복은 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심지어는 왜 생명을 가지는 것마저 신에 의해 결정되는 거지? 아니, 왜 신에게 그러한 결정을 위임한거지?”
그 말에 린도가 말했다.
“왜냐하면 신이 우리의 창조주니까! 사랑하고 복종하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그 말에 비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린도. 나는 우리를 만들었다는 그 신을 원망하고 있어. 나는 한 번도 성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거든.”
그 말에 린도는 깨달았다. 비올렛은 그가 생각했던 성녀가 아니었다. 아니, 완벽하게 그 반대의 궤도를 걷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성녀라는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이다.
“너는 성녀잖아 넌 이래서는 안 돼.”
“안 되는게 무엇을 말하는거지? 성녀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이란 말룸을 없애는 것 밖에 없어. 그래서 내가 구자르트에 끌려갈뻔한거잖아?”
린도는 이제 배신감마저 느꼈다. 성녀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그가 들어왔던 성녀는, 그가 읽어왔던 성녀는 모든 생명들에게 자애로우며, 사랑을 베풀었다. 정말로 신의 현신 그 자체인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여자는 어떠한가? 신을 원망하고 사람을 증오하며. 사랑을 베풀줄 몰라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 하나 없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똑바로 쏘아보는 것이다.
“왜 한 번도 신을 원망하지 않지? 원망조차 못한다면 왜 그 원인 자체를 자신들에게 찾으려 하지 않지? 왜 이들은 행복마저 자신들의 행복이 아닌 ‘신이 내려준 행복’ ‘신이 내려준 생명’이 되어야 하는걸까? 왜 이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내게 얼마 남지 않는 식량을 쏱아부어 내게 음식을 호화롭게 차려주었던 걸까? 이들의 신앙은 뭐지? 심지어는 나 때문에 그 여자애가 죽었는데도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했어 어리석지, 우습지 않아?”
린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이단의 말. 죄의 말이었다. 만약 비올렛이 성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직접 이단신문관에게 끌려갔으리라. 그러다 린도는 아까부터 비올렛의 말 저변에 있는 의도를 그제야 깨달았다. 비올렛은 맹목적인 신앙을 혐오하고, 비판하고 있었다. 자립하지 못한채 신의 품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의존성이 싫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일부러. 이들로 하여금 신에게 의존하지 않게하려고 이런 거야 신이 없다는걸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냐고!”
비올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린도는 다시금 계속해서 깨닫는 것이다. 그가 원하던 이상적이고 자애로운 성녀는 없다.
“비올렛. 너.....”
“스스로 생각해내고 스스로 시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하고 또 답답했어.”
“그래서 그 여자애가 죽어가는 걸 그대로 두고 본거야?”
린도의 물음에 그제야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소름끼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참 후 비올렛이 말했다.
“생명을 경시하는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어?”
“너랑은 달라! 나는 내 신민들을 버리지는 않으니까.”
“네 기준에 맞는 신민들만 포함되는 거겠지.”
비올렛이 비아냥거렸다. 비올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도는 비올렛이 입고 있던 옷이 꽤나 더러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은발 역시도 그 빛을 잃어 푸석해보였다.. 린도가 비올렛에게 무어라고 말하려 할때 그녀가 읖조리듯 조용히 말했다.
“맞아. 내가 그 여자애를 죽게 했어. 그런데 어떻게 하니? 나는 이미 선택받아버렸는데.”
그리고 비올렛은 린도의 대답도 듣지 않고 기도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린도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들을 향해 갔다. 린도는 화가 났다. 그의 신민들을 이렇게 취급해버린 비올렛의 무정함에 치가 떨렸다. 신을 맹목적으로 받드는게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미쳤다. 그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신을 섬기는 자들의 순수가 싫어 이런 짓을 버렸던 것이다. 린도는 이를 악물었다. 성녀는 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교황인 나는 신이 건재함을 보여주겠다. 심지어 그는 여차하면 자신이 교황인 걸 드러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먹고 환자들이 모여 있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신관들은 린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 앞에 있는 환자에게 시험삼아 성력을 주입해보았다. 왜 신관들이 멀뚱하게 서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린도는 그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그 고운입에 욕설을 내뱉으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왜, 왜. 도대체 그렇게 오해를 살 말을 골라서 한거란 말인가. 도대체 왜? 린도는 알 수 없었다. 비올렛은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정말로,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알기 어렵고 복잡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린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비올렛이 있는 곳을 찾았다.
신전의 후원에 비올렛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뿐. 그 고운 옆선에 서린 표정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인형같았다.
그때 비올렛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린도는 입을 막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손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비올렛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흐느낌 소리가 낮고 조용하게 울려퍼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억지로 툭 막았던 감정이 흘러나와 그녀의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째서. 라고 하기엔 린도는 멍청하지 않았다. 비올렛이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 그는 이해했다.
이 병은 처음부터 성력이 통하지 않았다.
성력이라는 에너지 덩어리를 주입하면 상처는 바로 바로 낫는 즉각적인 효과를 보인다. 반면 병에걸린 사람들은 생명 에너지를 회복하여, 병을 물리친다. 이것이 성력에 의한 치료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정도 생명력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역병은 어떤 일에서인지 성력이 잘 듣지 않았고 생명력이 단시간에 무서운 속도로 깎여 내려갔다. 비올렛은 성력을 쓰지 않았던 게 아니다. 요란하게 보여주기 위한 성력을 써봤자 아무도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렸다가는 이 작은 마을이, 생존자가 병자들보다 절망적으로 적은 이 마을이 어떻게 될지 알수 없었기에, 그녀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흐느끼고 있는 여린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린도는 그에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숲에서 누군가 나왔다. 바로 가디언이었다. 어째서인지 린도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가디언을 밀쳐내며 이제야 네 진의를 알았노라며, 미안하다 사과해야 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가디언은 가만히 서서 흐느끼고 있는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잘 견디셨습니다.”
“........”
비올렛은 예베실에서 본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가디언 앞에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것처럼 위태하며, 연약했다. 그 필사적인 허세가 무너져 내린것이다.
“의원은 왔나요?”
“네, 방금.”
에셀먼드가 대답했다. 비올렛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마치 추워서 떠는것 마냥 바들바들 떨어 그저 뭐라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애써 눈물을 삼키려 하는 비올렛을 보며 에셀먼드가 말했다.
“우십시오. 지금은 그 누구도 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며 린도쪽을 보고 있는 에셀먼드는 린도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린도는 가디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는 린도와 달리 당당함을 가지고 어떠한 책망의 눈초리로 린도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안다.
이것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에셀먼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린도는 아무말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미 에셀먼드에게 들켰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어차피 몸을 숨기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가디언의 손이 그녀의 등에 얹어지려다 허망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린도에게 가디언의 고뇌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 성녀라는 여자가. 너무나 사랑하는 비올렛이 이런 일을 벌이고, 울고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부정을 저지른 그녀 자신에게 손을 댔을지도 모르는 신관들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달라 말했던 비올렛이 애초에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서 특히나 그녀 자신의 변덕으로 죄없는 생명을 빼앗았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를 매도하는 사람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으로, 비올렛을 비난하려 했다.
수십년의 나이를 먹은 자신보다 더욱 더 깊이 생각하며, 앞을 내다보며,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을 뿐인데.
성녀의 자격이 없는게 아니다. 그녀는 지나치게 성녀다웠다. 그러나 린도는. 그 성녀다움보다 비올렛의 우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성녀는 한참이나 울었다. 한참이고, 한참이고. 그리고 가디언은 언제나 처럼 냉정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린도는 처음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원망하는 눈빛. 절망을. 그들은 말했다. 조금만더 신관이 빨리 와줬더라면, 입구를 막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그래, 그 말이 맞았다. 그러나 틀리기도 했다. 신관들이 왔어도 이 병은 고쳐지지 못했을 것이다. 절망만이 그들을 지배했을 터였다.
비올렛이 데려온 왕도의 의원들은 뛰어난 자들이었다. 린도는 왜 왕도에 역병이 퍼지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린도는 성력이 전부라 믿고 있었다. 실제가 그러했다. 실제로 못고칠정도로 심하게 전개된 병이 있다는 것은 린도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러나 늦게 찾아온이 잘못이다. 성력으로 못고치는 병은 신의 부름을 받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기경 체자레의 방침으로 성도는 왕도의 것을 배제했다. 비록 그들이 성력을 쓰고, 왕도가 하지 않는 글을 깨우쳤으나. 의술이란 것은 신관들에게 몸을 내맡기지 않으려는 왕의 발악이라 생각하며 비웃었다. 실제로 국왕은 신관을 거의 찾지 않았고 찾는 것은 의원들 뿐이었다. 성도에서 왕을 상징하는 것들은 의술도 포함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술을 배제했다. 성도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관은 넘치는 편이었고. 얼마간의 공물을 주면 성력을 쓴다. 그러나 그것에서도 낫지 않는다면 그건 신이 버린것이다. 그런 편리한 사고를 함으로서, 성도는 고여서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술의 발전도 거의 없이 도태되었다. 그리하여 성녀가 와도 못고쳤던 병들이 의원이 오자마자 금세 활기를 띄었다.
본래는 3일정도 되면 급사하는 검은 죽음의 병이라던 이 병들은 이미 왕도에서 고쳐졌던 병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성도에 전해줄 필요가 없기에 그러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3일이 지나도 마을사람들이 생존한 이유를 린도도 알고있다. 비올렛 때문이었다. 그녀는 환자들을 모아. 되도록이면 깨끗한 상태에 두었고. 알게 모르게 성력을 주입시켜 계속해서 깎여나가려던 생명력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것이 얼마나 체력을 요하는 일인지 안다. 따라서 그 일이 끝나고 난 뒤 비올렛은 넝마가 되었다. 마을은 비올렛으로부터 구해진 것이다. 사망자는 딱 한 명. 몸이 약한 여린 소녀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비올렛을, 성녀를 비난했다. 마지막까지도 비올렛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태도로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덜덜 떨며 울고 있었던 비올렛을 린도는 기억한다. 그리고 악역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했던 소리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이들은 살수 있었다. 이들이 조금 덜 의존적이었다면 어쩌면 의원이 있었을 수도 있었고. 의원은 그저 뒷산에 피는 흔하디 흔한 길티너스 풀이 약이라는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신에게 기대며 죽음을 기다렸던 자들의 말로가 이러했다.
이러한 길은 옳은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일일까? 마을을 구함에도 오명을 뒤집어 쓴 비올렛을 보며 린도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했지? 성녀와 교황은 동등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 방식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국왕은 멍청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틀렸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시 벌어진 성무회의에선 비올렛은 빠져 있었다. 린도는 비올렛이 쓰러졌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성력을 많이 써서가 아닌, 몇날 며칠을 잠을 자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향했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것은 명백하오. 성녀가 아니었으면 우린 크나큰 실책을 범했겠지.”
노인의 무거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지배했다.
“이번 역병은 몇십의 신관도 해결하지 못했소. 그러나 왕도의 의원이 셋으로 종식되었지.”
휘장 너머 체자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도의 의원들을 데려오시오. 그리고 신전에서 신관으로 키우기로 한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시오. 그리고 하급신관들 역시 기본적인 의술 소양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성하, 하지만 그것은 국왕의 어리석은 방식입니다.”
신관들이 반발하기 전에 체자레가 미리 말했다.
“‘나’의 명령이오 추기경.”
교황의 단호한 말에 체자레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역병에 관련하여 일어난 두번째 성무 회의에서 벌어진 것은, 교황 린도 즉위 처음으로 일어난 교황과 추기경의 신경전이었다.
============================ 작품 후기 ============================
후.. 이번편 길었네요.. 아오... 진짜 정도를 모르네. 사실 두편 가를까 하다가 여러분이 막 ㅁ발암할까봐
어제 비올렛때문에 선삭이 무려 20개를 넘어갔다능.... 저 너무 슬프다능.. 스무명의 독자님들이 가셨슴니다.. 그래도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공을 믿어주세여
우리비올렛 ㅠㅠㅠㅠㅠ 좀 삐툴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착하고 다정한아이에여 스스로는 다정하다생각하지 못하지만 ㅠㅠㅠ
성력ㅇ로 병을 치료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자면. 성력은 hp를 회복하는 수단!
하지만 사람들은(는) 독에 감염되었다! 1턴마다 hp 80감소!
하지만 웬만한 성력들로는 hp가 안차고. 성력을 채워줘 봤자 자꾸 힐이 hp감소를 못따라가니 죽는거죠.
그런병이 성도 주변에 있었겠지만. 성력으로도 듣지 않으니, 이건 신의 벌이라 생각했을테고 그대로 전승되었을겁니다.
생명력을 높여서 병의 소멸시기를 확 높여버리는 성력의 치료방법과
그 병 자체를 제거하는 의술의 대립이라고나 할까요...
다음편이 비올렛 시점입니다.
자 여러분, 코멘트 100개 + 추천 500개면 내일도 돌아감니다~~ 저 요즘 삘받았어요 후~~
그리고 감기조심하세요오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