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제비꽃, 피어나다 =========================================================================
성도를 거니는 비올렛은 다소 피곤했다. 린도가 재잘재잘 떠들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단위에서 내려서 보이던 사람들이 기억났다. 밤 하늘에는 불꽃이 번쩍였고, 사람들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작년 생일과 이번 생일의 차이란 이랬다. 마치 그녀가 언제나 핍박받아왔던 왕도와 이곳은 다르다는 듯, 신관들은 저마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녀에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영광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커다란 영광인 듯 했다.
기가 질린다는 말이 맞았다. 그녀를 위한 것은 기뻐할 일이었으나 기쁨보다는 께름칙함 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왔던 저녁께 쯤에 교황성 안으로 들어갔을때, 그녀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아름다운 소년들이 새하얀 옷을 입고 노래하고 있었다. 예전 레기우스 살바나 때나, 그녀가 공식적으로 시성(諡聖)을 받을때 그녀는 그것을 노랫소리로 인식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신전의 소년들이라 생각하자 그녀는 그 아이들이 그저 노래만 부르는 소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들은 기껏해야 여덟에서 열셋은 되어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다 비올렛이 자신들을 보는 것을 알고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그녀를 찬미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맑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비올렛은 가만히 노래를 들었다. 성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듣고 계시니 떠들썩한 신관들도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침묵을 지켰다. 오로지 린도만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체자레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당연한 대우인 것일까. 체자레의 손짓에 그들은 노래 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비올렛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았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비올렛의 근처에 모여들었다.
“생일을 축하드려요.”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들은 순진한 얼굴로 비올렛의 생일을 축하했다. 아이들의 눈빛에 비올렛은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비올렛의 입에 살풋 곡선이 서렸다.
“많이 피곤하시죠?”
시녀들이 다가와 정돈된 방에 그녀를 앉혔다. 허리를 꼿꼿이 펴느라 허리가 아파왔다. 아프다고 몸을 거의 움직인 적이 없으니 더욱 더 그러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비올렛은 그 건너에 서 있는 에셀먼드를 보았다. 앓아 누워있는 동안에도 몇번씩 서 있는것을 보았다. 겨우 걸어다니고 마차에 탔던 비올렛에 비해 에셀먼드는 그녀를 호위했다. 성녀를 감히 공격할 사람은 없겠지만, 에셀먼드의 성격상 그는 일을 허투로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피곤할 터였다.
“에셀먼드 경.”
아직도 어색한 이름이 나왔다. 에셀먼드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앉으세요. 오늘의 일정은 끝입니다.”
“호위는 일정이 따로 없습니다.”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나올줄은 알았다.
“경께서 쉬지 못하신다면 몸이 상할겁니다.”
“성녀님.”
에셀먼드가 대답했다.
“저는 당신의 가디언입니다. 당신의 오라비로서 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잠을 자지 않고 당신을 지키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말에 비올렛은 조금 화가 났다. 딱히 그를 오라비라 생각해서 그런건 아니었다.
“저는 당신이 오라비였다고 해서 특별취급을 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로디온 경이 가디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비올렛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에셀먼드 얼굴에도 냉기가 감돌았다. 그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를 눈치 챈 시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리체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그녀 역시 시녀들에게 끌려가버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쟁터에서는 사흘밤낮을 자지 않고 야습에 대비한적도 있습니다.”
전쟁터. 그 말을 듣자 비올렛은 입이 막혀버렸다. 비올렛 때문에 그는 그런 고생을 한 것이다.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에셀먼드의 눈썹 역시 모아졌다. 잠시동안 소름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그렇다면 사흘 밤낮이 아니라 평생 그러실건가요?”
기가 죽어 조그맣게 속삭이는 듯한 말에 이번에는 에셀먼드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비올렛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다 비올렛은 이렇게 마주 보고 앉는것이 더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혀를 깨물것같다. 후작 가 에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정다운 사이가 아니었다. 편하게 하고싶어 일단 앉으라 한것이나, 그의 자세는 경직되어 있다. 뭐가 그녀를 섬기는 가디언인가. 섬기기는 커녕 이쪽이 섬겨야 할 판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라 말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떠셨습니까?”
의외로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은 에셀먼드였다. 비올렛은 눈을 깜빡였다. 어땠냐니, 일단 무엇이 어땠냐는 것일까. 다행히 에셀먼드도 지나치게 말이 생략되었음을 알고 다시 말했다.
“성도는 어떠셨습니까?”
“그게 궁금하나요?”
비올렛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인지라 맥이 빠질 정도였다. 성도가 어땠냐는 감상을 묻다니, 비올렛은 마음 저편에서 생각했던 말을 했다.
“처음으로 에르멘가르트 가문에 거두어진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더군요.”
“........”
비올렛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셀먼드역시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듯 했다. 왜냐고 묻는듯한 시선에 비올렛이 말했다.
“분명 이런 대접을 받았다면. 저는 오만하고 교만했을 겁니다. 내가 무엇이라도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때, 체자레의 성에서 행복해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상태로 떠받들듯이 자랐다면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아마 정말 비올렛은 그것에 취해 있을 것이다. 저들의 맹목적인 경외와 사랑은 두려울 정도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에셀먼드가 물었다. 다시금 물어보는 질문에 비올렛은 당황했다. 그는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비아냥거림이 아닌 대화를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길게 끌어간 적이 있었나. 조금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셀먼드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대답을 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다소 이상한 대답이 될수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그렇게 증오하던 후작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은 아니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에셀먼드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연히 가져야 할 것 들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당연히 받아왔어야 할 대우였습니다.”
에셀먼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비올렛이 눈을 깜빡였다. 이 어색함과 알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도저히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리체가 차를 들고 왔다.
“성녀님! 가디언님도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 하세요 당이 떨어져서 그러신거에요!”
리체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접시에는 쿠키가 소복히 쌓여 있었다. 마침 단것이 먹고 싶었던 비올렛의 얼굴이 펴졌다. 다행이다. 비올렛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색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그녀는 아마 다시 쓰러졌을 것이었다.
*
“비올렛!”
린도가 손을 흔들었다. 비올렛은 가만히 있다가 쪼르르 달려오는 린도를 보았다. 에셀먼드가 서 있던 자리를 비켜 주었다. 린도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분명 열살때는 든든해 보였는데 지금은 어리게만 보인다. 분명히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건 확실한데 아이처럼 순진하다. 한 종교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런다.
“이리와봐.”
린도는 그녀의 손을 이끌며 그녀를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로 옮겼다. 그 뒤를 따르던 시종들 몇몇이 그의 손짓을 따라 무엇인가를 내려 두었다. 은색의 접시에 있는 것은 네모난 어떤것이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나무색을 띄고 있었다. 접시를 놓은 시종들이 시녀들과 함께 물러났다. 아마 저 시종들은 린도가 교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단걸 좋아한다고 했지? 이거 먹어봐.”
비올렛이 그것을 보았다. 에셀먼드가 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경은 내가 성녀께 이상한 것이라도 주었다고 생각하나?”
린도가 싸늘하게 맞받아 쳤다. 비올렛은 또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생각했다. 에셀먼드가 대답했다.
“수도에선 이런 음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거긴 원래 촌스러운 곳이라 많이 늦거든.”
“.......”
대놓고 왕도를 비하하는 말에 에셀먼드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린도가 말했다.
“독을 넣으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우선 단 한방울로도 즉사하게 하는 독이 있고. 서서히 중독되게 하는 독이 있어. 어떤 것은 마치 옷감과 같은데 독으로 뽑아낸 옷감이라 그걸 손수건으로 만들어 땀을 닦으면 죽어. 어떤 것은 마치 에메랄드 보석처럼 푸른 빛깔을 내지. 그걸 만졌다가 손가락에 입에 댄다면 죽는거야 물론 그 돌은 무척이나 희귀해서 구하긴 어렵지만 못구할 것도 없지. 경도 그걸 알텐데?”
“........”
그렇게나 많은 독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과연 권력의 정점에 선 자였다. 린도는 에셀먼드를 차갑게 보다가 비올렛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에셀먼드경 괜찮습니다. 전 독으로 안죽어요.”
그녀의 말에 린도가 화를 냈다.
“아이참! 내가 꼭 죽이는 것처럼 말하잖아!”
린도가 보란듯이 접시에 있는것을 빼먹더니 우물우물 씹었다.
“맛있다. 그래, 어때? 어서 먹어봐!”
그 말에 비올렛은 그 정체불명의 검은 요리에 손을 댔다. 손을 대보니 그것은 딱딱했다. 조금 불쾌한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독특한 향이 났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달콤한 향내도 났다.
“어, 그거 오래 쥐면 녹아!”
비올렛은 손에 쥔 그것을 보았다. 가장자리가 조금 녹아 있었다. 입에 베어 먹으니 달콤한 향이 퍼졌다. 쌉싸름한 것 같으면서도 단맛이 났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맛이 아닌 부드러운 맛이었다. 비올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봐, 네가 좋아할거라 했잖아. 그렇지 않아?”
“........”
린도는 자랑하고 싶은듯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시종들은 모두 물러난 뒤였다. 그는 고소하다는 듯 에셀먼드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보여?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
그게 무슨... 비올렛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인정하기로 했다. 확실히 이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는 맛있었다.
“이게 뭐에요?”
“응, 비올렛, 다시 반말로 해줘.”
“.........”
비올렛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물었다.
“이게 뭐야?”
“초콜렛이라고 옆나라에서 들여온 거야. 맛있지? 이걸 만들 수 있는 요리사는 아그레시아에서 성도에만 있다는 말씀!”
솔직히 이번건 좀 맛있었다. 비올렛은 입에 스미는 단맛을 잊을수가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게 존재하는구나. 린도가 웃었다.
“많이 만들어 두라 시킬거야! 네가 원할땐 언제든지 먹을 수 있어.”
“정말?”
비올렛의 물음에 린도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렛은 하나를 더 먹으며 말했다.
“고마워.”
“뭘, 이런 걸 다. 추기경님도 기뻐할거라고.”
“그래.”
비올렛은 체자레를 떠올렸다.
“비올렛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해도 돼. 이곳에서 하고 싶은것만 하고 살아.”
“........”
린도의 말에 비올렛의 생각이 뚝 끊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린도는 말하고 있다. 이곳은 그녀가 생각하던 것 보다 달랐다. 어렸을 적 신관의 무서움을 몇번이고 경험한적이 있던 그녀는 신전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그녀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고 있었다.
“정말이야,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돼. ”
비올렛은 해맑게 웃고 있는 린도를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그 무엇도 하게 두지 않겠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황이 하는 일을 그녀가 맡을 생각은 없다.
“정말? 나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돼?”
“그럼, 물론이지.”
“곧 애녹시 글로리가 다가오는데 거기서 등을 날리지 않고 쉬어도 될까?”
“물론이지.”
린도가 웃었다.
“한번씩 왕궁에 가야 하는데, 가지 않아도 되는거야?”
“그럼.”
“신관들을 부를 때 나는 피곤하니 안나갈래.”
“당연히 네가 원한다면 그래야지.”
비올렛이 린도에게 말했다.
“그러면, 말룸 역시 물리치는게 너무 무서워. 그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린도가 그녀의 말에 황금빛 눈을 빛냈다. 오묘한 눈동자 색이 다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는 것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추기경을 가까이 두더니 체자레를 닮았던 건가. 아니, 체자레가 그를 닮았던건가 모르겠다.
“그럼, 물론이지. 여차하면 내가 죽여버릴거야. 말룸따윈.”
신전에 온지 얼마 안된 비올렛은 들을 수가 있었다. 왜 린도가 만장일치로 교황이 되었는지. 전대 성녀인 아나스타샤가 성녀중 역대 최강의 성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교황 린도는 성녀에 비견될만한 역대 최강의 성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난 널위해 뭐든지 할거야 비올렛.”
소년이 미소지었다. 비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날 시험하지 말아줘. 비올렛. 응?”
그가 비올렛의 귀에 속삭였다. 비올렛은 그녀의 귀에 속삭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어려보였던 린도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미소에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그는 분명 낯이 익었다.
============================ 작품 후기 ============================
와.. 여러분 무슨소리 안나나요? 추천과 코멘이 반토막 나는소리. 저는 뚝 반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라고요.. 힘이 너무 빠진다. .빠져..
참고로 이번 3부는 신전 편이라고 말했죠? 당연하겠지만 신전의 주인인 린도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올 겁니다. 체자레은 1~4부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람이고요.
2부가 이자카와 샤를이 중점이었다면 3부는 에드와 린도가 중점이군요.
에드의 분량이 지금 짠내날정도로 작아보이겠지만 많아 질겁니다. 진짜에여. 왜냐면 이건
로맨~~스 판타지니까 ㅋㅋㅋ 여러분들은 서서히 로맨스에 젖어가는 이 커플들을 보고 계십니다. 정말이에여 믿어줘여 ㅋㅋ 이제 나중에 왜 이게 로맨스판타지인지 이해해주실거에여
다음편을 예고를 약간 드리자면. 비올렛이 드디어 분노합니다. ㅇㅇ 비올렛 화나여
추천수+코멘 많으면 내일 또 올게요!!! 헤헤 이번주 취재 끝났어요! 세부설정들어가서 시간이 약간 있을것같아요!